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감독

주간조선이 창간 36주년을 맞아 우리 시대의 이단아, 김기덕 감독과의 ‘특별인터뷰’를 마련했다. 1996년 저예산영화 ‘악어’로 데뷔한 이래, 김기덕 표 영화는 파격적인 내용과 상상을 초월하는 잔인한 영상으로 한국 영화계에 끊임없는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초등학교 졸업 학력에 공장 근로자 출신인 김기덕 감독이나, 그가 만들어낸 11편의 저예산 영화들 모두 이 사회의 주류에서 비켜나 있지만 그는 올해 베를린·베니스 영화제 등 내로라하는 국제영화제 두 곳에서 한 해에 연달아 감독상을 수상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비주류 인생, 비주류 감독이라는 수식어를 잠시 접고 인간 김기덕을 만나봤다.

인터뷰=김민배 주간조선 편집장(baibai@chosun.com)

김민배: 김 감독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전혀 개의치 않고 작품활동을 하는 것 같은데. 평소 본인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생각을 하십니까.

김기덕: 남들보다 세상을, 고통을 더 알아서 다르다기보다 제 유전자 자체가 다르게 생겨먹은 것 같습니다.

“나는 유전자가 다르게 생겨먹은 사람”

김민배: ‘사마리아’ ‘나쁜 남자’ 등 김 감독 영화의 주인공들은 원조교제하는 여고생, 쫓기는 범죄자, 깡패 등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의 삶을 집요하게 집중 조명하는 이유는 뭡니까.

김기덕: 사회적 제도 안에서 그들은 아웃사이더로만 비치는데 저는 모든 게 하나의 연결고리라고 생각해요. 그 요소를 빼버리면 세상이 잘 돌아갈 것 같지만 사실 사회가 그들 없이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거든요. 그래서 전 그들을 사회에서 내버려진 사람들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를 돌아가게 하는 한 부분이라고 봅니다.

그런다고 창녀가 있어 남성들이 성욕을 해결해 사회가 잘 굴러간다, 뭐 이런 뜻은 아니고요. 제 말은 창녀나 깡패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없다는 겁니다. 사회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어찌됐건 그들에겐 그 쪽의 길이 열려있었던 거죠. 그들도 우리와 같은 인간입니다. 우리가 도덕과 윤리라는 잣대를 들이댈 때 그들은 결코 이해받을 수 없는 존재지만 그런 잣대를 걷어내면 결국 남는 건 인간이라는 거죠. 제 영화는 윤리와 도덕이라는 필터를 살짝 걷어내고 그들을 들여다보는 것 뿐이에요.

김민배: 왜 그들의 삶에 그렇게 관심을 기울이는 거죠.

김기덕: 그들과 우리가 다르지 않다고 얘기하는 거죠. 제 영화에 다 창녀·깡패만 나오는 게 아니라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이 나와요. 제 영화는 커뮤니케이션을 하자는 제안입니다. 전 그들이 어떻다는 식으로 ‘정의’를 내리지 않습니다. 전 의문을 제기하죠.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마리아’를 포함해 제 영화들이 다 진행형으로 끝나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김민배: 경상북도 봉화에서 초등학교 다니던 김기덕 어린이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궁금합니다.

김기덕: 어릴 때 제 사진을 봐도 웃는 모습이랄까 이런 게 아주 묘해요. 다시 태어난 아이 같다고 할까…. 한 40년 살다 그대로 죽어 다시 태어난 거 같은. 어쨌든 태어나면서부터 호기심을 갖고 세상을 바라봤던 거 같아요.

전 어릴 때 길에서 돈을 줍고 다녔어요. 가난한 시골동네에 돈이 있을 리가 없는데 논둑 밑으로 쓰레기들이 모인 곳을 다니면서 이리저리 헤집고 다녔어요. 무언가를 만들고 그리는 것도 좋아했어요. 어릴 때는 또래들이 제 앞에 주욱 길게 줄을 서서 주문해요. ‘난 맥아더를 그려달라. 육영수 여사를 그려달라’(웃음) 총 만드는 것도 좋아했어요. 공장일을 끝내고 나서 혼자 심심하니까 권총을 2~3자루 만들었는데 시험사격을 하다 경찰에 끌려가 매도 좀 맞고 그랬죠.

김민배: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일산에서 삼애전수학교를 다닌 것으로 알고 있는데….

김기덕: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졸업장도 없는, 한마디로 졸업해서 농사꾼 되는 전수학교에 다녔어요. 재밌었어요. 늘 하던 일이 돌 캐서 산 밑으로 나르든지 농장일을 돕는 거거든요. 공부보다는 전 일하는 게 좋았고 그때의 정서가 제게 굉장한 도움이 됐어요. 제가 서정적인 인간이 될 수 있게 해준 것 같아요.

저와 제 영화에 가장 영향을 미친 건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서벽리라는 산골동네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냈다는 것, 정상적인 교과 과정을 밟지 않고 농업학교를 가 농사라는 걸 배웠다는 것, 또 어린 나이지만 월급 1만5000원을 벌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서울의 공장들을 돌아다니며 여러 사람들과 대화를 했다는 것입니다. 즉 학교에 갇히지 않고 이 사회의 철학을 경험했다는 거죠.

“아버지는 큰소리만 쳤던 무능한 사람”

김민배: 아버지가 ‘노동일을 하라’고 공부를 중단시켜 공장 노동자가 됐다고 들었습니다.

김기덕: 전수학교를 3년 만에 졸업하고 16살 때부터 사회생활을 했어요. 물론 그 나이에는 열등감이 많았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그 경험이 제게 굉장히 중요하더라고요. 보통사람들이 밟는 과정을 밟았다면 그런 고민이 없었겠죠. 또래들이 교복을 입고 학교를 갈 때 나는 공장엘 가야 하는 그 대비가 내게 굉장히 많은 고민을 하게 했어요. 사회적 저항감이었고 열등감이었죠. 그렇지만 제도권에 속해있는 그들보다 나는 우량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는 이론서적들을 거의 안봐요. ‘사람들이 써놓은 책을 보고 영향을 받지 않겠다, 이왕 책을 안본 거 죽을 때까지 보지 말자’ 이런 생각도 했어요. 보고 느끼고 이해하는 것들이 제게는 더 중요하니까.

김민배: 아버지는 뭘 하시던 분이셨나요.

김기덕: 뭘 하시던 적이 없는 분이에요.(웃음) 6·25전쟁이 만들어낸 가장 슬픈 캐릭터죠. 저희 아버지가 18살에 국방경비대로 입대하셔서 6·25참전하시고 그 때 굉장히 많은 상처를 입으셨어요. 드러나진 않지만 몸 전체가 완전히 무너졌죠. 몸에 총알도 많이 맞으셨고 북한군 포로로 잡혀 고문도 많이 당하셨어요. 그래서 제대하고 나서도 일을 한번도 제대로 하신 적이 없었어요. 아버지는 늘 큰소리만 치셨어요. 자기 몸이 고통스럽고 어쩔 수 없으니까 그냥 큰소리만 치는 거…. 난 그게 너무 슬펐어요. 나라를 위해 전쟁터로 가셨고 거기서 얻은 건 상처뿐이죠. 그래서 자식들에게 기대가 컸고 남들보다 몇 배는 더 강하게 다스리셨어요. 어렸을 땐 나한테 가장 무서운 사람이 아버지였어요. 이제는 나한테 가장 약한 분이죠. 지금도 우리 아버지는 국무총리에게 편지를 보내요.

김민배: 아버지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김기덕 영화’의 기본 정서라고 하는데….

김기덕: 저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어요. 다른 게 아니라 아버지의 ‘관념’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어요. 끊임없이 조종되는 느낌, 아버지의 의식세계 안에서 조종되는 느낌이랄까.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인간은 이것이다 저것이다’, 아버지가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나에게 강요하는 것들이요. 담배를 아직도 못피는 건 바로 아버지 때문이에요. 저, 술도 잘 못해요. 아주 못하는 건 아니지만 절대 취하질 않아요. 아버지라는 분은 어떻게 보면 굉장한 장점을 주신 분이시자 제가 재미없게 살도록 만든 분이에요. 당시에 제게 아버지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은 군대를 가는 것밖엔 없었어요. 해병대 가는 날 아버지에게 군대간다고 했더니 몽둥이 들고 동네 입구까지 따라오셨어요. 전 울면서 입대를 했죠.

김민배: 김 감독의 영화는 잔인합니다. 어떤 장면은 보다가 화면에서 눈을 돌리는 경우도 있어요. 왜 그렇게 파격적인 장면을 보여주는 겁니까.

김기덕: 내게 가해를 한 자에게 나는 무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한 거죠. 제가 갖고 있는 복수심의 표현이기도 하고. 제 영화를 보면, 전 비겁한 사람들에 대해선 결코 용서하지 않고 그들에 대해 가장 가혹한 표현을 하는 편이에요. 그러나 나쁜 사람들에 대해서는 전 함부로 하지 않아요. 나쁜 건 나쁘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거거든요. 비겁한 건 나쁜 걸 알고 하는 거죠.

김민배: 언 고등어로 사람을 찔러 죽이거나, 전단지를 돌돌 말아 목을 찌르거나 낚시 바늘을 여성의 성기에 찌른다든가 하는 표현은 너무 섬뜩합니다.

김기덕: 전 총이나 칼 주먹 그런 표현방법을 쓰지 않아요. 이왕 영화를 할 거면 기존 영화에서 보여주지 못한 형태의 폭력을 보여주고 싶어요. 폭력의 강도가 아닌 소도구가 갖는 섬뜩함 때문에 나빠 보이는 거죠. 영화는 이미지의 표현이잖아요. 이왕 표현할 바에는 또 다른 미학적 폭력, 새로운 폭력을 보여주자는 거예요.

김민배: 폭력을 무엇이라 정의하시는 겁니까.

김기덕: 폭력은 또 하나의 소통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다시 말해서 대화가 안되니까 폭력을 쓰는 거잖아요. 폭력에 대해서는 우리가 더이상 이해하려고 들지를 않는 거죠. 많은 사람들은 ‘당신의 영화에서 폭력적인 장면만 빼면 위대하다’고들 하는데 저는 그 말을 인정하지 않아요. 그건 까만 연필로 하얀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리라는 게 아니라 하얀 연필로 그리라는 것과 마찬가지니까. 흰색을 보여주기 위해 검은 색을 먼저 칠하는 겁니다.

김민배: 해병대를 제대한 후 1987~1988년 야간신학교를 다닌 이력은 흥미롭습니다.

김기덕: 신학교 야간부를 다녔습니다. 제대한 후 다시 집으로 가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간 곳이 남산 장애자 교회였어요. 거기서 일을 도우면서 숙식을 해결하고 그러면서 신앙을 알게 된 거예요. 내 인생이 구원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에 열심히 교회를 다녔죠. 울면서 기도도 많이 했고 ‘목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도 했었어요. 그런데 그 당시 접한 배움들이 올바른 것만은 아니었죠. 한 1년간 공부를 했는데 모순이 더 깊어지더라고요. 이 목사님 저 목사님이 예수에 대해 가르치는 게 다 달라요. 그 때 그 혼란을 정리할 능력이 저한테는 없어서 그만뒀습니다.

김민배: 파리에서 돈도 없고 후원자도 없이 어떻게 파리생활을 버틸 수 있었나요.

김기덕: 프랑스에 갈 때 주머니에는 비행기표만 달랑 있었어요, 제가 열등감은 있었지만 제 자신에 대해 믿는 편이었어요. 또 그 당시에는 하나님을 믿었어요(물론 지금도 믿지만). 그 때 제가 챙겨간 게 신약성경 한 권이었어요. 유럽에 가서도 힘들 때마다 신약성경을 꺼내서 읽었죠. 그 때는 성경 어느 구절을 펴들어도 다 내 얘기 같고 내 아픔을 이해받는 것 같았습니다.

김민배: 그림은 많이 팔았습니까.

김기덕: 그림은 그렸지만 내 건 안팔았어요. 내 미숙한 흔적이 유럽에 남길 원치 않았으니까요. 대신 사람들 그려주고 1000만원 정도를 벌었어요. 3개월을 그리면 1년은 먹고 살 수 있었어요. 2년이 지나고 돌아왔죠. 한 군데 머무는 게 체질에 안 맞았으니까요.

김민배: 파리에서의 경험이 김 감독의 작품세계에 남긴 건 무엇입니까.

김기덕: 당시에는 그림으로 승부를 내보겠다 싶어서 간 건데, 막상 가보니까 이미 그림에선 모든 가능성이 다 나와 있는 거예요. 갤러리에 전시된 그림을 보러 가면 내가 그릴 것은 없다는 걸 느꼈어요. 그림은 추상을 넘어 이미 몇 번 경계를 넘나들었죠. 영화는 그렇지 않았어요. 국내에는 현실과 팬터지를 접속시키는 반추상 영화도 아직 없었죠. 지금도 반추상은 저, 이창동, 홍상수 감독 정도입니다.

“학교 교육 획일화… 위대한 예술가 안나올 것”

김민배: 임권택 감독은 “집안 좋고 학벌 좋은 집 자식은 좋은 영화를 만들기 힘들다”라고 했는데 동의하십니까.

김기덕: 학교 교육이 획일화된 후 더 이상 위대한 예술가는 나오지 않았다고 봐요. 창조는 그런 데서 나오는 게 아니거든요. 한국 감독의 80% 이상이 제도권에 속해 있어요. 그 외 저를 포함한 몇몇이 비제도권에 속한 감독인데 전 제가 의식적인 면에서 그들보다 더 지평이 넓을 수는 있어도 좁지는 않을 거라고 봐요. 물론 제 영화에 기술적으로 아쉬운 면이 있긴 해요. 그러나 아무도 못하는 것을 한다는 게 더 중요한 거죠.

김민배: 김 감독에게 영화는 무얼 의미하나요.

김기덕: 일기(日記)라고 생각해요. 그 시대 사건·기억·이미지들을 담는 거죠. 내 일기이듯 다른 누군가의 일기가 됐으면 해요.

김민배: 최근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빈 집’에서 여주인공 선화(이승연)가 하는 말은 ‘사랑해’와 ‘밥 먹었어’ 단 두 마디입니다. 김 감독의 영화에 대화가 극히 절제되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김기덕: 저는 말 좀 안했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은 꼭 확인받고 정의내려지길 강요하잖아요. 제가 침묵을 강요하는 건 진실을 알기 위해서예요. 언어로 위장되고 구조화된 약속들이 지켜진 적이 없거든요. 말은 너무 많은 거짓말을 하게 해요.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지만 언어 때문에 다른 감각기관들은 퇴화해요. 그 퇴화된 감각을 진화시키고 싶은 거죠.

김민배: ‘사마리아’나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최근의 ‘빈 집’에서 보듯, 김기덕 표 영화에서 원시적 폭력성이 점차 줄어드는 것 같은데.

김기덕: 그동안 화를 많이 냈으니까 이제 그만 내야죠. 또 화를 내기 위해 화를 쌓아야죠. 숨쉬기 같은 거예요. 몇년 째 계속 내쉬기만 했으니까 이제 들이쉬기도 해야죠. 다음엔 더 끔찍하고 잔인해질 수 있어요.

김민배: ‘내가 다 지원할 테니 많은 이가 공감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보라’고 누군가 제안한다면 해보겠습니까.

김기덕: 사실 편하게 볼 수 있는 영화, 돈 벌어줄 영화 저도 만들 줄 알아요. 그렇지만 내 영화를 통해 국내외적 특정한 관심의 시장이 만들어졌다면 이제 더 외면당한 얘기들을 해야죠. 누군가 ‘돈 다 대줄 테니 많은 이가 공감할 수 있는 영화 만들라’는 식으로 나오면 난 거절합니다. 그런 제의가 지금도 있고요. 그건 돈장난이에요.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 베이스를 확장하려는 권력의 표현이죠. 익명으로 그런 제의를 한다면 허락하겠지만 그런 사람은 한국에 없을 거 같은데요.

“일부 페미니스트·평론가 비판 신경 안써”

김민배: 여성비하적 표현뿐 아니라 현실성 없고 폭력적인 영화 전개로 페미니스트 진영과 영화평론가들로부터 비판을 많이 받아왔습니다. 그 때마다 무슨 생각을 했습니까.

김기덕: 영화평들이 나왔을 때 ‘내가 아무리 순수해도 저렇게들 비트는구나’ 싶었어요. 내 자신을 더 보여줘도 장점을 보기보다 더 비틀어버리더군요. 한 3~4편 나올 때 되니까 그때는 ‘그들의 수준이 저 정도밖에 안되는구나’ 싶어 익숙해졌어요. 이제 그들 스스로의 싸움이라고 생각해요. 그들은 내 영화를 보고 스스로의 인격, 사상과 싸우는 거지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김민배: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 두 편이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신화를 기록했습니다. 한국 영화의 양적 성장을 어떻게 보나요.

김기덕: 거기엔 독재가 있어요. 자본주의·시장원리의 이름으로 독재를 한 마케팅이죠. 9시 뉴스에 그 두 영화들이 헤드라인 뉴스를 장식할 정도였죠. 다른 영화들도 그렇게 마케팅을 하면 1000만 관객은 올 걸요. 그건 공정한 게임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화씨 911’ 영화 한 편이 이데올로기의 구조를 바꿀 수 있어요. 6·25전쟁이나 그 시대를 겪지 못한 사람들에게 영화 한 편이 생각 자체를 바꿀 수도 있는 거고, 그 영화를 보는 머릿수가 많을수록 그건 더 이상 오락이 아닌 정치가 되는 겁니다.

나 같은 사람은 강제규, 강우석 감독이 쓴 돈을 써보질 못했어요. 11편 만드는 데 50억원이 들었죠. 관객동원에 대해서는 모르겠지만 의식세계의 변화에 있어서는 내 영화가 그들에 뒤지지 않는다고 봐요. 내 영화가 돈 적게 쓰고 만드는 영화지만 결코 작은 영화가 아닙니다.

◆1960년 12월 20일 경북 봉화 출신 / 학력 삼애실업전수학교(중학과정 미인가 농업학교) / 1990~1993년 프랑스 파리 거주 / 1995년 시나리오 ‘무단횡단’으로 영화계 입문 / 1996년 독립영화 ‘악어’로 감독 데뷔 / 수상경력 1995년 시나리오공모 대상(무단횡단) 2001년 모스크바영화제 심사위원특별상(섬), 2003년 청룡영화제 작품상(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라스팔마스국제영화제 골든 레이디 하리마구아다상, 촬영상(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 2004년 베를린 국제영화제 감독상(사마리아), 베니스 국제영화제 감독상(빈 집), 대종상 작품상(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러시아 태평양 자오선 국제영화제 최우수작품상(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 작품 ‘악어’ ‘야생동물 보호구역’ ‘파란대문’ ‘섬’ ‘실제상황’ ‘수취인불명’ ‘나쁜남자’ ‘해안선’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사마리아’ ‘빈 집’

* 이 기사는 주간조선의 허락을 얻어 게재한 것입니다

정리=김남인 주간조선 기자(artemis@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