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 팬들은 기억할 것이다. ‘엑소더스’라는 영화를. “이 땅은 나의 땅”으로 시작되는 장엄한 주제가, 나치의 지옥에서 살아남아 새로운 조국 이스라엘로 귀환하려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눈물겨운 투쟁, 폴 뉴먼이 분한 모사드 요원 아리 벤 가나안의 영웅적 리더십이 아직도 생생하다.
독립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영국의 신탁통치와 주변 아랍 국가들의 위협에 맞서 시온주의자들이 벌이는 독립투쟁에 참가하기 위해 이스라엘로 귀환하려는 이들을 태운 ‘엑소더스’호의 이야기는 실화이다. 이들의 귀환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영국군의 발포와 비인도적 처우로 갓 태어난 아이를 비롯한 수 명이 죽고 10여 명이 부상당한 채, 유대인들의 무덤 독일로 강제 구인된 이 배의 이야기는 그 뒤에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스라엘의 수정주의적 역사해석을 선도하는 언론인 톰 세게브(Tom Segev)는 인터뷰와 일기, 그리고 기밀 제한이 해제된 문서 등을 면밀히 검토하여 ‘엑소더스’ 사건을 재구성한다. 이스라엘의 집단 기억에서 ‘엑소더스’의 주역은 고통 받은 난민들이 아니라 폴 뉴먼이 연기한 아리 벤 가나안과 같은 시오니스트 영웅들이었다.
뿐만 아니다.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 벤 구리온에게 중요했던 것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것이 아니라 ‘엑소더스’호의 곤경을 지속시킴으로써 세계 여론에 이스라엘 독립의 정당성을 환기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폴 뉴먼이 연기한 영웅적 리더십은 난민들을 고통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대의를 위해 그들의 고통을 최대한 연장시키는 데 그 의의가 있었다.
그러나 ‘엑소더스’호 사건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시온주의자들은 히틀러의 집권과 나치의 박해를 이스라엘로 귀환을 거부하고 독일에 남고자 했던 배반자(?)들이 자초한 인과응보라 보았다. 벤 구리온은 나치의 승리가 시온주의에 풍부한 힘을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나치가 집권하자 시온주의의 핵심인물인 루핀을 베를린에 파견하여 유대인의 이스라엘 이주 문제를 놓고 나치와 ‘이주 협정’을 맺은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루핀은 나치 독일의 외무부와 재무부에서 우호적인 대접을 받았는데, 이는 나치 독일과 시온주의가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라는 목표를 공유했기 때문이다. 나치 독일에게 그것이 ‘유대인 없는 독일’을 실현하는 방안이었다면, 시온주의에게는 이스라엘의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을 강화하는 계기였기 때문이다. 저자는 독립 후 이스라엘의 수상을 지낸 벤 구리온과 골다 메이어 등이 모두 나치와의 ‘이주 협정’에 깊이 연관되었다는 사실을 냉정하게 드러낸다.
심지어는 SS 멤버이자 아이히만의 상급자였던 폰 밀덴슈타인 남작을 팔레스타인으로 초청하여, 나치 신문에 독일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에 대한 호의적인 기사를 게재하도록 유도하기도 하였다. 반유대주의에 대한 투쟁은 시온주의자들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벤 구리온에게 그것은 동화주의자들의 전략이었을 뿐이다.
2차대전 당시 시온주의 언론에서 홀로코스트는 비중 있는 뉴스가 아니었다. 홀로코스트의 참상이 수용소 밖으로 흘러나왔을 때조차도, 그보다는 연합군의 시실리 상륙이 더 중요한 뉴스였다. 홀로코스트는 비겁한 유대인들의 패배주의로 간주되고 ‘매춘’의 용어로 상징화되었으며,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들은 가치 없는 인간으로 간주되고, 또 심지어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비누(sabon)’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렇다면 홀로코스트의 집행자인 아이히만의 재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저자는 1959년 중동·아프리카에서 이주한 셰퍼드 유대인들의 폭동을 아이히만 재판의 배경으로 제시한다. 실제로 모사드는 전범 추적보다는 이스라엘의 국가안보, 아랍 스파이 추적 등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었다. 아이히만 재판은 셰퍼드 유대인들의 폭동을 맞아 ‘애국주의적 민족의 카타르시스’를 위한 한판 굿이었던 셈이다.
아이히만 재판을 계기로 이스라엘인들은 홀로코스트 희생자나 생존자의 고통과 자신들을 동일시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동일시는 전후 세대들에게 아랍과의 전쟁에 지면 전멸할 것이라는 위기감을 증폭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홀로코스트의 희생자 의식은 또 이스라엘의 국가주의를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동하기도 했다.
레바논 침공 직후 리쿠드 당의 베긴 수상은 홀로코스트 이후 지구상의 누구도 유대인들에게 도덕을 가르칠 자격을 잃었다고 주장함으로써 국제사회의 비판에 대응했다. 그럼에도 찔리는 구석은 있었나 보다. 팔레스타인 청소년들이 주도하는 인티파다 봉기 직후 이스라엘 군대는 젊은 군인들에게 바르샤바 게토 봉기 박물관 관람을 금지시켰다. 게토의 유대인 봉기자들에 대한 나치 군대의 잔인성이 인티파다 팔레스타인 봉기자들을 다루는 이스라엘 군대의 잔인성과 동일하다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저자의 판단이다.
몇 년 전 보스턴에서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이 책을 읽고 있는데, 우연히 옆에 앉은 이스라엘 여성과 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스라엘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이 책의 논지에 동조하는 의견이 다수였다는 것이다. 아직 희망이 있는 나라다. ‘일곱 번째 백만 명’이라는 이 책의 특이한 제목은 홀로코스트 희생자 600만 명에 더해 생존자 100만 명 조차도 전후 이스라엘의 국가주의 혹은 시온주의의 희생자임을 함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