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때 일본 역사소설 '료마(龍馬)가 간다'(시바 료타로 지음)를 읽고 실망한 기억이 있다. 스펙터클한 사무라이 영웅담을 기대했는데 마지막까지 번듯하게 칼 쓰는 장면 하나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배경이 된 메이지(明治)유신은 보신(戊辰), 세이난(西南)전쟁 등 피가 피를 부른 전쟁의 연속이었다. "전쟁 영웅도 많을 텐데 왜 하필?" 이런 생각으로 책을 덮었다.

메이지유신은 흔히 '무혈(無血)혁명'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정신의 원형이라는 '덴노(天皇)'의 복권(復權) 과정을 피로 채색하고 싶지 않은 일본인들의 심리가 깔려 있을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이 '무혈'로 이뤄진 것은 사실이다. 당시 무력(武力)이 가장 강했던 사쓰마(薩摩)와 죠슈(長州) 두 지역이 동맹을 맺고, 막부가 권력을 왕실에 넘긴 역사 장면이 그렇다. 그 외엔 어린이와 부녀자의 피까지 땅을 흠뻑 적신 것이 메이지유신이다.

'료마가 간다'의 주인공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는 '무혈의 유신'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이런 료마가 '일본인이 존경하는 역사 인물'에서 만년 일등을 차지하는 것은 메이지유신에서 '무혈' 부분이 그만큼 큰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료마의 업적은 바로 사쓰마와 죠슈의 '삿죠(薩長)동맹'과 권력이 왕실로 넘어간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중개한 것이었다. '전쟁 영웅'이 아니라 '거간(居間)'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료마가 흥정한 것은 역사와 정신이었다. 이해가 충돌한 당시 사쓰마와 죠슈는 만나면 칼로 베어버리는 원수였다. 피로 얼룩진 이들에게 료마는 말했다. "천황의 강성 국가를 만드는 것이 공통의 꿈이 아니었냐"고. 막부를 향해선 이렇게 말했다. "지금 체제로 당신들이 꿈꾸는 부국강병이 실현될 수 있겠냐"고. 메이지유신 중심 세력의 '존왕양이(尊王攘夷)' 사상에서 '양이'를 빼고 그 자리에 막부가 남긴 '근대화'를 집어넣은 '황금 결합'이 바로 료마가 일본에 남긴 최대 업적이었다.

생각해 보면 정의와 불의를 떠나 일본엔 막전막후의 '큰 거간'들이 많았다. 전전(戰前) 역사의 배후에서 일본 정계는 물론 한국과 중국의 근대화 혁명까지 거간한 도야마 미쓰루(頭山滿), 전후 한일 정계를 오가며 한·일 신시대를 거간한 '정상(政商)' 세지마 류조(瀨島龍三)도 그런 인물이었다. 나아가 최근 일본 정치의 보수 양당 체제를 '보수 대연합' 체제로 전환하기 위해 일본 여야를 거간한 와타나베 쓰네오(渡邊恒雄) 요미우리신문 회장 역시 넓게 말해 '료마'의 전통을 잇는 '역사의 거간' 중 한 명이라고 볼 수 있다.

료마는 역사 속에서 '무혈 혁명'을 상징하지만 스스로는 자객들의 칼에 의해 피를 뿌리며 죽어갔다. 어느 세력이 그를 암살했는지 아직도 역사적 미궁이다. 막부의 무사들이란 얘기도 있고, 반(反)막부 진영 내부의 불만 세력이란 얘기도 있다. 역사와 정신을 흥정하는 거간은 칼을 들고 싸우는 전쟁 영웅보다 더 많은 적을 만들고 더 많은 위험 속에 노출되는지도 모른다. 료마 스스로 '삿죠동맹'을 거간한 이후 언젠가는 암살 당할 수밖에 없는 '죽은 목숨'으로 살았다는 것이 역사의 기록이다.

요즘 '한국엔 왜 료마가 없는가'를 자주 생각한다. 모두 영웅을 추구할 뿐 '료마'가 되려는 인물이 없다. 요즘만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역사의 분수령에 '큰 거간'이 되고자 목숨을 건 '한국의 료마'가 어디에 있을까. 구한말 이후 한국과 일본이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간 것은 사실 이 차이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