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라열

공사장 인부, 배추 장수, 백댄서, 프로농구 치어리더 매니저, 합기도 사범, 무에타이 선수, 인디밴드 가수….

심상치 않은 경력으로 화제를 모았던 서울대 종교학과 00학번 황라열(29·사진)씨가 49대 서울대 총학생회장에 선출됐다. 동기생들이 '형'이라고 부르는 황씨는 30대를 눈앞에 둔 늦깎이 학생이다.

황씨는 최근 실시된 총학생회 재선거에서 45.75%의 표를 얻어 12일 총학생회장에 당선됐다. 황씨는 지난해 11월 총학생회 선거에서 1위를 했으나 2위와 표 차이가 적어 결선투표에 돌입했으며 투표율 미달로 이번에 재선거를 치렀다.

황씨는 '대원외고→한동대→고려대 의대→해병대→서울대'로 진학과 군 입대, 진학을 반복하는 등 돈키호테 같은 20대를 보냈다. 고교 시절 댄스가수가 되겠다며 당시 인기그룹 듀스와 노이즈의 백댄서로 활동했다. 성적은 곤두박질쳐 고 3 졸업 때 반에서 꼴찌에서 두 번째가 됐고 서울대에 낙방했다. 한동대 산업디자인학과에 입학했지만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1년 만에 대학생활을 접었다. 의대 진학 붐을 타고 재수에 돌입했다. 1998년 고려대 의대에 입학했다. 하지만 시련이 닥쳤다. 어머니가 위암 판정을 받은 것. 그는 경제 사정 때문에 고대 안암 캠퍼스를 밟은 지 며칠 뒤에 군 입대를 결심했다. "빨리 군대에 가야겠다는 생각밖엔 없었어요. 해병대에 자원하면 금방 간다는 얘기를 듣고 해병대에 갔죠."

군 입대 이듬해인 1999년 어머니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한 아버지(황원하·61)처럼 인문학을 하기로 결심했다. 목사인 아버지의 충고를 따라 1999년 말 서울대 종교학과에 원서를 넣었다. 백령도 해병대에서 상병 시절부터 준비한 수능은 결실을 보았고 황씨는 전역(2000년 5월)도 하기 전에 서울대 종교학과 00학번으로 합격했다. 1학기는 당연히 휴학. 수업은 2학기부터 들었다.

황씨는 '잡식성'이다. "하고 싶은 것은 다 해야 하고 망설임이 없는 성미"라고 했다. 서울대 1학년 때인 2000년 말, 대구에서 배추장사를 하던 해병대 후배가 일손이 부족하다고 연락을 했다. "재미있겠다" 싶어 석 달 동안 해봤다. 태국 무술 무에타이는 2004년에 지하철 서울대입구역 근처에 있는 학원을 보고 '운동 좀 해 볼까" 하는 생각에 찾아갔다. 중·고교 시절 합기도(3단)를 했던 황씨는 이듬해 결국 무에타이 선수 자격증을 따냈다.

목사 아버지의 3代독자
"부업(副業)도 많이 해봤어요. 나이트클럽 DJ, 군고구마 장수, 동대문 시장 지게꾼… 닥치는 대로 했습니다." 손가락으로 꼽은 이력만 50여 개. 목사 아버지를 둔 3대 독자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자유분방하게 살아왔다.

서울대에 들어와서는 2002년에 '놀(NOL)'이란 이름으로 인디 음반을 내며 가수로 활동했다. '끼'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분출했다. '놀'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래즈(noblesse oblige lads·고귀한 신분에 따른 윤리적 의무를 다하는 학생들이란 뜻)의 약자다. 지난해엔 온라인 게임회사인 ㈜유마인드를 세우고 사장이 되었다. 공부하면서 회사를 경영하는 'CEO 대학생'이다. "정신 없이 바쁘다"고 말할 정신도 없다.

"나는 反운동권"
황씨는 운동권과 거리가 멀다. 아니, 반(反)운동권이라 불러달라고 했다. 황씨는 선거공약으로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 탈퇴'를 내걸었다. 학생들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단체에 가입돼 있고 그런 단체에 회비를 낼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스스로 풀이하는 당선 이유, "학생복지와 취업난 등 현실적인 고민을 해결하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라고 했다. 황씨에 따르면 운동권인 경쟁 후보는 '서울대 법인화 반대'라는 거창한 슬로건을 내걸었지만 학생들 관심 밖으로 밀려났고 자기에게 표가 몰렸다는 것.

"운동권 후보들 주장이 틀린 건 아니지만 학생들이 원하는 것을 채워주지 못한 것 같아요. 우리는 교통카드 충전기 설치, 정수기 설치 등 학생들에게 필요한 공약을 내걸었죠. 그랬더니 나를 잘 알 수 없는 공대에서도 몰표가 나왔어요." 장학금을 확대하기 위해 기부문화를 활성화하는 데에도 앞장 설 계획이다.

"추락하는 서울대 위상을 높이고 1년 내에 서울대인이란 것을 당당하게 밝힐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황씨는 "두 번의 선거에서 학우들의 무관심을 심각하게 느꼈다"며 "다수의 학생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게 바로 총학생회 역할일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