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진열장 안에 놓인 황색 양탄자는 바라만 봐도 폭신한 촉감이 느껴졌다. 큼지막한 중앙의 꽃문양은 단순한 듯 정교하고, 소박한 듯 화려하다. 쪽빛 꽃술을 겹겹의 원으로 둘러싼 분홍 꽃잎은 활짝 핀 꽃을 위에서 내려다본 듯 퍼져 나가고, 그 둘레를 다시 측면에서 바라본 꽃잎 8개가 둥글게 감싸고 있다. 네 개의 모서리에는 작은 구름무늬와 또 다른 꽃잎을, 맨 위와 아래의 중앙에는 쪽빛 꽃잎을 포도알처럼 주렁주렁 그려넣었다.
1300년 전 신라의 장인이 만든 화전(花氈·꽃무늬가 장식된 양탄자)이 귀족 같은 자태로 일본 관람객을 맞고 있었다. 23일 일본 나라(奈良)현 나라국립박물관 신관에서 개막한 '제61회 쇼소인(正倉院) 특별전'. 일본 왕실의 유물창고인 도다이지(東大寺) 쇼소인이 소장한 일본 최고의 보물들에서 골라 매년 가을 20일만 공개하는 전시회다. 올해는 특히 아키히토(明仁) 일왕의 즉위 20주년을 맞아 엄선된 대표유물 66점이 창고 바깥으로 나왔다.
페르시아의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자단목(紫檀木) 비파, 고묘(光明) 왕후가 중국 왕희지체로 쓴 악의론(樂毅論), 쇼무(聖武) 왕의 애장품이었던 허리띠와 허리띠에 달렸던 장식칼, 흰색 나전과 붉은색 호박으로 문양을 넣은 평나전거울(平螺鈿鏡), 뿔 달린 사슴 문양이 장식된 금은화반(金銀花盤·일부 문양을 금으로 도금한 은제 그릇)….
8~9세기 로마·중앙아시아·중국·신라 등 실크로드를 통해 교류된 희귀 유물들이 두 개의 전시실을 가득 채웠다. 유물 중에서도 특히 관람객들의 발길을 붙잡은 것은 제1전시실 입구에 놓인 신라의 양탄자였다. 쇼소인에는 모전(毛氈·신라산 양탄자)이 45점 소장돼 있는데, 단색의 모전인 색전(色氈) 14점, 꽃무늬가 그려진 화전(花氈)이 31점 있다.
쇼소인 모전은 중국 서북부에서 만들어진 것이 신라를 경유해 일본에 전해졌다는 주장이 있었다. 하지만 재일교포 2세인 이성시 일본 와세다대 교수는 1996년 "쇼소인 모전 중 2점에 제작 날짜와 장소, 만든 이의 관등이 적혀 있는 꼬리표가 신라의 이두로 적혀 있다"고 밝혀냈다.
쇼소인에는 나라시대 일본과 인근 국가들의 유물 1만여점이 소장돼 있다. 원래 전국에서 징수한 공물 등을 보관하던 창고였지만, 세계 최대의 금동 불상을 도다이지에 건립한 쇼무왕이 수집했던 왕실 보물 컬렉션 600여점을 아내인 고묘 왕후가 도다이지에 헌납하면서 보물창고로 탈바꿈했다. 이후 귀족들의 봉납물, 사찰의 보물과 소장문서 등이 추가되면서 컬렉션이 늘어났다. 올해 쇼소인전은 11월 12일까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