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세 수입으로 중국 47위의 갑부에 오른 학자가 있다. 이름부터 범상치 않은 이중톈(易中天) 샤먼대 교수다. 작년 국영 CCTV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그의 삼국지 강의는 이 책(원제 ‘品三國’, 국내 번역본은 상권)으로 묶여 나온 뒤 200만 부 넘게 팔려나갔다. 현대적이고 재치있는 말솜씨도 빼놓을 수 없지만, 원사료의 분석을 통해 허구와 사실, 문학과 역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는 것이 커다란 강점이다.
원사료라니? 우리가 알고 있는 ‘삼국지’는 사실 나관중의 소설 ‘삼국연의’였고, 정사(正史)는 진수의 기전체 역사서 ‘삼국지’다. 최근 이 책이 국내에도 출간됐지만 여전히 빠져 있는 것이 있으니, 바로 남북조시대 송나라 때 배송지(裵松之)가 단 ‘삼국지’의 주석이다. 원문보다 더 방대한 분량의 이 주석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 수많은 책들을 인용한 무척 귀중한 자료다. 그런데 이중톈은 바로 이 주석을 풍부하게 활용한다는 점에서 허황해지기 쉬운 다른 해설서와 구별된다.
과연 그의 강의는 ‘삼국지’ 인물들의 심모원려를 장려한 필치로 보여 준다. 분량의 반 이상을 조조에게 집중하면서, 그를 ‘사랑스러운 간웅(奸雄)’으로 평가한다. 조조는 무척 진실하고 대범하면서도 잔인한 일면을 갖춘 인물이었으며, 시세를 정확히 읽고 경제력과 군사력을 동시에 키울 수 있었던 훌륭한 CEO였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유비를 폄하하지는 않는다. 그 또한 인덕을 갖춰 사람들을 심복시킨 영웅임을 강조해 기존 ‘삼국지’에 친숙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소설 때문에 왜곡됐거나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도 짚는다. 동탁과 여포 사이를 갈라놓았다는 미인 ‘초선’이란 인물은 없었다. 적벽대전에서 제갈량의 역할은 외교에 한정됐을 뿐이며, 동남풍을 불렀다는 얘기는 지어낸 것이다. 유비가 제갈량을 세 번 찾아간 것은 사실이지만 ‘삼고초려’의 세부적인 스토리는 모두 허구다. 반면 조조가 유비에게 “천하에 영웅은 나와 당신 둘 뿐”이라고 했다거나 장비가 장판파에서 호통으로 대군을 막았다는얘기는 의외로 ‘역사적 사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저자의 분석은 곳곳에서 빈틈을 드러낸다. 제갈량이 젊어서 휘파람을 잘 불었다는 기록을 가지고 “비분강개한 기운이 충만하고 세상과 인생에 대한 깊은 연민의 감정을 담았다”고 말하는 식의 해석은 전혀 실증적이지 않다. “원소는 늘 부하들의 정확한 의견을 본능적으로 배척했다”고 하지만 역사 기록의 취사선택에서 불공평함을 겪는 것이 패자(敗者)의 운명 아니던가? 손권 앞에서 ‘조조에게 대항해서 패권을 쥐라’고 했던 노숙의 진언을 “제갈량보다 먼저 ‘천하삼분지계’를 말했다”고 해석한 것은 과장이 심하다. 후한 말 당고(黨錮)의 화를 입은 청류파 지식인들의 은거가 조조·유비의 인재 등용의 배경이 된다는 중요한 역사적 흐름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이쯤되면 이 책이 소설의 허구를 걸러낸 뒤에 스스로 새로운 허구를 가미한 ‘배송지주(注) 연의’가 아닌가 의심스러워지게 된다. 좀더 생각해 볼 것은, 우리가 아는 ‘삼국지’는 역사의 세계라기보다는 문학의 세계였다는 점이다. 냉정히 말해 단기천리의 충의(忠義)와 호풍환우의 신책(神策)이라는 유장한 문학적 수사를 모두 걷어낸 뒤에 남는 것은, 고작 한족(漢族)의 통일 제국이 북방민족에 의해 무너지기 직전 50여 년 동안 벌어졌던 역사의 막간극일 뿐이다. 그걸 ‘위대한 군웅들의 천하경륜’으로 지나치게 미화하는 것은 또 다른 중화주의의 오만함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