청록파 시인 조지훈. 시인이면서도 '지조론(志操論)'을 쓸 만큼 '지조'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던 선비였다. '지조론'은 그의 집안 가풍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지훈의 고향인 경북 영양군 일월산 자락의 주실(舟室) 마을은 한양 조씨들이 400년 가깝게 터를 잡고 살아온 집성촌이다. 인근지역에서는 보통 '주실 조씨'들로 불린다. 주실 조씨들은 영남의 식자층 사이에서 '검남(劍南)' 집안으로 불리는 강골 집안이기도 하다. '칼 같은 남인 집안'의 가풍 속에서 조지훈은 태어나고 성장하였던 것이다.
조선 후기인 18세기에서 19세기까지 200년은 경상도 남인(南人)들의 수난시대였다. 노론(老論)들에 밀려 벼슬다운 벼슬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춥고 배고픈 상황에서 머리를 숙이고 가랑이 밑으로 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자존심을 지킬 것인가. '검남'이 택한 노선은 후자였다. 자신들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가훈이 바로 삼불차(三不借)였던 것이다. '세 가지를 빌리지 않는다'.
첫째는 재불차(財不借).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재물을 빌리지 않는다. 재물을 빌리지 않기 위한 최후의 마지노선이 종가 앞에 위치한 50마지기의 논이다. 수백년 동안 이 50마지기는 누구도 함부로 팔거나 저당 잡힐 수 없는 불가침의 땅이었다. 둘째는 문불차(文不借). '문장을 빌리지 않는다'. 선비 집안이 글을 못해서 다른 집안으로 글을 빌리러 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주실 조씨들은 어렸을 때부터 글공부에 매진하였다. 비록 벼슬은 못해도 학문이 높으면 선비로 대접받을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셋째는 인불차(人不借). 사람을 빌리지 않는다는 것은 '양자를 들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조선시대 명문가에서 아들이 없으면 양자를 들여 대를 잇는 것이 관례였는데, 양자를 들이려면 상대방 집에 가서 머리를 조아리고 간청을 해야만 하였다. 양자 달라고 머리를 조아리지 않겠다는 말이다. 흥미롭게도 조지훈의 집안에서는 370년 동안 양자를 들이지 않고 혈손으로 대를 이어왔다. 이 삼불차가 '지조론'의 뿌리였다. 영남지역의 보수성은 '삼불차'와 같은 남인가풍과도 관련 있다.
(조용헌 goat1356@hanmail.net)
입력 2004.10.13. 18:44업데이트 2004.10.13.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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