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의정부에 사는 주부 김옥렬(55)씨는 지난 19일 뉴스를 보다 가슴이 덜컥 내려 앉았다.
산부인과에서 친자식이 바뀐 줄도 모른 채 16년간 지내다 병원 측 실수를 발견하고 법정 소송을 한 어느 부모의 이야기였다. 지난 19일 법원은 '뒤바뀐 자녀' 사건으론 처음으로 "부모의 정신적 충격에 대해 병원이 7000만원을 보상하라"는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병원이 신생아 정보 공개는 할 필요가 없다고 판결해 친딸을 찾지는 못하게 됐다.
김씨에게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그 부모의 아픔이 전해졌던 까닭은 김씨 자신이 바로 같은 실수의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1981년, 김씨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사건이 일어났다. 남편이 세살 배기 쌍둥이 민경이·민아 자매 가운데 민경이를 데리고 이발소에 간 것이 발단이 됐다. 이발소 직원은 민경이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이발소에 가끔 놀러 오는 친구 A씨의 딸 수연(가명)이와 생김새가 너무나 똑같았기 때문이다. 직원은 김씨 남편이 수연이를 유괴했다고 의심하고 따지게 됐다.
소동은 똑같이 생긴 아이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후 곧 해결됐지만, 그 뒤엔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더 큰 풍파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A씨가 기르는 수연이가 민경이의 '진짜' 쌍동이 여동생 민아라는 사실이었다.
같은 산부인과에서 이틀 차이로 각각 1.9㎏, 2㎏로 태어난 민아와 수연이가 함께 인큐베이터에 있다가 뒤바뀐 것이었다. 20일간의 실랑이 끝에 아이들은 각자 친부모에게 돌아왔다.
◆뒤바뀐 아이들, 그 후…
28년의 세월이 흐른 후, 중소기업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는 '진짜' 민아(30)씨는 미혼으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다. 너무 어린 나이에 겪은 일이라 민아씨는 당시 상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김씨는 그때의 아픔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낳은 정보다 기른 정' 때문일까. 김씨는 막상 친자식을 되돌려 받고 나서도 3년간 키웠던 수연이가 눈에서,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고 했다.
"처음엔 우리 민아한테 별로 정이 안 갔어요. '아, 그렇지. 얘가 내 친자식이란 말이지' 그 정도였죠. 반면에 수연인 정말 정이 듬뿍 들었어요. 걘 몸이 불편해서인지, 빨리 헤어질 줄 알고 그랬는지 바닥에 내려 놓기만 해도 울어댔으니 한시도 품에서 뗄 수 없었죠."
그 후 김씨는 몇 번인가 수연이가 친부모와 사는 집에 찾아가 봤다. 하지만 곧 연락이 끊어졌다. 수연이 친부모가 이혼한 후 이사를 가 버렸기 때문이다.
나중에 소문을 듣고 친부모가 9살까지 수연이를 키우다가 장애인 보호시설에 맡겼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가끔씩 신문에 나오는 것처럼 장애인들을 학대하는 열악한 곳일까 봐 걱정이 돼 여기 저기 물어서 그 시설을 찾아냈다. 주민등록까지 말소된 상황이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김씨는 "수연이가 환경이 좋은 곳에 있다는 걸 보고서야 마음이 놓이더라"고 했다. 지금도 김씨는 정기적으로 시설을 찾아가 한때 키웠던 딸을 만나고, 수연씨도 김씨를 '엄마'라고 따르며 자주 전화를 걸어온다.
◆지금은 뒤바뀔 가능성 희박
김씨는 16년 만에 친딸을 찾기 위해 소송까지 불사한 부모의 절박한 심정이 십분 이해가 된다고 했다. "부모가 친자식을 찾는다는데, 그 인연을 어떻게 끊겠어요. 그 집 엄마는 생살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 속에 살고 있을 텐데…."
그러나 아이들에게 사실을 공개하는 것에 대해서는 한 발 물러섰다. "저는 저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그냥 바뀐 아이를 그대로 키웠으면 좋겠어요. 이 다음에 아이들이 다 컸을 때, 그때 얘기를 해주고 선택하게 해도 되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김씨의 목소리는 의외로 단호했다.
"우리 애들은 어렸으니 그때 바꾼 게 맞는 결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10년 넘게 친부모인 줄 알고 살다가 '나는 네 친부모가 아니란다'라는 소리를 들으면 얼마나 놀라겠어요. 그 애들은 또 얼마나 힘들겠어요."
과거엔 간혹 민아씨 같은 사례가 생겼지만, 다행히도 이젠 이런 사례는 극히 드물다는 게 산부인과 의사들의 말이다. 아기가 태어나면 즉시 산모와 아기에게 동시에 부모 이름이 적힌 인식표를 부착하기 때문이다.
산부인과의사회 장석일 총무이사는 "인식표는 그냥 자르려면 잘리지 않고 퇴원할 때 산모와 아기를 확인한 후, 특수도구로 자르기 때문에 자녀가 바뀌는 착오가 생길 일이 없다"고 했다. 이 인식표는 약 10여년 전부터 종합병원은 물론 일반 개인병원에도 전부 보급돼 사용되는 상황이다.
지난 19일 7000만원 보상 판결이 내려진 사건은 부모가 바뀐 친딸을 찾기 위해 병원 측에 "당시의 분만 기록을 보여달라"고 요구했으나 병원이 응하지 않자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소송을 낸 어머니는 혹여 지금 기르고 있는 아이에게 상처가 될까봐 아무도 모르게 지난해 10월부터 송사를 진행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원고측 김제일 변호사는 "친딸도 못 찾고 길러온 아이도 잃을까 혼자서 끙끙 앓는 모습이 너무 안쓰럽다"며 "핏줄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란 신념으로 항소할 계획"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