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말 노무현 대통령의 육군3사관학교 졸업식 연설 이후 동북아 균형자 역할론에 대한 논쟁이 확산되고 있다. 대체로 비판적 시각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일부 논객들은 이를 '시대 착오적 대응', '과대 망상적 발상', '외교적 고립을 자초할 수 있는 순진한 발상' 등으로 폄하하고 있다.
이 비판과 기우는 모두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라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비판에 앞서 노 대통령의 구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서 한국의 균형자 역할이란 19세기 세력 균형을 통해 유럽의 패권을 추구했던 전통적 의미의 영국적 균형자론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과대망상 아니다 - 오랜 지역 반목·갈등을 우리가 평화로 이끌어
한국은 당시의 영국과 같이 동북아의 세력 균형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국력도 없을 뿐 아니라 균형자 역할을 통해 역내 세력 균형을 주도하거나 우위를 점하려는 의도도 없다. 한국이 동북아의 평화와 공동 번영을 위해 추구하는 대외정책은 영국식 세력 균형정책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주변국과의 신뢰 구축을 통해 역내에 다자간 안보 협력 질서를 모색하는 정책이다.
노 대통령은 19세기 말 이래 동북아 지역에서 세력 균형이라는 미명하에 반복되어온 대립과 반목의 역사를 극복하고 평화와 번영의 동북아를 만드는 데 있어 우리가 선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열린 외교를 통해 이 지역의 고질적 갈등과 불협화음을 조율하고 협력과 통합의 새 질서를 만들어 보겠다는 것이 바로 균형자론의 요체이다.
북(北)·중(中) 편들기 아니다 - 굳건한 韓美동맹 바탕 多者안보체제가 목표
이는 '힘의 균형'이 아니라 상호 대립하는 국가들 간의 '인식과 가치의 균형과 조정'을 통해 역내 평화를 모색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강대국, 특히 중·일간 패권 경합의 오랜 역사를 지닌 동북아를 상생과 공생의 질서로 전환해 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다.
균형자론은 결코 시대 착오적인 대응이 아니라 역사와 현실에 대한 냉철한 인식에 기초한 국가전략이다. 19세기 말에 우리는 왜 변방의 낙오자이자 역사의 방관자로 전락하여 국권을 상실하고 말았는가. 그것은 당시 우리에게 주변 정세를 냉철하게 파악하고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균세(均勢)의 성찰과 자강(自彊)의 능력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참여정부는 이러한 역사 인식에 기초하여 균세를 위한 균형적 실용 외교와 자강을 위한 협력적 자주 국방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균형자론은 또한 과대 망상적 발상이 아니다. 한국이 19세기 영국과 같은 패권적 균형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나, 그렇다고 구한말과 같이 미미한 약소국가도 결코 아니다. 무엇보다도 한국은 동북아 평화의 균형자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연성국력(soft power)을 보유하고 있다. 역사상 한번도 주변국을 침략하지 않은 평화 애호국으로서, 그리고 동북아의 지정학적 중심을 점하고 있는 가교국가로서 우리는 동북아의 어느 다른 나라보다 사심 없고 공정하게 화해와 협력을 위한 사업들을 제안하고 주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美가 對中 강경책 펴면 - 한·미동맹 모순 불가피 이걸 막자는게 균형자론
동북아 균형자론은 한·미동맹과 모순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보완관계에 있다. 굳건한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동북아의 항구적 평화를 위한 안보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참여정부의 정책 목표이다. 다시 말해서 한·미동맹을 보다 포괄적인 동맹으로 발전시키면서 이를 기반으로 동북아에도 유럽과 같은 집단방위체제와 다자안보체제를 동시에 구축하자는 것이다.
유럽에 있어서 CSCE(유럽안보협력회의)를 통한 안보 공동체의 실현은 안보의 최전선을 지키는 NATO가 건재했기에 비로소 가능했다 하겠다. NATO 역시 CSCE체제의 확립으로 약화되기는커녕 오히려 보다 안정되고 항구적인 동맹체제로 강화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동북아 안보 공동체를 형성해 나감에 있어서 굳건한 한·미동맹을 비롯한 미국의 평화 보장 역할은 중요한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나아가 미국이 이에 적극 동참하고 지도력을 행사한다면 한·미동맹의 미래와 이 지역의 평화 및 상호 신뢰를 위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패배주의 극복해야 - 韓·中·日등 3國정상과 多者회담 추진할 것
그러나 문제는 미국이 다른 전략적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만일 미국이 중국 위협론에 기초한 대중국 포위정책을 전개하거나 대북한 봉쇄와 체제 전환을 강행하게 된다면, 그리고 그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일본의 군사대국화를 고무하게 된다면 동북아 질서는 심각한 균열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이 이처럼 대립과 편가름의 지역 질서를 추구해 나가는 일이 발생할 경우, 균형자론과 한·미동맹은 심각한 모순관계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동북아 균형자론은 혹자들의 비판과 같이 이러한 상황에 대비하여 한·미동맹을 깨고 한·미·일 삼각 공조에서 탈피하여 북한, 중국편을 드는 정책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 같은 사태 발전을 사전에 방지하고 동북아에 협력과 통합의 새 질서를 구축하자는 예방외교의 개념이다.
참여정부가 동북아시대 구상의 일환으로 추진하고 있는 동북아의 다자간 정상회담이나 다자안보협력 등은 모두 이러한 취지에 따른 것이다. 이와 더불어 제주를 '세계 평화의 섬'으로 선포하고 동북아의 평화 거점으로 자리매김하려는 최근의 움직임도 이 같은 정책적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을 전개함에 있어 굳건한 한·미동맹은 중요한 전제조건이다. 왜냐 하면 동북아의 협력 안보는 굳건한 한·미동맹을 전제로 할 때 보다 실현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와 같은 유동적 정세하에서 국가 안보를 지켜 나감에 있어서 우리는 과거의 패배주의 관성과 세력 균형 결정론의 함정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강의 능력을 갖추고 균세의 외교적 성찰로 반목과 대립의 지역 질서를 협력과 통합의 지역 질서로 전환시켜야만 동북아의 평화와 공동 번영이 보장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 있어서는 여·야, 보·혁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문정인 위원장은…노무현 당선자 시절 외교안보 분야 자문교수(연세대)였다. 작년 6월 취임했다. 동북아위는 대통령 자문기구다. 현 정부의 외교안보정책 기조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문 위원장은 지금도 노 대통령과 자주 공식·비공식 협의를 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국가정보원장, 외교부장관, 청와대 국가안보보좌관 인선 때마다 이름이 오르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