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착하지, 여기 봐 여기~."
강병철 서울대병원 임상의학연구소 교수가 '원숭이 의자'에 앉은 '12번 원숭이'를 향해 동그란 포도알을 내밀었다. 원숭이가 갈색 눈을 크게 뜨며 포도를 날름 받아 먹었다. 원숭이의 입안에서 뿌드득뿌드득 포도씨 부서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지난 7월 20일 서울 혜화동 서울대병원 제1영장류센터의 집중관리실. 6㎡(약 2평) 남짓한 공간 한가운데에 하얀 면 재킷을 입은 12번 원숭이가 허리를 곧게 세운 채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의자는 원숭이의 허리와 어깨, 목을 곧게 받칠 수 있도록 3단 층으로 구성됐다. 쉴 새 없이 몸을 움직이는 원숭이를 잠시나마 가만히 붙잡아두기 위해 고안한 원숭이 전용 의자였다.
원숭이가 강 교수의 손에서 또 다시 포도알이 나오지 않을까 두리번거렸다. 강 교수는 손에 쥐고 있던 포도알 2개를 원숭이 입에 차례로 더 넣어준 뒤 원숭이의 등 뒤로 다가가 하얀 재킷을 살짝 들췄다. 재킷 안쪽에 붙은 투명한 두 개의 빈 튜브가 원숭이의 피부에 꽂혀있었다. 원숭이의 피를 뽑거나 식염수 등을 주입할 때 사용되는 튜브형 의료기구 카테터였다.
“이 재킷을 입은 지 이제 한 달 정도 돼가요. 튜브를 꽂은 건 2주일 정도 되고요. 갑자기 수술을 하겠다고 튜브를 꽂으면 원숭이가 너무 놀라기 때문에 이렇게 적응 기간을 두는 겁니다. 원숭이가 튜브를 뽑아 버릴 것에 대비해 재킷부터 입혀놓고 그 재킷과 튜브를 연결시켜 놓은 거예요.”
강 교수가 원숭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중국에서 태어나 지난 7월 초 한국에 온 6살짜리 이 암컷 원숭이 ‘12번’은 앞으로 서울대병원의 ‘당뇨병 치료 이종장기 이식’ 연구에 사용될 예정이다. 무균 미니돼지의 췌도(췌장소도·인슐린을 분비하는 조직)를 당뇨병 환자의 몸에 이식해 당뇨병의 근본 원인인 인슐린 부족 현상을 해소하는 ‘재생의학’의 결정판이다. 먼저 원숭이를 대상으로 이뤄지는 이 전(前)임상시험은 오는 2012년까지 이곳에서 진행된다.
차세대 BT(바이오기술) 성장 동력
영장류실험센터가 국내 최초로 문을 열면서 우리나라에도 본격적인 ‘영장류실험 시대’가 시작됐다. 지난 7월 3일 서울대병원은 특수생명자원센터 지하 1층과 구 간호대학 2층 등 총 780㎡(약 236평)에 이르는 ‘영장류실험센터’를 개소했다.
서울대병원 영장류실험센터의 설립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 의미가 깊다. 국내에서 이처럼 영장류를 집단적으로 모아놓고 전임상시험을 실시하게 된 건 처음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오창 국가영장류센터와 한국화학연구원 안전성평가연구소 등 2개 국가기관에서 전임상시험용 원숭이를 보유하고 있지만 대부분 번식과 사육·공급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의 원숭이 전임상시험은 지금까지 제약회사 등을 중심으로 개별적으로 이뤄져 왔다. ‘실험용 원숭이 번식장’인 중국에서 마리당 500만~600만원 안팎의 돈을 주고 수입해오거나, 중국 현지로 가 마리당 약 150만원을 주고 그곳에서 실험을 한 뒤 돌아와야 했다. 돈은 돈대로 들고 불편함도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번식과 사육, 시험이 모두 따로 돌아가다 보니 지속적인 의학 연구에도 걸림돌이 됐다.
서울대병원이 ‘영장류 집단 전임상시험 센터’ 건립에 전면적으로 나선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전임상시험용 원숭이의 번식과 사육, 실험을 모두 연계해 차세대 BT(바이오기술) 분야의 주요 성장 동력으로 만들겠다는 뜻이었다. 서울대병원 측은 정부에 이런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했고, 결국 서울대병원과 보건복지가족부가 ‘매칭펀드(공동자금출자)’ 형식으로 총 사업비 18억원을 들여 국내 첫 영장류실험센터를 세웠다.
동물실 안으로 들어가다
원숭이들이 사육되고 있는 제1영장류 센터인 특수생명자원센터 지하 1층에 들어서자 묘한 원숭이 사료 냄새가 훅 끼쳤다. 센터로 들어가는 계단 입구에서부터 원숭이들의 ‘끽~끽~’ 하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제1센터는 영장류사육실(동물실) 3개와 무균수술실 2개, 임상검사실과 청정준비실, 행동관찰실 등으로 운영되고 있다. 전임상시험에 쓰일 붉은털원숭이(Rhesus monkey) 40여마리가 모두 이곳 동물실 3개에 나뉘어 사육되고 있다. 구 간호대학 건물 2층에 있는 제2센터는 실험실 7개와 부검실, 세포배양실, 미생물검사실 등이 운영되며 현재 공사가 진행 중이다.
동물실로 들어서기 전, 기자는 청정준비실에서 소독복과 멸균마스크, 수술용 모자와 덧신, 의료용 장갑으로 ‘완전 무장’을 했다. 동물실과 멸균수술실로 들어가기 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강병철 교수는 “원숭이들이 아직까지 사람과 친숙하지 못해 침을 뱉거나 흥분을 할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고 말했다.
이곳의 환경은 중앙통제실에서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다. 전임상시험에 쓰일 원숭이는 완벽한 ‘무균’ 상태에서 건강하게 자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질병을 유도하거나 거부 반응을 체크할 때 정확한 시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이곳은 항상 23도 안팎의 온도를 유지하고 있고, 습도 50%, 950lux의 조도(조명 강도), 60데시벨 이하의 소음으로 통제된다. 하루에 두 번 총 5㎏의 무균 사료가 동물실 안으로 배달된다.
만약의 사고에 대비해 각 방엔 CCTV가 설치돼 원숭이들의 행동을 실시간 모니터링한다. 또 인간과 원숭이 사이에 옮길 수 있는 인수공통전염병(에이즈·에볼라 등)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도 취해진다. 사육·실험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오폐수와 배기가스를 필터링하고, 반입되는 모든 물품을 소독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방 사이에서 발생하는 교차 공기오염을 막기 위해 문을 이중으로 설치해 동시에 열지 못하게 했다.
12번 원숭이가 있던 3번 동물실 안은 16개의 실험동물 규격 우리(cage)가 2층으로 놓여있었다. 가로·세로 80㎝, 높이 1m의 이 우리 안에서 원숭이들은 ‘끽~끽~’ 소리를 지르고 재주 넘기를 하며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강병철 교수는 “40여마리 가운데 4번 원숭이와 12번 원숭이가 당뇨병 이종장기 실험에 쓰일 예정”이라고 말했다. 실제 4번과 12번 원숭이만 췌도 이식에 대비해 카테터 튜브를 꽂은 흰색 재킷을 입고 있었다.
미래 의술은 ‘재생의학’
영장류실험센터가 세워진 근본적인 이유는 딱 하나다. 질병을 치료하는 신약 개발에 있어 동물실험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특히 원숭이는 사람과 가까운 영장류이기 때문에 신약의 효능과 안전성을 판단하는 가장 적합한 동물로 평가 받는다. 반드시 비설치류 동물에서 1종을 골라 실험을 해야 한다고 규정한 안전성 전임상시험에선 원숭이가 선호된다.
박정규 영장류센터장(서울대 의대 교수)은 “앞으로 생명공학과 의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은 ‘재생의학(Regeneration Medicine)’이 될 것”이라며 “우리가 원숭이를 통해 실시할 전임상시험의 핵심도 이종장기이식과 이종각막이식, 이종심장판막이식 등 세포·조직대체치료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재생의학’이란 질병으로 손상된 세포나 조직을 아예 건강한 것으로 바꿔 근본적인 질병 치료를 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말한다. 기존 의학에선 약물이나 외과적 수술을 통해서만 질병 치료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 세포나 조직으로 분화 가능한 줄기세포의 중요성이 널리 알려지면서 의학계도 ‘근본적인 치료 혁신’을 꿈꾸기 시작했다.
이곳 영장류센터에서 이뤄지는 원숭이 실험도 ‘재생의학’이 실현되기 직전 실시되는 전임상시험의 일환이다. 박정규 교수는 “사람과 사람 간의 장기 이식이 가장 안전하지만 사람 간의 장기이식엔 수적인 한계와 윤리적인 문제까지 복잡하게 얽혀있다”며 “이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게 무균 미니돼지의 장기 등을 사람에 이식해 질병을 치료하는 ‘이종장기’ 치료법”이라고 말했다.
4번과 12번 원숭이도 조만간 당뇨병을 유발하는 약물을 주입 받게 될 예정이다. 당뇨병에 걸린 원숭이들의 식후 혈당 수치는 정상 원숭이의 1.5배인 200㎎/㎗ 이상이다. 의료진들은 제1영장류센터 1층에서 사는 약 60여마리 무균 미니돼지의 췌도를 추출해 이들 당뇨병 원숭이에게 이식한 뒤 당뇨병 치료 효능 추이를 지켜보게 된다.
일부 동물애호단체선 반대 목소리
하지만 일부 동물애호단체들의 반발은 적지 않은 부담이다. 개소식 이후 일부 동물애호가들이 이곳 영장류실험센터 앞에 모여 산발적인 시위를 벌인다고 했다. 아직까지 영장류실험이란 개념이 생소한 우리나라에선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 강병철 교수는 지적했다.
“원숭이 실험이라고 하면 많은 분들이 편견부터 갖습니다. 쥐는 써도 되는데 사람과 비슷한 원숭이만큼은 안 된다는 거죠. 하지만 이것도 결국 하등동물과 고등동물을 구분해 차별을 두는 인간의 이기적인 생각이 반영된 거 아닐까요. 동물실험을 ‘최소화’하는 방안을 생각해야지, 무작정 반대하기만 해선 아무런 발전도 기대할 수 없는 게 의학의 현실입니다. 참 어렵고 철학적인 문제지요….”
실제 서울대병원에선 지난해부터 실험동물 윤리와 관련된 교육을 9시간 이상 이수하지 않은 사람은 동물실험에 일절 참여할 수 없도록 하는 규정을 만들었다. 이곳 영장류실험센터 역시 마찬가지다. 동물실험의 이른바 ‘3대 원칙(3R 원칙)’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다.
“동물실험을 하기 전 다른 대체 방법이 있는지(대체·Replacement), 동물의 희생을 최소화할 수 있는지(축소·Reduction), 실험동물의 고통을 최소화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실험할 수 있는지(정제·Refinement)의 원칙을 살피는 거죠. 지난해 2월엔 우리나라 최초로 ‘실험동물에 관한 법’이 생기는 등 동물윤리에 대한 논의도 활발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첫 영장류실험센터에선 2012년까지 원숭이를 대상으로 하는 전임상시험을 마치고, 2013년부터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이종장기 임상시험에 들어갈 계획이다. 이종장기 치료 등이 실용화되는 시기는 일단 2017년으로 잡고 있다.
박정규 교수는 “나중엔 실험용 원숭이들이 마음껏 뛰어 노는 놀이터도 만들고, 연구원들이 부담 없이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는 환경도 만들어주고 싶다”며 “하지만 무엇보다 영장류실험에 대한 정부와 일반의 편견부터 불식시켜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 의학 발전에 새로운 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새로 개발한 약을 사람에게 사용하기 전에 여러 종류의 동물에게 사용해 부작용과 독성, 유효성 등의 문제를 알아보는 시험. 임상시험에 사용할 제제에 대한 연구를 병행해 약의 형태와 처방 등을 결정한다.
신약이 개발되는 과정은 크게 △물리·화학시험 △전임상시험(효능시험·안전성시험) △임상시험 3단계를 거친다. 신약에 필요한 화학 약제(藥劑)가 최초 1만개에서 시작했다면 약제의 기능을 테스트하는 효능시험에선 약 200개의 약제로 걸러진다.
효능시험 대상엔 실험용 쥐나 토끼, 개 등 제약이 없다. 쥐 실험만으로 끝날 수도 있고 그 이상 할 수도 있다. 효능시험을 거친 약제는 안전성 시험 단계에서 약 10~20개로 추려지는데 여기선 반드시 설치류와 비설치류에서 각각 1종의 동물을 선택해 실시해야 한다. 이때 비설치류 종으로 흔히 선택되는 동물이 개 또는 원숭이다. 안전성 시험을 거쳐 약제가 5~10개로 압축되면 사람을 대상으로 임상시험이 실시된다. 임상시험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1단계 임상시험, 환자를 대상으로 2단계 임상시험, 부작용과 위험을 비교·판단하는 3단계 임상시험으로 이뤄진다. 이런 모든 과정을 거쳐 효능과 안전성이 최종 인정되면 신약이 판매된다. 여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무려 10여년 정도다.
미국과 일본이 가장 선두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미국은 1960년대부터 국가 주도로 8개의 영장류실험센터를 만들었다. 한 센터에 수용된 원숭이 수만도 2500~4000마리에 이른다. 이밖에 대학 의대를 중심으로 세워진 중소 규모 영장류센터는 100개 이상이다. 영장류 사육부터 보급, 전임상시험 등 모든 연구 인프라가 갖춰져 있다.
일본도 1960년대 말부터 본격적으로 영장류센터 구축에 나섰다. 국가 영장류센터는 2개 정도지만 중소규모의 영장류센터는 전국적으로 34곳에 이른다. 미국처럼 일본 영장류센터에서도 원숭이 사육과 보급, 실험이 가능하다. 이밖에 독일에도 국가 영장류센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