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무대에 한 줄기 핀라이트가 떨어진다. 정신과 의사 리빙스턴(윤석화)이 서 있다. 갓 낳은 아기를 죽인 혐의로 기소된 수녀 아그네스(전미도)의 정신 감정에 들어갈 참이다. 그런데 리빙스턴은 그레타 가르보가 주연한 영화 《춘희》의 비극적인 엔딩 이야기를 꺼낸다. "또 다른 마지막 장면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장면의 교체를 믿고 싶었습니다…."
연극 《신의 아그네스》(연출 한지승)는 종교적이면서도 수학을 닮아 있다. 무대는 박스형이고 투명한 아크릴 의자 두 개만 놓여 있다. 리빙스턴과 아그네스, 원장수녀(한복희) 등 등장인물 셋은 팽팽한 삼각 구도 속으로 관객을 빨아들인다. 학교 교육을 받기는커녕 TV도 본 적 없는 아그네스는 순수 그 자체다. 그런데 어떻게 임신을 했고 또 어떻게 아기를 목 졸라 죽였을까?
리빙스턴은 줄담배를 피운다. 이 무대에서는 담배 연기가 네 번째 배우다. 내뿜는 힘과 방향, 공기의 움직임, 푸른 조명 등에 따라 꿈틀거리며 불가사의한 어떤 존재를 끌어당기는 것 같다. 처녀생식을 주장하는 아그네스에게 리빙스턴이 "하느님(아기를 잉태하게 한 분)과 휴지통(아기가 버려진 곳)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죠?"라고 캐물을 때는 《에쿠우스》의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가 떠오른다. 리빙스턴 역시 아그네스를 통해 자신의 상처와 맞닥뜨리기 때문이다.
2년 만에 무대에 오른 윤석화는 좀 긴장한 것 같았다. 대사 전달의 리듬을 놓쳤다는 느낌을 주는 대목이 서너 차례 있었다. 일부러였을까, 실수였을까. 아그네스 전미도는 최고의 아그네스로 기억해 두어야 할 만큼 빛이 났다. 단호하고 꾸밈이 없었다. 호소력 강한 연기로 이 드라마의 개연성이 단단해졌다. 리빙스턴이 최면을 걸고 아그네스가 진실을 토해내는 장면들도 밀도 있었다. 리빙스턴은 끝에 "저도 기적을 원합니다"라고 고백한다. 윤석화의 《신의 아그네스》는 그레타 가르보의 《춘희》와 달리 해피엔딩일까? 올 들어 가장 추웠던 지난 6일, 첫 공연은 꽉 찬 객석만큼이나 반응이 뜨거웠다. ▶내년 1월 10일까지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 (02)3672-3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