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세광 첫 재판 1974년 10월 7일 삼엄한 경비 속에, 저격범 문세광이 첫 재판이 열린 서울형사지법 대법정에 들어서고 있다. 자해를 막기 위해 안경을 벗겼고 가죽 수갑을 채웠다. 조선일보 DB

문세광 사건에 대한 한·일 양국의 수사 결과가 많은 부분에서 달랐다는 사실이 20일 공개된 외교문서를 통해 확인됐다. 한국측은 문세광이 북한의 지령을 받은 조총련의 지시로 범행했다고 밝힌 반면 일본측은 연계에 대한 확증이 없다며 결론을 유보했다. 이 때문에 양국의 갈등이 극한국면까지 갔다.

우선 문세광의 배후. 한국측 수사본부는 문세광이 조총련에 포섭돼 반한(反韓) 활동을 해오다 1974년 5월 북한 공작선 만경봉호에서 "광복절 기념식 때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라"는 지령을 받았다고 발표했다. 일본은 문세광의 '과실살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주일본 한국대사관은 한국 수사당국이 짜맞추기 수사를 하고 있다며 일본이 불만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외무부에 보고했다.

한국측이 공범으로 발표한 조총련 오사카 이쿠노니시 지부 김호룡씨의 역할에 대해서도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해 한국 정부를 전복하고 공산혁명을 이루자고 문세광을 설득했다(한국측)▲뚜렷한 증거가 없다(일본측)로 달랐다. 일본측은 김호용과 문세광이 가끔 만나기는 했으나, 한국 정세·김일성 주체사상 등에 대해 주로 대화했다고 밝혔다.

1974년 1월 김호룡이 문세광에게 주었다는 선물의 의미도 차이를 보였다. "'혁명을 위해 가일층 노력'이란 한덕수 조총련 의장의 말과 함께 정초 선물로 줬다"(한국), "선물이 이례적이긴 하지만 그 이상은 알 수 없다"(일본)고 되어 있다.

문세광의 자금 50만엔의 출처 역시 한국은 김호용, 일본은 문세광의 어머니로 달랐고, 문세광이 1974년 2월 조총련과 관련 있는 아카후도(赤不動)병원에 위장 입원해 공산주의 교육과 저격요령 훈련을 받았다는 부분에 대해서도 양국 조사 결과는 상반됐다.

당시 김동조 외무장관은 외교문서에서 일본의 소극적 수사에 자주 불만을 표시했다. 일본의 수사 결과가 어떻게 됐냐며 문의하는 것도 많이 발견된다. 김영선 주일대사는 일본이 저격사건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조총련에 대한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고 있다며 수사 진행 도중에 '서로 다른 결과'를 예고하는 내용을 외무부에 보고했다. 문서는 당시 일본의 집권당인 자민당이 조총련을 지지하고 있던 제1야당 사회당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있고, 일본 기업들의 대북 채권이 많은 것 등 일본의 소극적 태도에 대한 원인분석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