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우리나라 음악 팬들을 열광시켰던 록그룹 산울림의 막내 멤버였던 김창익(50)이 1월 30일(한국 시각) 캐나다 밴쿠버에서 사망했다. 사망 당일 밝혀지지 않았던 그의 사망 원인은 눈길에서 지게차를 운행하다 사고로 숨진 것으로 31일 최종 확인됐다.
김창익의 형 김창완(가수 겸 탤런트)과 함께 캐나다로 출국한 김창완의 매니저는 이날 산울림 공연을 기획했던 라이브 플러스를 통해 김창익의 정확한 사고 경위를 공식적으로 밝혔다.
김창완의 매니저는 “사고 당일 캐나다 현지에 눈이 많이 내리자 (식품 회사를 운영하던) 김창익은 직원들에게 사고 위험이 있으니 리프트(지게차) 사용을 하지 마라고 지시했다”며 “그런데 예상치 않게 낮 12시쯤 물건이 들어오자 직원들의 안전을 우려해 본인이 직접 나서서 지게차 운행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경사진 길에서 작업이 이루어지던 중 눈 길에 지게차가 미끄러지면서 지게차를 운행하던 김창익이 사고를 당했다”라며 “바로 응급실로 옮겨졌으나 출혈이 너무 심해 유명을 달리했다”고 말했다.
김창익이 한국의 음악 팬을 마지막으로 본 시점은 지난 2006년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산울림 30주년 기념콘서트’였다. 특히 올해 6월 일본에서 다시 3형제가 모여 공연을 열 예정이었던 것으로 밝혀져 팬들을 더욱 안타깝게 하고 있다.
1월 30일에는 고인이 평소 캐나다의 집에서 평소 연습하던 드럼 세트 사진과 함께 형 김창완의 비통한 심정을 담은 편지도 공개됐다.
김창완은 “이제 저희 막내 김창익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며 “그런 무력감은 저를 더욱 슬프게 합니다”라고 말했다.
김창완은 “하지만 이 크나큰 상실은 그가 얼마나 사랑스런 사람이었나를 일깨워주었습니다”면서 “평소에 늘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사랑 받기 원했던 고인의 향기가 그나 큰 슬픔 속에서도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해 주었습니다”고 애도했다.
김창완은 “고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면서 “하지만 웃는 드러머 김창익을 사랑한 모든 분들을 위로해야 하는 일이 남아 있습니다”고 말했다.
김창완의 편지 "창익아, 내동생 창익아" 창익아, 내동생 창익아 창익아 이제 저희 막내 김창익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 무력감은 저를 더욱 슬프게 합니다. 하지만 이 크나큰 상실은 그가 얼마나 사랑스런 사람이었나를 일깨워주었습니다. 장례를 치르러 가는 비행기안의 낯선 이들조차 친근하게 느껴졌습니다. 평소에 늘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사랑 받기 원했던 고인의 향기가 그나 큰 슬픔 속에서도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해 주었습니다. 고인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웃는 드러머 김창익을 사랑한 모든 분들을 위로해야 하는 일이 남아 있습니다. 사랑하겠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행복하도록 사랑하겠습니다. 천국에서 웃으며 드럼을 치고 있을 동생을 생각하며, 이렇게 동생이 떠날 줄 몰랐던 형이… 2008년 1월 30일 |
김창익의 안타까운 사망 소식에 네티즌은 이틀째 애도의 뜻을 표하고 있다. 현재 여러 커뮤니티 사이트마다 근조표시인 ‘▶◀’과 함께 “별세 소식을 듣고 멍해진다. 가슴이 답답하다”, “아직 젊은 나이인데 안타깝다”, “이제는 결코 볼 수가 없게 되다니 슬프다” 등 수 많은 글과 이와 관련된 댓글이 줄을 잇고 있다.
고인의 장례식은 31일(현지시각) 오후 7시에 진행된다. 유족으로는 아내와 2남이 있다.
◆산울림이 걸어온 여정
남진·나훈아가 라이벌을 형성하며 인기가 절정에 오르던 70년대 중반 록을 부르는 삼형제가 등장했다. 이들은 록을 달고 나와 당시 성인가요 중심의 한국 대중가요 판을 흔들었다.
세 사람이 음악을 시작한 과정은 간단했다. 1972년 김창완이 집에 500원짜리 기타를 들고 와서 형제끼리 노래를 부른 것이 록 그룹 탄생의 계기가 됐다. 얼마 후 김창완은 작곡을 시작했다. 이를 어깨 너머로 지켜보던 둘째 김창훈은 4000원짜리 기타를 사서 형과 합류했다. 막내 김창익은 전화번호부와 노트 등을 방바닥에 놓고 드럼 흉내를 하고 숟가락으로 책을 두드리며 리듬을 타다가 드럼을 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음악을 시작한 세 사람이 1집 앨범을 내기 전까지는 쓴 곡 수만 무려 200곡이 넘었다. 산울림이 데뷔 후 한 해 2~3번 꼴로 음반을 낼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김창완이 대학을 졸업하던 1977년, 삼형제는 그 동안 작곡을 했던 약 150개 이상의 곡들이 아까워 정리하는 기분으로 한 장의 앨범을 내기로 했고, 우여곡절 끝에 레코드사에서 녹음을 허락 받아 1집을 만들었다. 당시 김창완은 녹음하는 날이 입사시험과 겹쳤지만 입사를 포기했다.
‘음반 하나만 갖고 싶다’는 생각으로 낸 1집 앨범은 ‘아니 벌써’ ‘아마 늦은 여름이었을 거야’ ‘불꽃놀이’ ‘문 좀 열어줘’ 등이 수록됐는데 대히트를 기록했다.
5개월 뒤 이들은 ‘어느 날 피었네’ ‘이 기쁨’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안개 속에 핀 꽃’ 등의 곡이 담긴 2집을 발표했고, 같은 해 ‘내 마음(내 마음은 황무지)’이 담긴 3집을 발표했다. 1년 남짓한 기간에 발표한 음반이 무려 5장이나 됐다.
당시 그토록 폭발적 인기를 얻게 된 이유를 묻는 질문에 산울림 멤버들은 “운이 좋았다”며 당시 시대 상황을 이유로 들었다. 1960년대 중반 미국에서 비틀스나 앨비스 프레슬리가 탄생하면서 문화의 주도권이 기성세대에서 젊은 세대로 이양됐고, 그 여파가 70년대 우리나라까지 이르게 된 것.
김창훈은 “이 밖에 창의적인 주제와 적나라한 누드를 추구하지 않은 은근하고 비유적인 가사 표현, 그리고 산울림적인 음악의 독창성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김창훈과 김창익의 군에 입대하며, 맏형 김창완은 솔로로 방향을 틀었다.
산울림이 노래하는 과정이 항상 순탄했던 건 아니다. 1집만 40만장을 판매한 이들이었지만 82년 9월 잠정 해체될 때까지 수입은 거의 없었다. 결국 창훈·창익 형제는 음악을 접고 취직을 결심했다. 밴드 해체 후 김창훈은 LA로 건너갔고, 김창익은 대우자동차에 근무하다 10년 전 캐나다로 건너가 식품유통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맏형인 김창완은 산울림의 이름으로 3장의 음반을 더 냈고, 80년대 중반 이후 신인들을 모아 ‘꾸러기들’을 결성해 최성수, 임지훈, 윤설하, 현희, 신정숙 등의 후배들을 길러냈다. 14년이 지난 1997년엔 마지막 앨범인 13집을 발표했다.
“대중의 호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는 이런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라는 마음으로 작업을 했다.”
산울림은 2005년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음악적 지조를 지켜왔던 부분이 가장 자랑스러웠다고 밝혔다. 대중의 인기를 쫓아 음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자신들 스타일에 맞는 음악을 추구해왔다는 것이다.
산울림에게 가장 애착이 가는 앨범이 9집 앨범으로 알려졌다. “9집 앨범은 8집 앨범의 반작용으로 나왔는데, 8집은 감미로운 발라드가 주류를 이뤄 판매는 좋았지만 ‘당의정(糖衣錠·쓴 약에다가 코팅을 한 알약)’을 입힌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 김창완의 설명이다.
노래를 듣는 사람을 달콤한 말로 유혹한 것이 8집이었는데 철저히 반성하고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만든 앨범이 9집이었다. 이 앨범을 통해 주제나 음악적 형식에서 많은 시도를 했다는 평가이다. 비록 대중 팬들은 그다지 호응을 보내지 않지만 부르고 싶은 노래와 대중이 원하는 노래가 상충될 때 타협하지 않고 소신껏 곡을 만들었기에 산울림은 9집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