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다가 우리나라는 망했으며, 아편전쟁 이후로 강대국인 중국은 몰락일로인데 반하여 3국 중에 가장 뒤떨어졌던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겪고 난 다음에 오늘날처럼 강력한 나라가 될 수 있었는가.'
원로사학자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은 자전적 회고록 《장정》에서 19세기 후반 한·중·일의 엇갈린 운명에 대한 관심이 자신을 역사학으로 이끌었다고 썼다.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한 나라, 한국은 완전 실패한 나라, 중국은 절반 실패한 나라라는 시각이 오랫동안 당연하게 받아들여진 게 사실이다. 이 책들은 한·중·일 3국이 개항부터 1910년, 1911년경까지 어떻게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됐는지를 비교한 '근대의 갈림길' 기획(전 4권) 중 일부다.
백영서 연세대 교수는 먼저 일본을 우등생으로, 한국을 열등생으로 매긴 성적표가 타당한 것인지 의문을 제기한다. 일본은 성공했는데, 중국과 한국은 실패했다는 설명방식은 19세기 패러다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한·중·일 3국이 개항과 근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이 어떻게 달랐고, 또 왜 상이한 결과를 가져왔는지는 여전히 관심거리다.
강진아 경북대 교수는 먼저 아편전쟁과 개항(開港)을 둘러싼 일본과 한국, 중국의 상반된 대응을 비교한다. 일본 막부 지도부는 1842년 아편전쟁에서 영국이 압도적 군사력으로 청나라를 눌렀고, 그 결과 영토 일부가 할양됐다는 정보를 정확하게 입수하면서 위기의식이 고양됐다. 막부는 서양 선박에 대한 적대 정책을 철회하고, 서양식 총 도입과 증기선 수입 등 개혁에 착수했다. 조선 정부도 아편전쟁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정보를 수집했으나, 영국의 압도적 우위와 청의 패전사실은 정확하게 전달되지 못했다. 정보의 자의적 해석과 낙관론으로 위기의식이 높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에는 정보를 입수한 통로가 달랐다는 해석이 유력하다. 조선은 전쟁정보를 연행사(燕行使)를 통해 얻었고, 연행사는 청의 패배를 중화의식에 맞춰 왜곡해서 전달하는 중국 관보(官報)에 주로 의존했다. 반면 일본은 영국 식민지 싱가포르의 영자(英字) 신문을 인용한 네덜란드 서적과 전투 지역과 가까운 동남지역 중국 상인들의 보고서를 종합해 사태를 파악했기 때문에, 전투의 실체를 보다 정확하게 알 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청나라 조정이 아편전쟁으로 영토를 할양하고, 영사재판권과 관세자주권을 내주는 불평등조약을 체결하면서도 전쟁의 패배를 심각한 위기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점도 거론된다. 강 교수는 중국이 정보가 없어서라기보다는,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하려는 태도가 사회지배층에게 없었다고 봐야 한다고 썼다.
중국의 양무(洋務)운동과 일본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화 개혁에 대한 비교는 흥미롭다. 중국이 국가 주도의 산업화를 밀고 나간 데 반해, 일본은 제도적으로 민간 투자를 장려하는 모델을 택했다. 중국에서는 양무파 관료들이 양무계 기업의 이윤확보를 위해 민간 기업의 설립을 불허하거나 독점시켰다. 철도의 경우, 청나라는 1876년 영국회사가 부설한 상해와 오송(吳淞) 간 철도를 운행했는데, 풍수에 안 맞는다는 등의 반대로 곧 철거됐다. 일본은 1872년 도쿄와 요코하마 간 철도를 영국의 기술원조를 받아 자력으로 부설한 이래, 1900년까지 총 연장 7000㎞의 철도가 놓였다. 개항 당시 중국 경제는 자력으로 근대화할 수 있는 조건을 갖췄으나 태평천국 진압 후 1870년대부터 상대적 안정을 누린 것이 도리어 위기의식을 약화시키면서 경영 혁신이나 근대적 기술 도입 같은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지 못했다는 설명이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부국강병을 달성한 일본이 침략 전쟁으로 자멸하고, 열강의 침략으로 만신창이가 된 중국이 침략국이라는 역사적 부담 없이 제3세계는 물론 세계 지도자 자리를 넘보는 것을 감안하면, 보다 긴 호흡으로 근대 100년을 성찰해야 한다는 저자들의 문제 제기는 타당하다. 세계 13위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한 대한민국의 성취를 놓고 봐도 그렇다. 조선과 일본의 근대를 각각 분석한 《근대와 식민의 서곡》(김동노 지음), 《천황제 근대국가의 탄생》(함동주 지음)도 함께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