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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명의 북파공작 부대원들은 사형수와 무기수들이었으며 사면을 조건으로 채용됐다."

HID(북파공작원) 핵심 장교들의 최초 증언을 월간조선이 보도했다.

북파공작 장교 출신 모임 ‘진백회(眞白會)’ 회장 김원한(78·예비역 대령)씨와 ‘특수임무수행자 복지진흥회’ 명예회장 이춘국(78·예비역 대령)씨는 월간조선에서 “공군의 '실미도 부대'처럼 육군도 대북 특수공작부대인 '선갑도(仙甲島)부대'를 1972년 7·4 남북 공동성명 발표 직후까지 운영했다”고 증언했다.

북파공작원들의 훈련 모습. 각본에 의한 것이 아닌, 실전처럼 훈련했다고 한다.

선갑도는 서해에 있는 섬으로 행정구역은 인천시 옹지군 자월면 승봉리다. 현재 무인도이며, 6·25 전쟁 때는 미국 극동군 사령부 주한연락처 8240부대가 주둔하기도 했다. 대북 특수임무공작부대는 1968년 1월 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군 특수부대 124군 부대 소속 무장공비 31명이 청와대를 공격했다 실패한 일이 발생한 후 생기기 시작했다.

“영화로 이름 알린 실미도 부대는 민간인들을 선발했지만 선갑도 부대는 무기수와 사형수 32명을 선발했으며 실미도 부대는 우리와 게임이 안 된다”는 게 이씨의 증언이다. 이씨는 “1972년 남북공동성명 발표 후 부대원들을 사면 조치하고 1인당 150만원을 지급했다”고 말했다. 일부 선갑도 대원 생존자들의 ‘제대로 보상을 못 받았고 사면도 엉터리였다’는 주장에 대해선 “사면하는 데 법조항이 없다고 해서 관계 법률을 전부 뒤져 ‘장관급의 승인이 있으면 사면이 된다’는 예외 조항을 직접 찾아내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선갑도 부대원들은 실제 대북침투작전으로 1969년 백령도로 2회 출정했으나 중앙정보부 승인이 안 떨어져서 돌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중앙정보부 차장이었던 이철희씨가 잘못하다가는 큰 문제가 생길 것 같으니 그만두라고 했다는 것이다.

1960년대 훈련을 받는 북파공작원들의 모습. 체력단련은 북파공작원 교육의 기초였다.

김씨는 “1·21 청와대 습격 보복 차원에서 첩보부대 공작과장을 맡고 있던 1968년 11월 장교 공작원 6명과 공작원 6명으로 팀을 구성해 DMZ의 북한군 GP를 공격, 소련 군사고문단 1명을 포함 23명을 사살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날의 공로로 이들 팀에는 충무무공 훈장 5개 등 훈장이 12개가 수여됐다고 한다. “북한에 대한 직접적인 침투공작은 1980년대까지 이어졌다”고 김씨는 기억했다.

이들은 “6·25 때 모택동(毛澤東)이 밀사를 보내 유엔군이 38선을 돌파할 시 중공군이 개입하겠다는 것을 경고했다” “일본의 ‘오무라 난민수용소’를 대북 침투 우회 루트로 이용했다”는 내용 등을 증언하기도 했다.

※ 자세한 내용은 월간조선 6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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