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이론가인 박형준(朴亨埈·사진) 의원은 월간 '인물과 사상' 12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나는 80년대에 분명 좌파였다. 굳이 분류하자면 온건 PD(민중민주)였다"며 "5공 때 엄청난 탄압 속에 젊은 지식인들은 쉽게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모택동주의에 빠져들었고, 나 또한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해갔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애초부터 나는 교조주의적 태도와는 거리를 두었고, 88년 유럽에 체류하며 동유럽체제 문제점을 보면서 마르크스주의는 더 이상 희망의 원리가 될 수 없음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박 의원은 "80년대 초 혁명을 꿈꾸는 이들에게 극단의 선택으로 주체사상이 등장했다"면서 "주사파는 순식간에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헤게모니를 장악해갔고, 이때부터 민주화운동은 그 성격이 바뀌었고, 나는 참으로 당혹스러웠다"고 말했다.

박 의원은 또 "노무현 정권의 국정 실패는 무엇보다 운동의 논리와 국정의 논리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데서 비롯한 것"이라며 "운동의 논리가 사회문제들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면 국가의 논리는 사회체계들을 조정·관리하는 데 주안점이 있다. 국가경영을 사회운동하듯 하면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박형준 의원이 기고한 글 전문


경세의 정치를 희망하며

국회의원 박 형 준

인터넷 논란을 보며

지난 11월 2일 지인들로부터 전화가 쏟아졌다. 인터넷이 온통 난리인데 괜챦냐는 것이었다. 이른바 ‘박 형준 발언’을 두고 인터넷에서 벌집 쑤신 듯 공격이 이루어지고 또 일부는 방어하느라 논란이 크게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날 오전 ‘이해찬 망언 규탄 대회’에서 연사로 나섰던 나는 ‘조선 동아가 역사의 반역’이라는 이총리의 발언을 반박하는 과정에서 “조중동이 권력에 굴종한 면도 많지만 방송도 완벽히 통제되고 한겨레 신문도 없었던 그 시절에 조중동마저 없었다면 민주화 운동이 상당한 애로를 겪었을 것”이라는 발언을 했다. 이 발언에 대해 일부 인터넷 신문이 거두 절미하고 ‘조선 동아가 민주화 운동에 기여’라고 제목을 뽑음으로써 친노 네티즌들로부터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개혁적인 줄 알았더니 수구 꼴통의 전형이었다느니’, ‘괜찮! 은 사람도 한나라당만 들어가면 뇌의 구조가 바뀐다느니’ 하는 비판이 쏟아졌다. 내 홈페이지는 전사들의 글로 도배되었다.

이 과정을 보면서 국회의원이란 직업이 무섭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내 발언 한 마디의 파장이 이렇게 클 수 있다는 데 대해 그 달라진 영향력도 실감했지만 섬뜩한 느낌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씁쓸함으로 와 닿은 것은 우리 정치커뮤니케이션의 극단성이었다. 인터넷은 그 전형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적군’과 ‘아군’, '내 편‘과 ’네 편‘ 밖에 없었다. 사실에 대한 확인, 합리적인 판단과 균형 감각을 갖춘 논리적 비판은 눈을 씻어도 찾기 어려웠고, 서로에 대한 원색적 비난과 욕설을 통해 ’배설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날선 언어들만이 난무했다. 패러디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 목표가 되려는 경향이 있었다.

사실 85년 2.12 총선 이후 87년 6월 항쟁까지 민주화 운동에 직접 참여했던 사람으로서 민주화 투쟁이 대중투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당시 신문이 여론을 형성하는 데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판단에는 변함이 없다. 이번 사건이 일어난 후 다시 그때의 신문을 찬찬히 뒤적여 보았다. 동아일보나 중앙일보가 그 당시 5공 권력이 시퍼렇게 살아 있음에도 민주화 흐름을 확산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는 것은 지면 곳곳에서 나타났다. 조선일보의 경우에도 그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민주화를 시대의 대세이자 ‘긍정적 흐름’으로 인정하는 내용은 어렵지 않게 발견되었다. 5공 권력과 언론기본법의 통제 하에 노골적인 민주화 ‘고무 찬양’이 힘들었던 당시에 그래도 이들 신문사 내부에 역사의식을 가진 기자들이 있었다는 것, 또한 그들의 자발적인 노력에 대해서! 는 가감 없이 평가해주어야 한다. 신문사 전체를 통틀어 ‘역사의 반역’ 운운하는 것은 특히 국민통합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총리의 입장에서는 매우 부적절한 것이고, 균형감각을 잃어버린 오도된 역사인식이라는 나의 비판을 접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역사에 대해 균형 감각을 갖는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역사의 한 세력 또는 흐름에만 서 있었던 사람들에게 그런 균형 잡힌 인식을 기대한다는 것은 적어도 우리나라와 같이 치열한 정치적 대결의 연속 국면을 겪어 온 나라에서는 더욱 기대하기 힘든 일일지 모른다. 자칫하면 회색 분자로 몰리거나 양쪽에서 배신자로 찍히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굳이 내 지적 사유와 정치적 행동을 정당화하자면 한국 현대사의 두 가지 큰 흐름, 즉 산업화와 민주화의 두 흐름을 통합하는 쪽으로 좌표를 계속 이동해왔다고 할 수 있다.

80년대의 문화 충격

80년대에 나는 분명 좌파였다. 순진한 문학청년이었던 대학생을 급진화한 것은 1980년 서울의 봄이었다. 고대문화 편집장을 맡고 있었던 당시, 나는 민주화의 ‘숭고함’을 체험으로 느낄 수 있었다. 교내에 좍 깔렸던 이른바 ‘짭새’들이 철수하고, 복학생들이 돌아오고 지하 써클 회원들이 운동의 전면에 나서면서 대학은 순식간에 정치의 광장으로 변하였다. 직선으로 치룬 총학생회 선거는 그야말로 커다란 축제였는데 운동권이 지지했던 신계륜(현 열린우리당 의원) 후보는 요새 말로 정말 ‘짱’이었다. 많은 학생들이 그에게 매료되었고 집회와 시위에 참여하는 숫자도 날이 갈수록 불어났다. 나도 어느덧 교내 집회에서 투쟁을 선동하고 있었고, 며칠의 철야 농성 끝에 제일 먼저 고대가 교문을 나와 시청 앞으로 돌진하던 날 나는 시위대의 맨 앞 열에 섰다. 그 시위대를 지휘한 사람이 복학생 대표였던 박계동 선배(현 한나라당 의원)였다. 성북서를 돌아 시청 앞까지 나간 시위대는 순진하게 평화 시위를 외치고 있었고, 손에 페퍼 포그 차 유리창에 던진다고 페인트 병을 들고 있을 뿐이었다. 시청 앞에서 연좌하는 순간 돌연 사방에서 최루탄이 날고, 전경들이 정면에서 돌진해 오는 것이 아닌가. 순간 피한다고 피한 곳이 프라자 호텔 옆 쪽이었고, 그때 프라자 호텔 벽을 때린 최루탄이 내 눈속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눈에 불이 난 것 같은 느낌을 받는 순간 쓰러졌고, 동료들이 지하로 굴려 내려 근근히 지하철에 실려 경희대 병원으로 가 응급치료를 받았다. 하지만 눈의 상처가 너무 커 실명의 위기까지 갔고 몇 달을 고생해서야 회복이 되었는데, 그 후 시력은 오른 쪽 눈으로 책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나빠지고 말았다. 그런 가운데 5.17 쿠테타와 광주항쟁을 거쳐 ‘역사의 사생아’인 5공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80년 서울의 봄과 광주항쟁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5공은 그 자체 증오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5공을 묵인하거나 후원한 미국에 대해서도 비판적 지식인들의 감정은 지극히 나빠졌다. 엄청난 탄압 속에 젊은 지식인들은 쉽게 맑스주의, 레닌주의, 모택동주의로 빠져들었다. 나 또한 그 전과는 다르게 맑스주의에 심취해갔다. 다만 나의 경우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대학원에 진학하고, 베버 연구로는 최고였던 고 이순구 교수의 지도 아래 베버에도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교조주의적 태도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거리를 두었다.

정치적 공간이 완전히 닫혀 있을 때 사람들은 혁명을 꿈꾼다. 그리고 그 혁명의 사상적 무기로서 가장 전투적인 이론에 탐닉한다. 80년대 초의 상황이 그랬다. 혁명을 꿈꾸는 이들에게 그 이전의 역사는 부정해야 할 그 무엇일 뿐이다. 대한민국의 역사에 대한 일괄 부정은 당시 운동권의 자연적인 의식이었다.

그 극단의 선택으로 운동권에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이른바 주체 사상이 등장한 것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운동권 내부에서 맑스주의 레닌주의는 수용하면서도 북한에 대해서는 ‘이상한 사회주의 체제’로 비판적 거리를 두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면, 이른바 주사파는 순식간에 북한을 ‘이상적 사회주의’이자 김일성을 따르는 것이 운동의 역사적 정통성을 따르는 것이요, 운동가의 기본 품성이라고 선언해버렸다. 이른바 ‘강철 서신’이 운동권에 미친 영향은 참으로 심대했다. 지금은 그 서신을 쓴 장본인이 반북한 운동에 가장 앞장서고 있지만(그러고 보니 주체사상을 만들어낸 황장엽과 대한민국에 주사파를 탄생시킨 김영환이 모두 반북한으로 돌아선 것은 흥미롭다), 주사파는 순식간에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의 헤게모니를 장악해갔다. 이때부터 민주화 운동은 그 성격이 바뀌었다. 주사파와 이른바 ‘NL'이 등장하고 확산되던 그때 나는 참으로 당혹스러웠다. 맑스를 열심히 읽었던 나로서는 주체사상을 도저히 맑스주의라고 생각키도 어려웠을 뿐 아니라 현실의 북한 전체주의를 인정한다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당시 많은 동료들과 토론을 하기도 했지만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은 분명했다.

새로운 사고와 탈계급주의

굳이 분류하자면 온건 PD였던 나는 이른바 교조적 레닌주의자에 대해서도 동의할 수 없었지만 주사파에 대해서는 지성적 토론을 봉쇄한 교조적 종교가 되고 있음을 보면서 ‘위험하다’는 인상을 굳혔다. 그런 가운데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가 전개되었고, 그를 계기로 현실의 사회주의 체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역사적 실험이었던 동구권 사회주의체제가 총체적 실패였음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것은 사람의 머릿 속에서 구상된 유토피아를 인위적 강제적으로 실현하고자 했을 때 현실에서는 필연적으로 기괴한 전체주의 체제가 만들어질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직접민주주의의 이상은 계급독재 당독재 1인독재로 귀결되었고, 시장없는 합리적 계획경제는 효율과 창의가 빠진 비합리적 자원배분 체계를 낳았을 뿐이었다. 마침 1988년에 유럽에 체류할 기회가 생겨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동유럽 체제의 문제점은 서구 사회와 비교되면서 더욱 두드러졌다. 그때 나는 ‘맑스주의는 더 이상 희망의 원리가 될 수 없음’을 확인했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나는 노골적으로 맑시즘을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했고, 다원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 그리고 시민사회 이론을 결합한 이론을 모색했다. 운동권과 진보 학계에서 ‘개량주의’와 ‘변절자’라는 비난이 들려왔지만, 경실련 운동 등 새로운 시민운동의 부상을 중시하면서 계급주의와 노동중심주의를 비판했다. 그리고 정보화와 세계화의 새로운 문명사적 물결이 경제구조와 사회구조, 그리고 문화 양식의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고 있음에 주목했다. 그런 문제의식 하에 쓴 박사학위 논문이 ‘자동화에 의한 노동과정의 변화’였다. 정보기술혁명이 생산과정과 노동과정에 일대 변혁을 가져오고 있고, 이것이 궁극적으로 계급계층구조의 변화로 연결되고 있다는 것을 논증하는 논문이었다. 특히 여기서 제시된 지식노동자론과 노동시장! 의 새로운 양극화 이론은 오늘의 시점에 오히려 더 잘 들어 맞는 것으로 보인다.

91년 박사학위를 받자 마자 동아대로 내려가 교수 생활을 시작하면서 서울에서의 모든 활동을 접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부산으로 내려가기 전 한국사회연구소, 월간 말, 백산서당 등은 새로운 사고와 낡은 사고가 충돌하는 공간이었다. 기존의 인식틀 내에서 점진적 변화를 추구하는 다수와 인식틀 자체를 전환할 것을 요구하는 소수 사이에 활발한 논쟁은 내게는 세계의 변화에 대한 이론적 감수성을 개발하는 데 더없이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특히 인식론 상의 본질환원주의와 비현실적 이상주의와 전체주의가 얼마나 위험한가, 바꾸어 말하면 인간 인식의 한계와 실천의 한계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전체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우위는 바로 그것을 기점으로 하는 것이다. 라클라우, 보들리야르, 가타리와 들뢰즈 등 급진적 다원성에 초점을 둔 포스트 모더니즘 계열 이론들은 이런 입장을 강화시켜줌과 동시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에 내재하는 모순들과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데 제격이었기 때문에 교수 생활 초기에 나는 주로 이런 이론가들을 연구하는 데 심취해 있었다.

국가의 논리와 경세의 정치

또 한번의 지적 변화의 계기는 정치적으로 찾아왔다. YS 정권 출범에 대해서는 긍정적이지 않았지만 YS 초기의 금융실명제와 하나회 청산 등 개혁 드라이브는 이 정권을 통해 개혁 추진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다. 마침 평소 가깝게 지내고 존경하던 분들이 YS 정권에 속속 참여하였고, 내게도 여러 제의를 해왔다. 다른 직책은 사양하고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으로 위촉되어 여러 개혁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특히 ‘세계화’는 박세일 이각범 수석의 주도 아래 대한민국의 국가경영 패러다임을 질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추진한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YS 정부의 여러 개혁 시도들은 의미있는 성공을 거둔 것도 있지만 지지부진하거나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로 귀결된 실패 사례도 적지 않았다. 금융개혁, 군부 개혁, 과거 청산, 세계화 등에는 상당한 성과가 있었지만, 교육개혁 사법개혁 복지개혁 노동개혁 등은 기대했던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외환위기의 가능성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YS 정부 전체의 개혁적 노력이 거의 무시되는 경향이 있지만, YS 정부 5년의 지속적인 문제의식은 ‘변화와 개혁’에 있었다.

이 개혁 프로젝트를 참여하면서 나는 두 가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하나는 ‘시민사회’나 사회운동의 논리와 섞일 수 없는 고유한 국가의 논리 및 정치의 논리가 존재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혁 정책은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국가의 논리’는 한마디로 ‘경세(經世)’를 의미한다. 운동의 논리가 사회체계들의 문제들을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면, 경세의 논리는 사회체계들을 조정하고 관리하는 데 주안점이 두어진다. 사회운동이 ‘부정의 담론’에 기초한다면, 경세는 ‘긍정의 담론’에 기초한다. 모든 이들에게 ‘희망의 원리’를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사회운동은 적과 동지를 분명히 하고 공격 대상을 분명히 해야 지지 세력을 결집할 수 있지만, 국정은 가능하면 모든 이들을 아우르고 중립적인 표상을 지녀야 한다. 편향적 인식이 국가 경영에 가장 큰 독이라면, 균형감각은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노무현 정권의 국정 실패는 무엇보다 ‘국가의 논리’의 특수성을 깊이 이해하지 않고, 운동의 논리와 국정의 논리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데서 비롯된다. 국가 경영을 사회운동 하듯이 하면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성공적인 국가경영능력은 자신의 지지기반에서 정치적 요구에서 얼마나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편 개혁 정책의 성공 조건은 무엇인가? 첫째, 개혁안이 정교해야 한다. 둘째, 폭넓은 국민적 합의를 얻어야 한다. 셋째, 야당과 이해당사자들을 설득하는 것을 포함해 성공적인 정치 과정이 있어야 한다. 넷째, 개혁을 실행할 때 범위를 좁게 설정하여 빠른 시간 안에 대중들에게 성공을 확인시켜주어야 한다. 이런 네 가지 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개혁 정책은 대체로 실패하였다. 현재 노무현 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이른바 ‘4대 개혁 입법’은 이 네 가지 조건 가운데 어느 것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개혁안은 허점 투성이이고, 국민적 동의도 얻지 못했다. 야당과 이해당사자들을 진지하게 설득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려는 태세만 보일 뿐이다. 이래서는 ‘양의 머리를 그리려다 개의 머리를 그리는’ 우를 범할 수밖에 없다. 과거 정권의 역사를 면밀히 고찰한다면 이런 역사의 실수가 반복되지 않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역사는 사람들을 벌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로부터 배우지 않은 사람들을 벌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비전과 정책을 운반하는 정치를 위하여

YS 정부가 외환위기의 멍에를 쓴 채 끝나고 DJ 정부가 들어선 후 나는 일체 정치 활동에 관여하지 않았다. 지역에서 문화도시 운동 등 새로운 시민운동을 제안하고 주도하면서, 국가와 시민사회에 대한 연구와 집필에만 매달렸다. 아쉬웠던 것은 수십년 간의 소외 끝에 정권을 잡은 DJ 정부야말로 만델라처럼 국민통합에 나서주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YS 정부를 나라 망친 정부, DJ 정부를 나라 살린 정부”로 과시하는 대신, YS 정부에 대해서도 평가를 해주고 민주대연합과 동서 화합을 통해 국정을 함께 이끌어가자는 포용론을 전개했으면 DJ 정부는 정말로 국민통합의 새 시대를 연 정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기대는 충족되지 못했다. 그리고 DJ 정권도 YS 정권이 저질렀던 실수를 반복했고, 많은 개혁 정책도 표류하고 말았다.
2002년 대선이 한편의 드라마와 같은 역전극을 연출하면서 끝난 후, 노무현 정권의 등장과 초기 국정 운영을 보면서 나는 정치 참여를 본격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정치에 큰 변화의 물결이 밀려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예감했고, 이 시점이 정치에 참여한다면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다. ‘경세의 정치’가 자리를 잡지 않고서는 나라의 미래도 매우 불투명할 것이라는 생각도 내 자신에게는 중요한 명분이었다.

주변의 만류, 왜 하필이면 한나라당이냐는 비판부터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국회의원이 되었고, 이미 국회를 6개월 경험하게 되었다. 정말 개인적으로는 바쁜 기간이었지만 ‘생산적인 일’에 매진하기에는 아직 많은 벽을 절감하게 된다. 특히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 내에 ‘오도된 자기 확신’과 상대에 대한 벌거벗은 ‘적개심’으로 무장한 세력이 강력하게 둥지를 틀고 있는 한 ‘투쟁의 정치’를 ‘대화와 소통의 정치’가 대신하기는 참으로 어렵게 보인다. 국회가 생산적이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은 ‘상대를 인정하는’ 온건 합리 세력이 여야 내에서 중심적인 세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희생자’ 또는 ‘순교자’의 자리에 역사적으로 위치지우고 상대를 가해자로 생각하며 국정을 사회운동하듯이 거칠게 몰아붙이는 한, 야당 내에서도 정권을 불순세력으로 간주하고 ‘투쟁! 투쟁!’을 내거는 강경파의 목소리도 커질 수밖에 없다. 이런 정치 환경에서 관용성과 상생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오로지 도드라지는 것은 막말과 거친 입일 뿐이다. 정치의 반지성주의를 걱정하는 목소리도 이래서 나오는 것이다.

온건과 합리가 기회주의로 매도되는 한 ‘경세의 정치’, ‘비전과 정책을 운반하는 정치’의 미래는 없다는 것을 절감한다. 결국 이런 정치의 변화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산적이고 건강한 정책대안으로 맞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역시 절감하는 요즘이다. 이 대화와 소통의 정치를 강화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미래와 당의 미래에 대한 실질적인 비전과 정책을 둘러싸고 이루어져야 할 그 무엇이다. 이를 거치지 않고서는 한나라당이 수권정당으로 거듭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열린우리당 내에서도 이런 당 정체성에 기반한 생산적인 소통의 정치가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그것은 합리적 중도 보수와 합리적 중도 진보가 한국 정치의 안정적인 양대축으로 자리잡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의례일 것이다.

(*이 글은 박형준 의원이 월간 ‘인물과 사상’ 12월호에 기고한 글로 박 의원의 허락을 얻어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