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 앞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봉강동의 중심에는 영광김씨 고택인 봉소당(鳳巢堂)이 자리잡고 있다. 대지 5000평에 한옥으로 된 사랑채·행랑채·본채가 위풍을 드러내고 있다. 이 집은 몇 년 전에 '가문의 영광'이라는 영화에도 등장했다. 이 저택이 건립된 시기는 구한말이다. 현재 12대 후손 김재호(66)의 증조부인 김한영이 구한말에 장사를 해서 모은 돈으로 지은 집이다. 당시 순천에선 김종익이 8만 석 부자였고, 여수에는 김한영이 1만2000석 부자로 유명했다고 한다.

김한영은 장사로 돈을 벌었지만, 가난한 과객 대접에 후했다고 전해진다. 김한영은 과객이 오면 반드시 주특기를 물어보았다. 덕석을 짜는 것이 주특기인 과객에게는 덕석을 짜게 하였다. 이걸 시장에 내다 팔게 해서 돈이 모이면 그 사람이 경제적으로 자립을 하게 도와줬다. 이 집은 평소 소작인들에게도 후하게 대했다. 자식들이 8~9명 되는 소작인들은 자식들 먹이느라고 소작료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

그 처지가 딱하다고 해서 그냥 눈감아 주면 다른 소작인들이 "왜 그 집만 봐주느냐"고 항의를 할 것이기 때문에 다른 방법을 강구했다. 자식 많은 소작인들에게는 수백 가마의 쌀을 배에 싣고 내리는 하역작업을 맡겼다. 화양면 고진이라는 곳에서 여수항까지 배에 쌀을 싣고 운반하는 일이었다. 이 대가로 소작료를 면제해 주면 다른 소작인들이 보기에도 공평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평소에 쌓아둔 이런 적선이 난리가 났을 때 그 효력을 발휘했다. '여순반란사건'이 났을 때 여수에서 가장 부잣집인 봉소당 주인이 제일 먼저 좌익들에게 잡혀갔다. 공교롭게도 당시 좌익의 지도부 인물 가운데 하나가 평소 이 집의 혜택을 보았던 바로 그 소작인의 아들이었다. 좌익을 하긴 하였지만, 평소에 많은 신세를 졌던 '봉소당'의 주인을 죽일 수는 없었다. 결국 봉소당 주인이 몰래 탈출할 수 있도록 눈감아 줌으로써 보답했다. 이렇게 해서 이 집은 난리통에도 사람이 죽거나 집이 불타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집은 현재도 여전히 여수의 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