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스타들은 명성만큼이나 치열한 승부를 치러 왔다. 그 속에서 그들은 승리의 포효도 했고, 헤어날 수 없는 절망의 나락에서 신음도 했다. 냉혹한 승부의 세계를 누벼 온 스타들은 과연 어떤 순간을 가장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들로부터 가슴 깊이 간직한 추억을 들어본다.
적어도 차범근에 대해서 만큼은 '최고'라는 데 이론이 없다. 아시아 최고의 축구영웅으로 불러 손색이 없다. 세계가 인정하는 분데스리가 기록이 그 사실을 든든히 입증한다. 그에게도 배고픈 시절이 있었고, 자칫 곁길로 샐 뻔한 고비도 있었다. 물론 그러한 위기들이 더욱 강하고 크게 성장하는 거름이 되긴 했지만. 차범근은 늘 깔끔하고 세련된 이미지다. 그래서 그가 털어놓는 어릴 적 산골 얘기는 더 정감이 있다.
축구 하려고 서울 영도중학교에 들어갔는데 유니폼 입기도 전에 팀이 해체됐다.
그 바람에 팔자에도 없는 필드하키 선수가 됐다. 공도 못 차면서 영등포까지 그 먼 길을 통학하려니 속이 아플 수밖에. 새벽에 나가 밤늦게 귀가하는 게 고역이었다.
죽어도 공을 차고 싶어 집에 전학 얘기를 꺼냈다. 당시에는 전학하는 데 적잖은 돈이 들었다. 아들의 운동정신과 근성을 간파한 가난한 농사꾼 아버지는 삶의 터전인 땅을 쪼개 팔았다.
2학년 2학기 때 경신중학교로 옮겼고, 비지땀을 쏟은 결과 기량이 크게 늘었으나 경신고 진학 대상에서는 제외되고 말았다. 눈물을 머금고 경성고로 방향을 틀었다.
한데 뒤늦게 이 사실을 안 경신고 교장선생님이 난리를 쳤고, 경성고 입학시험 치는 날 감독과 선배들이 들이닥쳐 경신고로 다시 진로를 돌려놨다.
이 과정에서 경신고 선배들이 대놓고 으르렁거렸다. 후배 잘못은 아니지만 귀한 대접받는 햇병아리가 거슬렸던 게다.
운동부 군기가 군대 뺨치던 시절. 겁에 질려 순간 엉뚱한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선배들 구타가 너무 두려워 가출했습니다. 서울 친구 집에 일주일을 숨어 있었어요. 근데 친구는 학교 가고 저는 집에 있으니 친구 어머니 눈치가 보여 더는 못 있겠더라고요."
땅 팔아 전학까지 시켜줬는데 가출을 했으니 아버지에겐 다시 없는 불효였다. 결국, 큰형에게 연락해 집으로 내려갔고, 아버지 손에 이끌려 경신고 장운수 감독 손에 넘겨졌다.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렸다. 장 감독이 축구부 선배들에게 "범근이 손대면 혼내주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방어막을 쳐준 것이다.
만에 하나 삐끗했더라면 그저 그런 하키선수가 됐거나, 가출 청소년이 될 뻔했다. 그랬으면 대한민국은 축구영웅을 갖지 못했을 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