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이요? 아예 안 봅니다.”

“역사학자라는 입장에서 보면 사실이 아닌 부분이 자꾸만 눈에 들어와서 말이죠. 역사의 공백을 상상력을 발휘해서 채워 넣는다면 이해가 가지만, 이미 굳어진 사실을 왜곡하면 아주 불편해집니다.”

이런 말을 했던 사람은 누구일까요? 2007년 9월 초, 동북아역사재단 출범 1주년 기자간담회에서 김용덕 재단 이사장이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했던 말입니다.

동북아역사재단? 중국의 역사 왜곡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2004년에 설립됐던 고구려역사재단을 2006년에 계승, 일본과의 역사 문제까지 맡도록 확대 개편된 기관입니다. ‘동북공정’ 때문에 세워진 기관이, 사실상 똑같은 이유로 만들어진 드라마들에 대해 일침을 가한 것입니다. 그 드라마란 무엇일까요. 당시는 아직 ‘태왕사신기’가 시작하지 않았을 때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주몽’(MBC) ‘연개소문’(SBS) ‘대조영’(KBS)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드디어 ‘대조영’이 끝났습니다. KBS 드라마 ‘대조영’은 크리스마스 이브 전날이던 지난 23일, 134회로 막을 내렸습니다. 사극이나 현대물을 막론하고 이런 긴 호흡을 지닌 드라마는, KBS1에서 해 주는 ‘정통 사극’ 밖에는 없습니다. ‘대명’ ‘풍운’ ‘개국’ ‘용의 눈물’ ‘태조 왕건’ ‘불멸의 이순신’의 계보를 잇는, 100회가 넘어가는 그 엄청난 제작비의 사극들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안방극장에서 ‘고구려 사극’들이 갑자기 풍미했던 이유는 순전히 중국의 동북공정 때문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동북공정이 물의를 빚었던 2004년 ‘고구려 붐’이 일어나면서 각 방송사들이 고구려를 소재로 한 사극을 준비했고, 그것이 2~3년 뒤인 2006~2007년 방영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기억력이란 참으로 믿지 못할 것이어서, 막상 방영을 시작하자 “웬 고구려 얘기들이 이렇게 많이 나오는 거냐”고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대조영’의 위치는 각별했습니다. ‘주몽’과 ‘태왕사신기’는 아무래도 구체성을 지닌 역사적 시공간을 배경으로 한 사극(史劇)이라기보다는 팬터지에 가까웠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극의 뼈대를 이루는 부분에서 말도 안 되는 설정으로 일관한 ‘연개소문’은 ‘사(史)’라는 글자를 붙이기조차 민망할 지경이었습니다.(첫 회부터 연개소문이 안시성 전투를 주도하거나, 어린 연개소문이 김유신 집에서 종살이를 하거나, ‘화랑세기’에만 나오는 인물인 미실이 시간대도 맞지 않게 등장하거나, 주인공이 연개소문인지 수양제인지 혼란스럽게 하거나, 고구려가 멸망하는 서기 668년까지 연개소문이 살아 있다거나, 한 마디로 아연함의 연속이었습니다.) 역사적인 입장에서 보면 그래도 그 중 가장 나은 작품은 ‘대조영’이라는 데에는 전공자와 일반인을 가릴 것 없이 대체로 수긍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그 ‘대조영’이 상까지 휩쓸었습니다. 지난 31일의 KBS 연기대상에서 대상(최수종)과 최우수연기상(이덕화), 작가상(장영철 작가)까지 주요 상을 모두 받았습니다.

사실 예견된 결과였습니다. 선 굵은 연기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양만춘의 사당에서 오열하는 최수종(대조영)과, 고구려군의 마지막 사기 진작을 위해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피를 뿌리는 임혁(대중상)의 모습을 보십시오. 임혁이야 1983년 ‘개국’에서 공민왕 역으로 나온 뒤로 양만춘(삼국기), 하륜(용의 눈물), 미우라 공사(명성황후) 등 사극에서의 숱한 연기로 단련이 된 ‘사극의 달인’이라 할 만하지만, 최수종의 변신은 정말로 충격적이었습니다. ‘태조 왕건’에서의 그 어색한 연기는 참으로 오래 전의 일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했습니다. 극 초반, 13킬로그램을 감량하고 10대 후반 노비의 모습으로 나타난 그의 눈에선 얼음 같은 광채마저 느껴졌습니다.

초반과 후반 한 번씩 등장한 안시성 전투신의 물량공세, 발해 건국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과 각고면려를 거치는 설정, 표도르와 최홍만의 대결을 연상케 하는 장안 황궁에서의 1대1 대결(네티즌 용어로는 ‘일기토’), 포로들이 맨손으로 무장한 군대와 싸워야 하는 귀부산에서의 ‘서바이벌 프로그램’ 장면, 초린(박예진 분)의 아들 검이(정태우 분)가 ‘낳아준 아버지’ 대조영과 ‘길러준 아버지’ 이해고 사이에서 방황한다는 몸서리처질 정도로 진부하면서도 또한 무척이나 심금을 울리는 설정, 한 회가 끝날 때마다 계필사문, 흑수돌, 금란 같은 주요 주인공들이 하나둘씩 비장한 최후를 맞이하는 종반부 전개 등, 결말이 어떻게 될지 뻔히 알면서도 화면에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하고 굳이 다음 회를 기다리고 또 기다리게 하는 요소들은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자, 그건 그렇고, 그렇다면 드라마 ‘대조영’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흔히 말하는 왜곡(歪曲·사실과 다르게 해석하거나 그릇되게 함)을 저지른 부분이 없었을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대표적인 것들만 들어보면 이런 겁니다. 이 중 상당수는 이미 드라마를 줄곧 봐 온 네티즌들에 의해 제기됐던 것들입니다.

=서기 683년에 죽은 설인귀(이덕화 분)가 발해가 건국한 서기 698년까지 생존했다는 설정.

=천문령 전투 전에 전사한 걸사비우(최철호 분)가 발해 건국 이후까지 계속 생존했다는 설정.

=천문령 전투에서 대패한 것은 사실이나 실제로는 도주에 성공했던 이해고(정보석 분)가 추격해 온 대조영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설정.

=천문령 전투가 벌어지기 이전에 죽은 대중상이 전투 도중 사망한 것으로 묘사한 부분.

=측천무후(양금석 분) 즉위 이후 당나라는 일시 주(周)나라로 국호를 바꿨는데 계속해서 ‘당나라’라고 나오는 설정.

=검모잠(김명수 분)의 고구려 부흥운동이 일어나던 서기 670년 당시 설인귀는 토번을 토벌하다 패하는 상황이었는데도 계속 안동도호부에서 활동한 것으로 묘사한 부분.

=672년의 백빙산 전투는 신라·고구려 연합군이 당군에게 패전한 것인데도 ‘당군이 몰살당했고, 이 와중에 고구려군도 큰 피해를 입었다’고 묘사한 것.

극작가 신봉승씨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픽션이라는 권한은 작가에게 주어진 자유방임이 아니라는 사실은 픽션의 구사보다도 더 중하다. 정몽주는 어떤 경우에도 56세에 죽어야 하고, 그 죽음은 반드시 선죽교에서 조영규가 휘두른 철퇴를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엄연한 사실(史實)은 작가의 픽션으로 무너뜨릴 수도 없거니와 또 무너뜨려서도 안 된다.” 아무리 ‘대조영’의 작가가 “설인귀는 당나라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설정된 것” 운운한다 하더라도 이 점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말미에서 걸사비우가 전사하지 않은 것은 가공인물인 흑수돌(김학철 분)을 대신 죽임으로써 시청자들에게 반전의 묘미를 보여주려 한 것으로 보이지만, 역시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드라마 전체가 모두 ‘허구의 사극’으로 매도 당해야 할까요? 134회가 끝날 때까지 주말을 손꼽아 기다렸던 시청자들은 정통사극으로 포장한 또 하나의 팬터지를 봐 온 것에 지나지 않을까요?

우선 대조영과 관련된 실제 역사적 기록부터 찾아봐야 할 것입니다.

서기 926년 발해의 멸망 이후 발해가 남긴 자체 기록들은 모두 없어져 버렸고, 그 뒤로 어느 나라도 발해의 역사를 편찬한 책을 낸 적이 없기 때문에, 불행히도 발해의 역사는 다른 나라의 역사책에 단편적으로 기록된 부분들을 모아서 전체를 유추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먼저 ‘구당서(舊唐書)’ 발해말갈전의 기록입니다.

“발해말갈의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의 별종(別種)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조영은 가속을 이끌고 영주(營州)로 옮겨 가 살았다. 만세통천(萬歲通天) 연간(696~697)에 거란의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키니, 조영이 말갈의 걸사비우와 함께 각각 동쪽으로 망명해 요새지를 차지하고 수비를 굳혔다. 진충이 죽자 측천이 우옥금위대장군 이해고에게 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그 남은 무리를 토벌케 하니, 먼저 걸사비우를 무찔러 베고 또 천문령(天門嶺)을 넘어 조영을 바짝 뒤쫓았다. 조영이 고구려 말갈의 무리를 연합해 해고에게 항거하자, 왕의 군대가 크게 패했으며 해고는 탈출해 돌아왔다. 이 때 마침 거란과 해(奚)가 모두 돌궐에게 항복했으므로 길이 막혀서 측천도 그들을 토벌할 수 없게 되자, 조영은 마침내 그 무리를 거느리고 동으로 가서 읍루부(挹婁部)의 옛 땅을 차지하고는 동모산(東牟山)에 웅거하여 성을 쌓고 살았다. 조영은 굳세고 용맹스러우며 용병을 잘 했으므로 말갈과 고구려의 남은 무리들이 점점 모여들었다.”

다음은 ‘신당서(新唐書)’ 말갈전의 기록.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구려에 부속된 자니, 성은 대씨(大氏)다.

(A)고구려가 멸망하자 무리를 이끌고 읍루의 동모산을 거점으로 했다. 그곳은 영주에서 동으로 2000리 밖에 있으며, 남쪽은 신라와 맞닿아 니하(泥河)로 경계를 삼았다. 동쪽은 바다에 닿았고 서쪽은 거란이다. 여기에다 성곽을 쌓고 사니 고구려의 망명자들이 점점 몰려들었다.

(B)만세통천 연간에 거란의 이진충이 영주도독 조문홰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사리(舍利•거란의 관직명) 걸걸중상이라는 자가 말갈의 추장 걸사비우 및 고구려의 남은 종족과 동쪽으로 달아나 요수를 건너서 태백산의 동북을 거점으로 해서 읍루하를 사이에 두고 성벽을 쌓고 수비를 굳혔다. 무후가 걸사비우를 책봉해 허국공(許國公)을 삼고 걸걸중상으로 진국공(震國公)을 삼아 죄를 용서했다. 그러나 비우가 그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무후가 옥금위대장군 이해고와 중랑장 색구를 시켜 쳐 죽였다. 이때 중상은 이미 죽고 그의 아들 조영이 패잔병을 이끌고 도망쳐 달아났다. 해고가 끝까지 추격해 천문령을 넘었는데, 조영이 고구려와 말갈병을 거느려 해고에게 저항하니 해고가 패전하고 돌아왔다. 이때 거란이 돌궐에 붙으므로 왕의 군대가 길이 끊겨서 그들을 치지 못하게 됐다. 조영은 곧 비우의 무리를 합병해 지역이 중국과 먼 것을 믿고 나라를 세워 스스로를 진국왕이라 부르며 돌궐에 사자를 보내 통교했다.”

사실상 이 두 기록이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하기까지의 기록의 전부인 셈입니다. 작가는 이 내용에 그야말로 엄청난 분량의 살을 붙여 드라마로 만든 것이지요. 안시성에서 고구려 멸망, 검모잠 부흥운동 등의 역사적 사실마다 대중상-대조영 부자가 반드시 개입된 것으로 나오는 설정 역시 기록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사료를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죠. 염두에 둘 것은, 이것은 중국측이 자신들과 관련이 있는 부분들만 선별해서 철저히 자국의 입장에서 서술한 기록이라는 겁니다. ‘길이 끊겨서 그들을 치지 못하게 됐다’ ‘중국과 먼 것을 믿고 나라를 세워’ 등의 기록은 결코 객관적인 상황 판단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아무리 발해를 깎아 내리려는 기록이라도 천문령 전투 이후 당나라가 다시 군대를 일으켜 대조영 세력을 공격할 수 없게 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것은 대조영 세력의 승전과 자립(自立)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는 점을 읽지 않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두 사료를 종합하면 대략 이런 줄거리가 됩니다.

(1)대중상-대조영 부자는 고구려 출신이다.(‘구당서’와 ‘신당서’ 기록의 차이 때문에 대조영이 고구려인인지 말갈인인지에 대한 시각차가 생겼습니다만, 한규철 경성대 교수의 말대로 여기서 ‘말갈’ 또는 ‘속말말갈’이란 고구려 변방인에 대한 비칭으로 보는 것이 논리적이리라 생각됩니다)

(2)대중상 부자는 고구려 멸망 이후 영주로 이주해 살았다.

(3)서기 696년 거란의 이진충이 당나라에 반란을 일으켰다.

(4)대중상 부자와 걸사비우는 고구려 유민들을 데리고 동쪽으로 가 성벽을 쌓고 당나라에 저항했다.

(5)측천무후는 걸사비우를 허국공, 대중상을 진국공으로 삼았다.(적군의 수장을 책봉했다는 것은 그들의 세력을 인정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6)대중상은 이 무렵 죽었다.

(7)이진충의 반란이 진압되자 측천무후는 이해고를 시켜 걸사비우를 공격하게 했다. 걸사비우는 전사했고, 대조영은 무리를 이끌고 도주했다.

(8)그러나 이해고가 천문령을 넘자 대조영이 반격, 큰 승리를 거뒀다. 이해고는 도주했다.

(9)대조영은 동모산에서 나라를 세웠다.

뭔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다들 잘 아시다시피 발해는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불릴 정도로 매우 큰 나라였습니다. 전성기 때는 요동에서 연해주, 흑룡강에 이르는 넓은 영토에 5경 15부 62주의 지방행정을 정비해 위세를 떨쳤고, 우리 역사의 ‘남북국시대’를 형성한 북쪽 주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라의 건국 과정을 좀 보십시오. 영주에서 거란족의 반란이 일어나자, 아마도 그곳으로 끌려와 있던 고구려 유민(말갈 포함)들이 대중상의 지휘하에 요하를 건너 다시 동쪽 고구려 땅으로 옮겨갔고, 다시 당나라의 공격을 받아 쫓겨가던 중 천문령에서 반격을 가한 뒤 더 동쪽으로 달아나다가 동모산에 이르러 나라를 건국했다?

거대한 나라의 기업(基業)을 이룬 이야기치고는 너무나 우연적인 요소가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바로 주목되는 것이 ‘신당서’의 앞부분, 제가 (A)라고 표시한 사료입니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동모산을 기점으로 삼아 이곳으로 몰려든 고구려 유민들을 받아들였다는 내용입니다. 앞서 ‘구당서’와 비교할 때 이 얘기는 시간적으로 (B)사료 뒤에 들어가야 할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대씨에 관한 내력을 총괄적으로 서술한 뒤에 (B)에서 다시 과거로 돌아가 자세하게 세부적으로 기록하는 기법을 쓴 것으로 지금까지 많은 학자들이 봐 왔던 겁니다.

하지만 장구한 세월에 걸친 사전 준비와 노력 없이 단시일에 아무 것도 없는 동모산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렇습니다! (A)와 (B)가 시간적으로 자연스럽게 선후 관계에 있는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상당한 의혹이 해소됩니다. 고구려 멸망은 668년이었고 이진충의 반란은 696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고구려 멸망 직후로부터 그 28년 동안 대씨 일족들이 동모산을 중심으로 다시 세력을 키워 서서히 고구려 부흥운동을 한 것이라면? 그 일족 중 한 사람인 대중상이 무슨 연유인지 알 수 없지만(아마도 요서 일대 고구려 유민의 세력을 규합하려는 목적으로) 영주로 이주해 거란 벼슬을 하고 있던 것이고, 자립할 준비를 갖추고 있던 중 거란족의 반란이 일어나자 유민들을 이끌고 요하를 건너 옛 고구려 땅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대중상이 죽고 걸사비우가 전사하자, 대중상의 아들 대조영이 새로운 지도자가 돼서 처음부터 동모산을 목표로 삼고 천문령을 넘은 것이고, 동모산 세력과 다시 힘을 모아 추격해 온 이해고에게 반격을 가한 것이라는 해석인 것입니다.

중국측 기록에 나와 있지 않았을 뿐, 이진충의 반란 훨씬 이전부터 이미 발해 개국의 준비가 이뤄지고 있었던 겁니다.

드라마에서 봐 온 내용하고 비슷하다고요? 그렇습니다. 제가 보기에, 드라마는 사료를 이런 방식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보장왕의 부흥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뒤 당나라로 끌려가 피살 직전에 탈출한 것으로 설정된 대조영은 동모산에서 세력을 키운 것으로 묘사했고, 그 동안 1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른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무리한 해석일까요? 그렇게 볼 수만은 없습니다. 아니, 시각에 따라서는 대단히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역사 해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이진충의 반란을 계기로 우연하게 자립하려 했고, 쫓겨가다가 덜컥 세운 나라처럼 서술된 중국 사서의 빈틈을 메우는 역할을 해 주는 것입니다.

또한 발해 건국이란 끊임없이 지속돼 왔던 고구려 부흥운동의 결실로서 수립된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명천제단’이라는 가공의 단체를 내세우긴 했지만 보장왕(길용우 분)의 복국(復國) 운동을 상세하게 다룬 것도 무척 흥미롭습니다. 사서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가 멸망하자 당나라로 끌려갔던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 보장왕은 9년 뒤인 서기 677년 ‘요동도독 조선군왕’에 임명돼 많은 고구려 유민들을 데리고 요동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반란을 꾀한 것’, 즉 고구려 부흥 운동을 벌인 것이 적발돼 다시 장안으로 소환되고, 사천성으로 유배당합니다. 여기까지가 기록에 나온 사실이고, 그가 누구와 어떻게 연결해 복국을 꾀했는지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바로 그 지점부터는 작가의 상상력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부분인데, 드라마는 그 부분에서 성공한 편이었습니다. 겉으로는 유약하고 겁이 많은 척 하면서 속으로는 칼을 갈고 있는 인물을 형상화한 것이지요.

이 드라마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대사가 두 군데 있습니다. 23회에서 죽음을 앞둔 연개소문(김진태 분)의 꿈 속에 한쪽 눈이 먼 당태종(송용태 분)의 유령의 나타나 이렇게 말합니다. “네놈들이 자랑하는 그 천 년의 역사를 모조리 지우고 다시 쓸 것이다. 고구려의 영토와 역사, 문물들이 다 우리 것이 되어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후세에 빈 껍데기만 물려주게 될 것이란 말이다.” 사실, 이 드라마를 기획하게 된 의도가 가장 직설적으로 드러난 대사였습니다. 당태종 유령의 입을 빌어 한국인들에게 섬뜩한 대사를 말하고 있는 것은 ‘동북공정’을 입안하고 실행한 현재의 중국 당국자들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또한 33회에서 양만춘(임동진 분)은 대조영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땅에 또 많은 전쟁들이 벌어지겠지. 허나 명심하거라. 백성들을 지켜내는 한, 고구려는 절대 망하지 않는다. 설령 국운이 다해 왕조가 무너질지라도, 백성들이 죽지 않는 한 그 나라는 언제고 다시 일어설 수가 있다. 내 말을 꼭 명심하거라. 늘 백성들과 함께 할 수만 있다면, 네가 어디서 무슨 꿈을 꾸든, 그 꿈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솔직히 얘기해 봅시다. 도대체 어느 역사학자의 어떤 논문이나 연구서가 이런 대사를 뛰어넘는 감동을 줄 수 있단 말입니까?

바로 이것이 역사학의 영역과는 구별되며, 때로는 그 한계를 뛰어넘는 극(劇)의 영역인 것입니다. 헨리 제임스(1843~1916)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역사가는 본래 자기가 정말 쓸 수 있는 것 이상의 자료를 가지려고 한다. 그러나 극작가는 자신이 정말로 향유할 수 있는 이상의 자유를 원하고 있을 따름이다.”

‘대조영’은 분명 한계가 많은 드라마였습니다. 사실과 다른 부분도 많았고, 남북국시대의 또 다른 한 축인 신라는 지나치게 폄하됐습니다. 100회 이후로 34회가 늘어나면서 템포는 느려졌고 구성은 산만해져 최후의 절정이 됐어야 할 천문령 전투에서 당나라 20만 군사들이 단지 몇 번의 장면전환 끝에 ‘전멸됐다는 사실을 시청자들이 뒤늦게 알 수 있게 하는 정도’로만 묘사되고 그냥 넘어가 버렸습니다. 사실과 다른 부분은 홈페이지에서라도 밝혔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걸 단순한 ‘왜곡 드라마’로 치부하고 우습게 보기엔 그것이 시청자들, 다시 말해 국민들의 가슴에 남긴 흔적이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큰 줄기에선 나름대로 역사 해석의 합리성을 보여준 드라마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다시 맨 처음의 그 ‘사극 폄하’ 발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저는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잘못된’ 드라마가 그렇게 국민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동안, 당신들은 과연 뭘 하셨습니까?”

김 이사장의 그 말은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고, 학자로서 취할 수 있는 태도로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의 현재 위치가 단순한 ‘학자’가 아니라는 점에 있습니다. 그는 중국의 역사왜곡에 대한 대응책으로 설립된 기관의 수장입니다.

그 기관이 설립될 수 있었던 데에는 국민의 간절한 바람이 있었습니다. 그 뜻이란 겉으로 문제가 불거지지 않게 조용한 막후작업을 해 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중국측 학자들과 중국에서 비공개로 국제학술회의를 진행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국민 세금을 써 가며 동북공정의 주역인 손진기, 손홍 부녀(父女)를 서울로 불러 뻔한 얘기나 듣게 하자고 했거나, 중국 사회과학원 학자들을 ‘NGO 관계자’라는 명목으로 초대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본군 성노예 문제가 이슈가 될 때마다 정당처럼 논평이나 내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고구려와 발해와 독도를 비롯한 우리 역사의 실상을 정확히 연구하고 국민에게 알려 중국과 일본이 더 이상의 역사왜곡을 하지 못 하게 해 달라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국민 누구나 그 기관의 이름을 알 수 있을 정도의 적극적인 국내외 홍보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2008년 1월 초의 한국에서 드라마 ‘대조영’을 보고 발해 건국에 대해 알게 된 사람은 너무나 많은 반면, 그 재단으로부터 어떤 교육이나 홍보의 대상이 됐다는 사람은 무척 찾기 힘듭니다.

학자로서의 학문적 엄밀성을 내세우기 전에, 먼저 그 드라마들의 긍정적인 기능을 충분히 인식하고, 드라마의 잘못된 부분과 실제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부분들을 짚어내며, 그 흐름을 타고 ‘주몽과 고구려 건국 이야기’ ‘광개토대왕과 고구려의 천하관’ ‘대조영과 발해의 건국’ 같은 대중 역사서들을 함께 펴내 국민적인 관심을 끌어야 했습니다. 드라마가 가진 대국민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그래야 했습니다. 민간학술단체인 고구려연구회처럼 ‘고구려 드라마들의 오류’를 짚어내는 학술회의라도 열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드라마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냉소적인 발언을 하기 전에, 바로 그 말을 하고 있는 그 분이 몸담고 있는 그 기관은, 과연 우리의 고대사를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도대체 무슨 일을 했는지 자문(自問)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 재단 건물 안의 닫힌 연구실 속에서 대중과는 담을 쌓은 역사학의 고담준론에만 매달렸던 것은 아닙니까?

이제 고구려 드라마들은 다 끝났습니다. 만족하십니까? 그런데, 이제 뭘 하실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