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72년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리처드 닉슨(Nixon) 미국 대통령의 하야에 결정적인 영향을 줬던 워싱턴포스트 기사의 제보자(deep throat) 마크 펠트 전 미국 연방수사국(FBI) 부국장이 18일 사망했다. 향년 95.
펠트 전 부국장은 미국 사상 가장 유명한 익명의 제보자였으며, 워싱턴포스트의 밥 우드워드 기자(1943년 생)에게 닉슨 대통령이 지시한 워싱턴 DC 내 워터게이트 호텔 침입사건에 대한 결정적인 제보를 9개월간 했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닉슨의 백악관이 중앙정보국(CIA) 요원 출신으로 팀을 구성, 야당인 민주당의 워터게이트 호텔 내 전국위원회 사무실을 1972년 6월 17일 도청하려다, 5명이 현장에서 검거된 사건이다. 발생 초기에는 단순 절도 사건으로 넘어갈 뻔했으나 워싱턴포스트가 물고 늘어지면서 진실이 드러났고, 1974년 8월 9일 닉슨의 하야로 마침표를 찍었다.
2005년 5월 펠트 전 부국장은 30년간의 침묵을 깨고 자신이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우드워드 기자에게 비밀리에 정보를 제공한 ‘딥 쓰롯’이었다고 공개, 미국 사회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는 당시 ‘베너티 페어’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혔다. 이로 인해 제보자가 사망하기 전에는 신원 공개를 하지 않기로 약속했던 우드워드 현 워싱턴포스트 부국장을 당황하게 만들었다고 뉴욕타임스는 19일 보도했다. 우드워드 기자는 동료인 번스타인에게도 당시 제보자가 펠트 전 부국장이라고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 세 사람은 지난달 펠트 전 부국장이 은퇴해 살고 있던 캘리포니아주 샌터 로사의 그의 집에서 만나 두 시간을 같이 보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고, 두 명의 기자는 이 자리를 ‘가족 상봉’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신문은 말했다.
펠트 전 부국장이 아니었으면 닉슨 대통령(1994년 사망)이 불법 도청, 주택 침입, 돈 세탁 관련 권력 남용을 한 사실이 알려지지 않고 묻혔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펠트는 비밀 제보자로서 워싱턴포스트에 사건 관련 기사가 계속 나오도록 하는 한편, FBI 부국장으로서 워터게이트 호텔 침입 관련 FBI의 수사를 방해하는 대통령의 시도에 맞서야 했다.
닉슨은 펠트 전 부국장이 워터게이트 관련 도움을 적에게 주고 있다는 사실을 일찍 알았다. 닉슨은 비서실장 H R 핼더먼(Haldeman)으로부터 1972년 10월 19일 백악관 집무실에게 “무엇이 유출됐는지, 누가 정보를 유출하고 있는지 알았습니다”라는 보고를 받았다. 닉슨과 비서실장의 당시 대화 내용은 녹음되어 있으며, 나중에 공개됐다.
닉슨은 핼더먼의 보고를 듣고 “FBI에 있는 사람이야”라고 물었고, 핼더먼은 “네, 그렇습니다”라고 답했다. 닉슨 대통령은 다시 “누구야?”라고 물었고, 핼더먼은 “마크 펠트입니다”라고 답했다. 닉슨은 놀란 목소리로 “아니 도대체 그가 왜 그래?”라고 물었다. 펠트 전 부국장을 포함해 누구도 이 질문에 완전하게 대답을 준 적이 없다고 뉴욕타임스는 보도했다. 펠트 전 부국장은 이와 관련 닉슨이 정치적 목적으로 FBI를 오도하고 있었으며, 닉슨은 워터게이트 사건이 유야무야 끝나기를 바라고 있다는 걸 알았다고 나중에 말했다. 백악관이 CIA에 명령을 내려, 국가 안보를 내세워 FBI가 수사를 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
펠트가 닉슨에 대해 섭섭한 감정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 펠트 전 부국장은 FBI를 48년간 이끌어온 전설적인 국장 에드거 후버가 1972년 5월 사망한 뒤 조직의 2인자로서 국장 자리를 승계할 수 있었다. 닉슨은 하지만 정치적으로 충성스런 법무부 출신 패트릭 그레이 3세를 신임 FBI국장으로 임명했다. 펠트 전 부국장은 이에 화가 몹시 났고 대통령이 “에드거 후버의 자리에 정치인을 원했다. 그를 FBI를 백악관의 부속물로 바꿀 것”이라고 썼다. 워터게이트 침입 사건은 후버가 죽고 6주 후에 일어났다.
펠트는 1973년 6월 FBI를 떠나야 했으며, 이후에도 꾸준히 자신이 워터게이트 사건 보도의 제보자라는 주장을 부인했다. 우즈워드와 번스타인을 미국 저널리즘의 전설로 만든 1976년 영화 ‘모든 대통령의 사람들’에는 로버트 레드포드가 밥 우드워드 역할을 맡았고, ‘딥 쓰롯’역은 할 홀브룩이 맡았다. 이 영화 속에는 탐사보도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말이 나오는데, 그건 “돈을 따라가라”(follow the money)라고 뉴욕타임스는 말했다. ‘딥 쓰롯’이란 별명을 그에게 붙인 건 워싱턴 포스트의 편집국장 하워드 시먼스였는데, 이름은 당시 유행이던 포르노 영화의 제목에서 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