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이 직무를 훌륭하게 수행하지 못하겠다면 난 단 1분도 함께 일할 수 없다."
지난 5일 아프가니스탄 난가르하르 주(州) 행정관들 모임. 커다란 체구에 험상궂게 생긴 굴 아가 시르자이(Shirzai) 주지사가 눈을 부릅뜨고 호통 쳤다. 시르자이는 1980~1990년대 아프가니스탄의 강력한 군벌로 군림했던 인물. 탈레반에게 쫓겨났다가 미국과 하미드 카르자이(Karzai) 현 대통령에 의해 2004년 이곳 주지사로 임명됐다.
23일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최근 미국 정부는 시르자이 같은 지방 군벌들에 주목하고 있다. 이들을 주지사로 임명해 지역 안정을 도모하고, 탈레반과의 대리 전쟁도 치르게 한다는 전략이다.
◆유능한 군벌들
시르자이가 난가르하르 주에 일으킨 변화를 보면 미국이 왜 중앙정부가 아니라 지방 군벌의 힘에 주목하는지 알 수 있다. 시르자이는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외세를 몰아내기 위해 무자헤딘(소련과 싸웠던 아프가니스탄의 무장게릴라 조직)에 가입했다. 시르자이는 1980년대 칸다하르 지역의 군벌로 성장했다.
소련이 물러간 후 칸다하르 주지사로 임명됐던 그는 1996년 탈레반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세력을 잃는다. 그가 돌아온 것은 2001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을 점령하면서다. 아프가니스탄 정부는 2004년 시르자이를 난가르하르의 주지사로 기용한다.
난가르하르는 그의 통치 아래서 변하기 시작한다. 도로가 닦이고, 학교와 의료 시설이 지어졌다. 탈레반의 주요 자금 공급처인 아편 생산도 현격히 줄었다. 폭력 사태는 지난해 17%가 감소했다.
미 정부는 시르자이 성공의 원인을 지역 부족들의 정서를 잘 이해하면서도 군벌 특유의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다른 군벌 출신의 활약도 돋보인다. 발크 지역의 군벌이자 현재 이 지역 주지사인 아타 모하메드 누르(Noor)는 아편 생산자를 철저히 단속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헤라트 지역의 군벌이던 이스마일 칸(Kahn)은 2004년 중앙 행정부의 관료로 임명됐다. 그러나 칸이 물러난 후 탈레반이 강성해지고 테러가 급증하자, 카르자이는 다시 칸을 헤라트 주지사로 보내는 방안을 강구하고 있다.
◆미국의 신뢰를 잃어가는 카르자이 정부
미 정부가 카르자이 정부에 점점 회의를 느끼고 있다는 점도 '군벌 활용'의 이유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부패와 무능에 실망한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총리직을 둬 카르자이의 권력을 제한할 계획이라고 보도했다. 중앙정부를 거치지 않고 지방으로 바로 외부 지원금이 전달되게 하는 방안도 논의 중이다. 지방이 중앙 군대와는 별도의 군사조직을 갖추도록 하는 계획도 추진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카르자이 정부의 지방 장악력이 더욱 느슨해지게 되고 군벌들은 합법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게 될 전망이다. 아프가니스탄 정부 관료들 사이에서는 느슨한 연방(聯邦) 체제가 아프가니스탄에 더 적합하다는 의견도 나온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