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는 새벽 5시쯤 일어나 평소처럼 '중국 시선(詩選)'을 읽고 아침을 든 뒤 휘호를 썼다. 이날은 일요일이었으나 공교롭게도 차가 딴 데 가 있어 교회엘 갈 수 없었다. 경교장엔 아들 김신의 장인 장모가 상해에서 와 머물고 있었다. 오전 11시30분쯤 안두희라는 포병 소위가 백범을 뵙겠다고 찾아왔다. 비서 선우진은 그를 2층으로 안내하고 백범의 점심을 준비하러 지하식당으로 내려갔다.

▶식모 아주머니가 "만둣국이 다 돼간다"고 하는 순간 위층이 떠들썩했다. 뛰어올라가 보니 안두희가 손에 45구경 권총을 든 채 고개를 숙이고 내려오고 있었다. 백범은 온 국민의 눈물 속에 갔지만 장례가 끝난 뒤 모든 게 달라졌다. 우선 경교장의 원주인 최창학 쪽에서 집을 비워달라 요구했다. 백범의 영정을 모실 곳조차 없어졌다. 이임하는 주한 중국대사가 보다 못해 자신이 살던 충정로 2가 집을 내줘 겨우 비를 피할 수 있었다.

▶선우진은 백범의 죽음이 자신이 잘못 모신 탓이라고 자책하며 평생을 백범 기리는 일에 바쳤다. 그는 1945년 1월 충칭(重慶)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백범을 만나 서거 때까지 백범의 마지막 4년 5개월을 수행비서로서 그림자처럼 모셨다. 1948년 4월 19일 남북연석회담에 참석하러 역사적 북행 길에 나서는 백범을 수행한 것도 그였다.

▶38선을 넘자 북한 경비병이 암호로 연락하는 소리가 들렸다. "갓이 하나요, 오이가 둘이요." '갓'은 백범을, '오이'는 선우진과 김신을 가리켰다. 몇 시간을 붙잡아만 놓고 소식이 없자 백범이 평소 못 보던 모습으로 벼락 호통을 쳤다. "이놈들 내가 공산당 지역에 들어왔다 해서 총칼로 두들겨 잡으면 모르거니와, 국사를 논하러 온 사람을 이렇게 대접할 수 있느냐."

▶선우진은 백범이 위대한 것은 독립운동가나 정치가로서 자기를 내세우기보다 범부(凡夫)를 자처하며 국민을 섬기고 절제한 데 있다고 했다. 백범이 지방을 순시할 때 지역에서 '환영 국부(國父) 김구 주석'이라는 플래카드를 내건 적이 있었다. 백범은 "국부는 한 나라에 한 분, 이승만 박사뿐이니 내 이름 앞 국부라는 말은 떼어내라"고 했다 한다. 스물넷에 일흔의 백범을 만나 모셨던 선우진씨가 그제 여든여덟으로 별세했다. 위인의 생애는 그가 이룩한 역사적 업적과 함께 주변 목격자의 증언을 통해서도 완성된다. 선우진씨와 같은 증언자를 뒀다는 것은 백범으로선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