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린 손 끝에 뜨거운 정성 고이 접어 다져온 이 행복 / 여민 옷깃에 스미는 바람 땀방울로 씻어온 나날들’(아내에게 바치는 노래·1976)
‘고향을 물어보고 이름을 물어봐도 / 잃어버린 이야긴가 대답하지 않네요 / 바라보는 눈길이 젖어 있구나 / 너도나도 모르게 흘러간 세월아’ (옥경이·1989)
‘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 / 무슨 설움 그리 많아 포기마다 눈물 심누나’(칠갑산·1989)
한국적 서정과 정한(情恨)을 노래로 표현해 온 작사·작곡가 조운파(趙雲坡). 1943년 충남 부여군 은산면에 태(胎)를 묻은 조운파에게 2009년은 여러 가지로 뜻 깊은 해다. 대표적 히트곡 ‘옥경이’와 ‘칠갑산’이 세상 빛을 본 지 20년이 된다.
올해는 신앙생활로 인해 잠시 접어두었던 작품 활동을 10년 만에 재개하는 해이기도 하다. 조운파씨는 최근 ‘사랑과 인생’을 써 데뷔 45주년을 맞은 가수 남진에게 부르게 했다. 또다른 작품 ‘나 이렇게 살겠소’는 정감인이 취입했다.‘나 이렇게 살겠소’는 모든 일에 감사하며 정직하게 살자는 노래. 지난 3월 2일 오후 조운파씨를 서울 서초동 사무실에서 만났다. 칠순(七旬)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그의 얼굴에선 세월의 티가 나지 않았다. 시심(詩心) 때문인가 신심(信心) 때문인가.
관련 자료를 찾는 과정에서 '얄개전'을 쓴 조흔파 선생과 많이 헷갈렸습니다. "(웃음) 많은 사람들이 혼동하죠. 조흔파 선생님은 살아계실 때 한번 뵈었는데 '좋은 노래 만들고 계시더군요. 그 영광을 제가 받고 있습니다'라고 하시데요. 나를 조흔파로 착각해 '그 사람 나이 90도 넘었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요."
작사가로 데뷔하기 전에 시인으로 활동하셨는데요.
"해군하사관으로 6년간 근무한 뒤 상경해 순수문학 동인회에 참여했습니다. 시를 쓰되 발표는 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우고 시화전을 주로 했습니다. 그때 필명이 운파였죠. 본명은 조대원인데…. 어느 날 박건호씨가 자기 시집을 들고 시화전을 찾아왔어요. 이후 박건호씨와 문학동인으로 친하게 지냈죠. 그런데 어느날부터 나보고 노랫말을 쓰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했어요. 당시 노랫말은 패배주의와 허무주의가 주조를 이루고 있을 때라 정부에서도 시인들이 노랫말 쓰는 데 참여해달라고 하는 분위기였죠. 얼마 뒤 박건호씨가 작사가로 변신해 '기다리게 해놓고'를 썼어요. 나는 '순수문학 하는 사람이 어떻게 대중가요를 쓸 수 있냐. 타락했다'며 호통을 쳤죠."
오아시스레코드사 문예부장으로 취직한 것도 박건호씨 덕분 아닙니까.
"여섯 살 아래인 박건호씨가 정말 끈질기게 저를 설득했어요. 1975년 결국 청계천 4가에 있는 오아시스레코드사 손진석 사장을 만나게 되었고 문예부장에 앉게 됩니다. 당시 제가 맡은 일은 공연윤리위원회 심의에서 퇴짜 맞은 음반의 가사를 고쳐 통과시키는 일이었죠."
우리나라 가요계에는 작곡-작사 콤비가 있다. 박춘석-정두수, 박시춘-반야월이 가요사(史)를 풍미해온 명콤비. 시인에서 작사가로 변신한 조운파는 오아시스레코드사에서 작곡가 임종수를 만났다. 1972년 '고향역'을 히트시키며 유명작곡가 반열에 오른 임종수였다.
"손진석 사장이 8교실에 가보라고 해요. 8교실로 갔더니 눈이 쪼끄마한 사람이 앉아 있어요. '고향역'의 작곡가 임종수씨였죠. 그 후로 사귀어보니 사람이 진국이었습니다."
임종수-조운파 콤비를 대중에 알린 첫 번째 작품이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였지요.
"임종수 작곡가에게 작품 중 10곡만 달라고 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이대로 영원히'였지요. 임종수씨가 고생만 하는 착한 아내를 생각하며 쓴 노래였는데 다른 가수가 불렀지만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어요. 노래를 들어보니 멜로디가 기가 막히게 좋았어요. 그래서 가사를 떼어내고 새로 노랫말을 붙였습니다. 이미 곡이 있는 상태에서 노랫말을 써야 했기에 정말 힘들었어요. 단 한 글자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으니까요."
1976년이면 여성차별과 아내의 희생이 당연시되던 시절입니다. 당시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의 노랫말은 놀라웠습니다.
"내 어머니가 모델이었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욕창으로 고생하는 시어머니를 13년간 극진하게 모신 분입니다. 효부상도 받으셨지요. 어릴 적 우리 어머니는 늘 손이 젖어있었어요. 참는 데 도사셨지요. 어머니를 통해 아내에 대한 생각을 다시 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작사를 했습니다. 일종의 사모곡(思母曲)이었죠. 기획사 연습생이었던 하수영에게 곡을 줘 크게 히트했어요."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는 후폭풍도 컸죠.
"당시 신문 사회면 기사에 술집 장사가 안 된다는 얘기가 실리곤 했죠. 남자들이 술 먹으러 가다가 이 노래가 나오면 곧바로 집으로 돌아온다는….(웃음)"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로 그는 1977년 반야월 작사상을 받았다. 1980년에는 MBC 가요반세기 부문별(가수·곡·노랫말) 최고에 선정됐다. 가수는 배호, 곡은 '이별의 부산정거장', 노랫말은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였다.
1976년에 만든 노래 중에 '고향 여자'라는 노래가 있었죠? 미국서 돌아온 태진아가 1989년에 부른 '옥경이'가 원래 '고향 여자'였다죠.
"가까운 제 친구가 실제 겪었던 일입니다. 그 친구가 서대문 근처의 '살롱' 간판을 단 허름한 술집에 갔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호스티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는데 여자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아 화를 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여자가 어릴 적 동네서 신랑각시 놀이하던 소꿉친구였답니다. 여자가 짙은 화장을 하고 있으니 금방 못 알아본 거지요. 친구는 나중에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친구의 얘기를 전해 듣고 가슴이 아파서 그날 밤으로 노랫말을 지었죠. '희미한 불빛 아래 마주 앉은 당신은 언젠가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인데…'로 시작하는 노래의 제목은 '고향 여자'였습니다."
1970년대 산업화의 물결 속에서 가난한 집 딸들의 희생이 가장 컸습니다. 돈 벌러 서울로 와 공장에 취직했고 그중 일부는 잘 안 풀려서 술집에 나가는 경우도 있었지요.
"1970년대 시골의 가난한 집 자식들은 돈 벌러 서울로 왔지요. 누이들은 공장을 다니다 일부는 다방으로 빠졌고 또 그중 일부는 술집으로 흘러 들어갔지요. 남자들도 비슷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산업화 과정에서 빚어졌던 가슴 아픈 이야기를 바탕으로 쓴 거지요. 나중에 태진아가 부를 때 제목을 '옥경이'로 한 것은 경제활동을 하는 능동적이고 똑똑한 여성의 상징으로 이름을 그렇게 붙인 겁니다."
‘고향 여자’는 1981년 나훈아에게 주었는데 나훈아가 불러보기만 하고 정작 취입하지 않았다고 들었습니다. 나훈아가 취입했다면 그렇게 히트했을까요.
“글쎄 그건 잘 모르겠어요. 사실 나훈아가 놓친 노래가 많아요. 태진아가 적절하게 표현했다고 봅니다. ‘옥경이’는 만들어진 필링이 아닌, 소리 자체에서 나오는 필링으로 표현하는 노래죠. 태진아가 미국에서 고생하다 돌아와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옥경이’를 자기 이야기로 풀어내 성공한 거죠.”
주병선이 불러서 히트한 '칠갑산'에도 특별한 사연이 있지요.
"내 정서 속에 산은 칠갑산이 전부였습니다. 고향 은산에서 보이는 산이 청양의 칠갑산이었으니까요. 당시 서울에서 변변한 직업이 없던 나는 버스를 타고 7시간 걸려 은산 집에 내려가곤 했습니다. 집에 가져갈 것도, 집에서 가져올 것도 없었지요.
어느 날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는 데 부슬비가 내리는 차창 밖으로 칠갑산이 보여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때 '칠갑산'의 영감을 얻었습니다. 칠갑산은 영토를, 콩은 강인한 민족성을 각각 상징합니다. 콩은 가물지만 않으면 산비탈에서도 잘 자라잖아요. 콩을 심을 땐 구덩이에 세 알을 집어넣습니다. 벌레 먹을 거, 새 먹을 거, 그리고 사람 먹을 거. 당시 가난한 집에서는 식구(食口) 수를 줄이려고 부잣집에 딸을 민며느리로 보내는 일이 있었습니다. 한국인의 삶 속에 있는 정(情)과 한(恨)을 '칠갑산'에 녹여낸 것이죠."
작사가로 시작해서 나중에 작곡도 병행하게 되었는데요. '칠갑산'은 작사·작곡한 첫 번째 노래지요.
"은산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 소사에게 알밤과 생선을 갖다 주면 몰래 풍금을 쳐보게 했어요. 그게 처음 악기와 접한 거였죠. 그때 어렴풋하게 음(音)에 소질이 있다는 걸 알았지요. 나중에 군대 가서 기타를 독학으로 배웠고요. 근데 작사가로 활동하면서 가사는 시적(詩的)으로 썼는데 멜로디는 뽕짝으로 나와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죠. 1970년대 후반 3년간 당시 엄기돈 MBC 라디오악단장께 작곡을 배웠습니다. 비로소 내 가사를 나만의 멜로디로 표현할 수 있게 되었지요."
조운파 작사·작곡의 대표적 작품은 '나를 두고 가려무나' '백지로 보낸 편지' '날개' '칠갑산' '바람부는 세상' '도로남' 등이다. '나를 두고 가려무나'는 화상 입은 가수 김동아가 불러 히트했다.
최진희가 1980년에 부른 '어머니'는 가수가 하도 울어서 취입하는 데 애를 먹었다고 하는데.
"고향 삼월리라는 동네에 밭과 산이 있었죠. 장마비가 그친 어느 날 개울 징검다리를 건너 삼월리 산에 어머니를 모시고 일하러 갔습니다. 몇 시간 뒤 돌아오는데 개울물이 불어 징검다리가 잠겼어요. 제가 '어머니 업어드릴게요'라고 말했더니 어머니께서 '무거울 턴디' 하셨어요. 나는 정말 어머니가 무거울 줄로 알았습니다. 근데 어머니를 업는 순간 너무 가벼운 거야. 그때 실망, 자책, 원망, 죄송함, 서러움 등이 걷잡을 수 없이 몰아쳤죠. 등에서 전해져 오는 어머니의 온기, 깊은 바다를 품고 있는 어머니의 정을 그리고 싶었어요. 그 감정을 노랫말로 썼고 임종수씨가 작곡했죠. 최진희가 한 번에 취입 못하고 여러 날 지난 뒤에 겨우 취입했죠."
무명가수에게 히트곡을 많이 준 것으로 유명합니다.
"유명 가수 중에는 교만에 빠져 있어 '반주를 넣어 와라' '곡이 수십 곡 쌓여있다' 등의 반응을 보이는 사람도 많았죠. 또 자기 성향에 곡을 맞추려는 경향이 있었어요. 그래서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한, 실력 있는 가수에게만 노래를 줬죠. 하수영, 주병선, 태진아 등이 그런 경우였죠."
노랫말과 멜로디의 토속적인 서정성은 어디서 발원한다고 보십니까.
"어릴 적 아버지 따라 산도 넘고 고개도 넘었죠. 또 개울에서 물장구 치며 놀았고 나무 하러 산과 언덕을 다녔습니다. 고향의 땅과 자연이 정서를 만들어줬습니다. 또한 풍요롭지는 않았지만 가족의 삶을 통해 눈물, 사랑, 아픔, 지혜 등을 배웠다고 봅니다. 여기에 문학적 훈련을 통해 시어(詩語)를 다루는 법을 배웠고요."
작품이 1200편이 넘는데 히트곡의 저작권료만으로도 생활에는 문제가 없겠죠. "히트곡만 30여곡이 되는데 저작권료만으로 생활이 됩니다. 일본과 비교해 금액은 10분의 1밖에 되지 않지만…."
'사랑의 교회' 선교사로 활동 중인데 10년 만에 활동을 재개하는 감회와 소감을 듣고 싶습니다. "옛날과는 노래를 만드는 목적이 다릅니다. 노래를 통해 소외 받고 쓰러진 이를 위로하고 희망을 주고 싶어요. 노래를 통해 인생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