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후원에서 조선시대 어정(御井) 2기가 발굴됐다.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는 23일 창덕궁의 부용지 주변에서 조선의 우물 두 곳을 찾아냈다고 밝혔다.
우물은 동궐도(東闕圖 1826~1827)에 표시된 부용지 북서쪽 모서리, 세조 때 만든 우물들의 기록을 새긴 비를 보호하는 비각인 사정기비각(四井記碑閣) 북쪽 지점에서 서로 5m 정도 거리를 두고 거의 완전한 모습으로 확인됐다.
궁궐지(1834~1849)는 “세조 때에 종신(宗臣)에게 명하여 터를 잡아 우물을 파게 했는데 그 뒤에 여러 차례 병화(兵火)를 겪어 두 우물만 남았다. 숙종 16년(1690) 경오(庚午)에 그 고적(古跡)을 애석히 여겨 우물 둘 만이라도 보수하라 명하고 이어 그 곁에 비를 세웠다. 숙종이 지은 사정기(四井記)에 이르기를, 우리 세조대왕께서는 … 첫 번째 우물 이름을 마니(摩尼)라 하고 두 번째 우물은 파려(玻瓈), 세 번째 유리(琉璃), 네 번째 옥정(玉井)이라 하고…” 라고 기록하고 있다.
궁궐지의 기록으로 미뤄 두 우물은 세조 때 판 마니, 파려, 유리, 옥정 네 우물 중 2개로 추정된다. 한 우물은 숙종 이전에 폐기 됐으며 다른 하나는 숙종 16년(1690)에 보수됐다가 1960~70년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우물 2기가 마니, 파려, 유리, 옥정 중 어느 것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숙종 이전에 폐기된 우물은 지름 164㎝, 깊이 175㎝로 화강암을 둥글게 파내어 바닥을 만들고 그 위로 안쪽을 둥글게 다듬은 화강암 석재 6단을 쌓아올려 완성했다. 우물의 제일 윗부분은 안쪽은 둥글고 바깥쪽은 각 지게 깎은 석재 4매를 이어 붙여서 8각형 형태를 띠게 만들었다.
우물 주변으로는 부채꼴 모양의 화강암(길이 85㎝)을 덧대어 둥글게 깔아 사용면을 만들고, 바깥쪽에는 깬돌을 4~5단 쌓아 올렸다. 그 사이에는 사용면보다 한 단 떨어지는 박석이 깔려 있다. 물을 흘려보내기 위한 배수로로 추정된다. 우물 내부에서는 임진왜란 전후 것으로 보이는 백자 바리, 즉 바닥에서 아가리 쪽으로 벌어져 올라가 아가리의 지름이 20㎝ 이상인 토기 1점이 출토됐다.
숙종 이후까지 사용된 지름 85㎝, 깊이 244㎝ 우물은 별다른 바닥 시설 없이 화강암을 7단 쌓아 완성했다. 숙종때 보수의 흔적, 최근까지 사용된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창덕궁 내 임금이 사용하던 이른 시기와 늦은 시기의 우물을 동시에 확인했다. 조선시대 전·후기의 유구가 잘 보존돼 있는 경복궁과 더불어 창덕궁의 궁궐 변천의 역사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