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듯 부드럽게 구부러진 벽면에 책이 꽉 찬 서가의 사진이 붙어 있고, 칸트의 철학 책이 빛을 뿜는다. 서울 태평로 인터뷰갤러리 'one'에 설치된 강애란(48·이화여대 교수)씨의 작품이다.
관객은 거리를 향해 활짝 열린 유리벽을 통해 강씨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스쳐가도 좋고, 기웃거려도 좋고, 멈춰 서서 곰곰이 들여다봐도 좋다. 유리벽은 작가와 관객, 갤러리와 거리를 연결해 주는 '평면 통로'다.
이 갤러리에 설치된 책은 모두 23권이다. 진짜 종이 책이 아니라, 투명한 플라스틱 모형에 책 표지를 끼우고 내부에 전선을 연결해 빛을 발하게 만든 것이다. 플라스틱 모형이라는 점에서는 '가상'이지만, 지구상 어딘가에 실제로 존재하는 책의 표지라는 점에서는 '진짜'다. 강씨는 "책 한 권, 한 권 속에는 물리적인 부피에 한정되지 않는 거대하고 무한한 공간이 펼쳐져 있다"고 말했다.
강씨는 딸 셋 중 둘째다. 방마다 책이 그득한 집에서 자랐다. 그러나 세 자매 중 책을 가장 열심히 읽은 사람은 강씨가 아니라 세 살 위 언니였다. 강씨는 "나는 사실 어려서 책에 대해 엇갈리는 감정을 품고 자랐다"고 했다.
"언니가 책을 얼마나 읽었던지, 재미있는 책은 전부 앞부분이 너덜너덜하게 떨어져 나가고 없었어요. 앞부분이 없는 책을 보면 자동적으로 '재미있는 책인가 보다' 싶지만, 앞부분이 없으니 읽을 수가 없잖아요?"
좀 더 커서는 그녀도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졌다. 학교 도서관에서 매일 오후를 보내곤 했다. 그래도 책은 그녀에게 여전히 매혹과 염오를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읽으면 유익하고, 행복하지요. 동시에 서가에 좍 꽂혀 있는 책을 보면 엄청난 중압감이 밀려들었어요."
강씨는 30대 중반인 1997년부터 꾸준히 책을 소재로 작업해 왔다. 서울 평창동에 있는 100평 규모 작업실은 4.5m 높이 천장까지 한 벽이 온통 책으로 꽉 차 있다. 여행 갈 때마다 한 보따리씩 애써 사 모은 외서들이다. 독일 화가 안젤름 키퍼와 독일 사진가 칸디다 회퍼의 작품집을 비롯해 미술 관련 서적이 많지만 문학·철학·의학 책도 곳곳에 끼어 있다.
책으로 작업하기 전에는 '보자기'를 소재로 드로잉도 하고, 입체도 만들었다. 그녀는 "펼치면 평면, 싸면 입체가 되는 '보자기'라는 사물을 통해 인간의 희로애락, 감정과 관념을 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자기에 책을 싸기 시작했다. "책이야말로 감정과 관념의 총합이기 때문"이다. 그 뒤 점차 책으로만 작업을 하는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겼다.
강씨는 "나는 한때 책 속에 '고정관념'이 농축되어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고정관념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살라' 혹은 '저렇게 살라'고 가르치고, 또 은근히 강요하지요. 저는 책을 좋아하면서도 책에 반발했어요. 그 뒤 작업을 계속하면서, 책을 보는 제 시선도 달라졌어요. 책을 긍정하게 됐다고 할까요? 책에는 물리적 실체와 가상의 공간이 공존하지요."
미술평론가 박신의씨는 강씨가 "책을 단순히 물질적인 개념만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는 비물질의 공간으로 설정하고 있다"며, "(강씨의 작품 속에서) 책은 질주하는 지식의 통신체가 된다"고 썼다.
복합문화공간 씨스퀘어의 2층에 위치한 인터뷰갤러리(인터뷰룸+갤러리) 두 번째 프로젝트로 선정된 강씨의 작품은 앞으로 약 두 달여 전시된다. 위치문의 (02)724-5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