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숙이 한국 여자농구의 대명사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 기간이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무려 10년이다. 그때는 정말 박찬숙 없이는 안 되는 줄 알았고, 실제로도 그랬다. 키 하나 큰 게 전부였던 그녀는 각고의 노력으로 세계적인 농구선수 반열에 올랐고, 더불어 한국 여자농구도 꽃을 피웠다. 79년 한국 세계선수권 준우승, 83년 브라질 세계선수권 5위, 78년 이후 아시아선수권 6연패, 84년 LA올림픽 은메달.... 가히 절정기였다. 그 엄청난 행진도 박찬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에 토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운동 근처에도 안 가 본 그녀가 최고의 농구선수로 변신하는 동안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인기만큼 달콤-살벌했던 '러브레터'의 추억…




초등생땐 버스요금 안 낸다고 안내양과 실랑이

"안만나주면 죽겠다…결혼해달라" 스토커 고생

기자들이 뽑은 '미스월드 바스켓'…"꿈 같았죠"

 ▶키다리, 꺽다리, 사다리

어릴 때 참 순했다. 키만 멀쑥하게 컸지 지극히 내성적이라 수줍음을 많이 탔다. 키 말고 하나 더 도드라진 게 있었다면 손재주다. 뭘 주무르고 만드는 데 취미도 있었지만, 잘도 했다. "틈만 나면 동네 아이들 데려다가 씻기고, 머리 예쁘게 땋아 주고, 리본 달아주고 그랬어요. 물론 리본은 직접 만들었죠. 제가 생각해도 잘했어요." 가슴에 이름표, 손수건 달고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자기가 남들과 다르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 서울 숭인동 집 근처의 창신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입학식 날 운동장 맨 뒤에 서 있는데 친구들 머리가 새까맣게 다 보였어요. 그 기억이 지워지지가 않아요. 친구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었던 것 같아요."

열다섯 개 반에 오후반까지 운영할 정도로 학생 수가 많았지만, 키로는 견줄 친구가 없었다. 놀림거리가 된 건 당연지사. 학교만 갔다 하면 '키다리', '꺽다리' 하며 놀려댔다.

공부도 곧잘 해 뭐든 자신 있었지만, 키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 아니었다. 혼자 울기도 많이 울었다.

5학년 2학기 때 이미 1m70이었으니 짓궂은 사내 녀석들이 표적으로 삼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고민 끝에 하루는 엄마와 마주 앉았다. "학교 가기 싫어. 애들이 자꾸 놀려." 어머니는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이내 목청을 돋우며 딸을 감쌌다. "아니, 어떤 녀석들이야. 어떤 녀석들이 우리 딸을 놀리고 그래, 응?" 육상선수 출신인 어머니는 1m80에 100㎏이었다.

 ▶엉겁결에 잡은 농구공

한창 클 때는 잠을 못 잤다. 만날 떨어지는 꿈을 꾸며 극도의 공포에 시달렸다.

건물에서 떨어지고, 청룡열차 타고 바닥으로 내리꽂히고, 그러다가 소리지르며 벌떡 일어나고.... 오죽했으면 어머니가 머리맡에 칼을 다 놓아두셨을까.

5학년 2학기에 반장이 됐다. 선생님은 공부 잘하고, 손끝 매운 반장에게 이것저것 많이 시켰다.

수업 끝나면 선생님이 아이들을 교문까지 바래다주는 것으로 일과가 마무리됐는데 그 배웅까지 반장의 몫이 됐다.

한데 일단 교실 밖으로 나갔다 하면 혼란이 일었다. 선배건, 후배건 만나는 아이마다 공손하게 인사했고, 선생님들조차도 수시로 착각을 일으켰다.

"아동복이 맞는 게 없어서 어른 옷을 입었어요. 코트도 어른 것을 입었으니 맵시가 장난 아니었죠. 딱 봐도 선생님이었다니까요."

낭중지추라 했던가. "물건 하나 나왔다"며 운동부 선생님들 사이에 소문이 돌기 시작하더니 다른 학교 선생님들이 하나 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어느 날 선생님이 부르시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너한테 이상한 선생님이 찾아오실 거야. 아마 운동하라고 하지 싶은데...."

너무 뜻밖이라 듣고 흘렸다. "당연히 안 하죠. 제가 무슨 운동을 해요. 걱정마세요"하며 되레 안색 안 좋은 선생님을 위로했다. 과연 이상한 선생님이 찾아왔고, 운동 얘기를 채 꺼내기도 전에 고개부터 저었다. 그 후로 한동안 운동 얘기는 잊고 지냈다.

하루는 부모님께서 부르시더니 대뜸 "찬숙아, 한번 해 봐라" 하셨다. "뭘요"하고 되물었더니 "농구" 하셨다.

코흘리개 때부터 부모님 말씀 거역해 본 적 없는 효녀였다. 아무 생각도 고민도 없이 그 자리서 "네, 해 볼게요" 했다. 그 이상한 선생님이 하굣길에 뒤를 밟아 집을 알아 뒀다가 부모님을 설득한 것이다.

상상도 못 했던, 말도 안 되는 운동은 그렇게 시작하게 됐다.


▶얄미운 안내양 언니



"그 이상한 선생님이 계신 숭의초등학교로 전학부터 했습니다. 동대문 촌놈이 남산의 사립학교로 진출한 거죠. 창신에는 농구부가 없었거든요."

전학하자마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학교는 파했는데 집에를 보내지 않는 것이었다. 부모님께 얘기했다며 농구부 6학년 언니네로 가 있으라고만 했다. 언니네는 남산 밑에 있었는데 온 가족이 과하다 싶을 만큼 친절하게 대해 줬다. 영문도 모른 채 한동안 그 집에서 학교를 다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스카우트 전쟁에 휘말렸던 것이다. 소문을 들은 전국의 농구 감독들이 숭인동 집으로, 창신초등학교로 몰려들어 뒷북을 두들겨댄 것이다. 분위기가 과열되자 이미 전학까지 시킨 숭의초등학교도 마음을 놓지 못했다. 행여 부모님이 다른 학교의 설득에 넘어갈까 봐 집에도 안 보내고 특별관리를 한 것이다. 키만 컸지 농구공은 구경도 못했는데도 그 난리들이었다.

부자들만 다닌다는 사립학교는 이래저래 많이 달랐다. 스쿨버스도 운행했고, 교복도 입혔다. 마크가 찍힌 가방도 있었다. 학교 갈 때는 스쿨버스를 탔지만, 집에 갈 때는 시내버스를 탔다. 운동 마치는 시간이면 스쿨버스 운행이 벌써 끝나 있었기에.

거기서 문제가 생겼다. 요금을 낼 때마다 안내양 언니가 딴죽을 걸었다. 다 큰 게 어린이 요금 낸다고. 하기야 자기보다 한 뼘이나 큰 아가씨가 반쪽 요금을 내니 기가 막혔으리라. 초등학생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좀처럼 믿어주지를 않았다. 하물며 1m79까지 자란 6학년 때야 말해서 뭐할까. 싸우다 싸우다 운동가방과 학교가방 두 개 다 들고 다녔다.

"싸우기 싫어서도 그랬지만, 내심 숭의 마크가 찍힌 가방을 들고 다니는 게 자랑스럽기도 했어요. 그래서 일부러 더 들고 다녔죠."

▶최연소 대표선수 되다

숭의여중 3학년 말 국가대표 상비군(20명) 발탁에 이어 이듬해인 1975년 4월 7일 국가대표(12명)로 뽑혀 태릉선수촌에 들어갔다. 역대 최연소였다. 26~27세면 은퇴하던 시절인 데도 왕고참 유쾌선 언니와는 10년 차이였다. 당시 센터들의 키가 1m78~1m80 수준이었으니 1m88은 하늘이 내린 복덩이일 수밖에 없었다.

국가대표 초년병 시절은 눈물의 나날이었다. 태릉선수촌이라야 여인숙 수준이었고, 세탁기도 없어 손빨래를 해야 했다.

어디 없이 막내 신세야 다 그 모양이지만 어리다고 봐 주는 것도 없었다. 늘 양손에 주전자, 수건, 볼, 가방 등을 잔뜩 들고 다녀야 했다. 자기 빨래에, 감독 빨래까지 하며 온갖 잡심부름 하다 보면 24시간이 부족했다. 기량이 한참 떨어지니 입 내밀 처지도 아니었다.

힘들고 서러워 밤마다 담요 덮어쓰고 눈물로 일기를 썼다. 일기장 펴면 눈물부터 흘렀다. 글씨가 눈물에 번지기 일쑤였고, 울면서 잠든 날도 부지기수다.

"이건 아니구나 싶어 끝없이 갈등했습니다. 뛰쳐나갈까, 말까 하고요. 보모 형제에게도 얘기 못 하고 혼자 끙끙댔습니다."

인고의 세월 끝에 그해 9월 콜롬비아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해 두 가지를 수확했다.

하나는 깨달음이었다. 늘 자기가 제일 큰 줄 알고 살았는데, 세계무대에 나가 보니 2m는 기본이었다. 소련의 센터는 무려 2m20이나 됐다. 기가 팍 죽었다. 거기서 자만심이라는 적을 물리쳤다.

다른 하나는 '미스 월드 바스켓'이라는 상상도 못한 선물이다. 기자들 투표를 통해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농구선수로 선발된 것이다.

"너무 좋았는데 언니들 눈치가 보여 내색도 못 했어요. 언니들이 생뚱맞은 표정을 지으며 축하도 안 해 줬거든요."

▶팔공산 갓바위

어머니는 매사 지극정성이었다.

대표팀 연간 계획표가 나오면 어머니도 1년 계획을 짰다. 어머니 계획은 불공 계획이었다. 올림픽이나 세계선수권대회에 맞춰 100일 기도에 들어간다든가 하는 식이었다. 1년 내내 온갖 대회 다 치르고 다니니 어머니 불공도 1년 내내 계속됐다.

자식이 다치지 않고 잘 뛰게 해 달라고 전국 사찰을 돌며 무릎이 닳도록 빌었다.

100㎏ 깍짓동으로 끝도 없는 팔공산 갓바위 계단을 쉬지 않고 오르기도 했다. 딸이 땀 흘리는 만큼 흘려야 했고, 숨찬 만큼 숨이 차야 직성이 풀리는 분이었다.

말려도 소용없었다. 용돈 챙겨 드리면 부처님께 먼저 올리는 어머니였다.

아버지는 그림자처럼 조용히 따라다녔다. 늘 말없이 경기장에 와서 조용히 딸의 플레이를 지켜보며 마음으로 힘을 보탰다.

어느 날 경기를 마치고 집에 갔더니 아버지께서 어렵사리 입을 뗐다. "숙아, 조금만 더 빨리 뛸 수는 없니?" 순간 비위가 뒤틀려 불같이 아버지를 몰아세우고 말았다.

"그때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려요. 그 말이 왜 그렇게 듣기 싫어 반항 조로 들이받았는지 모르겠어요. 부모님은 가장 가까운 감독이자 코치이고, 그게 진짜 지적인데 제가 왜 성질을 부렸을까요."

지금은 두 분 다 안 계신다. 가끔 부여 선산을 찾아 애틋하게 옛일을 떠올릴 뿐이다.

▶팬과 스토커의 차이

팬레터는 원 없이 받았다. 태릉선수촌에 있으면 하루에 라면 박스로 한 박스씩 왔다. 학교에 가도 산더미였다. 다 읽어내지 못해 미안한 마음으로 골라 읽었다.

고달픈 국가대표 초년병 시절을 그렇게 편지 읽는 낙으로 보냈다. 주된 내용은 '예쁘다', '아름답다', '운동 열심히 해라'였다. 군인 아저씨들이 위문편지 받는 기분을 알 것 같았다.

태릉선수촌에서 훈련할 때였다. 토요일에 외출 나갔더니 버스 정류장에 아버지가 나와 계셨다. 한데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어떤 군인 녀석이 집으로 자꾸 찾아온다." 아버지 표정으로 봐 단순한 팬은 아닌 듯싶었다.

마침 그날도 그 군인이 찾아왔다. 아버지는 대문을 걸어잠근 채 타이르기 시작했다. 그랬더니 담을 넘어들어와서는 현관 문앞에 앉아 버티는 게 아닌가. "박찬숙이 안 만나 주면 안 가겠다"며. 설득도 하고, 사정도 하고, 야단도 치던 아버지가 더는 방법이 없자 경찰에 신고해 끌어냈다.

'안 만나 주면 자살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던 스토커도 있었다. 그는 태릉선수촌까지 찾아와 면회를 신청하기도 했다. 그때부터 바깥에 나갈 때마다 부모님이 따라다녔다. 짧은 거리도 택시를 탔다.

숭의여고 3학년 때 '결혼 안 해 주면 죽어버리겠다'고 버티던 고교생을 '명문대학에 합격하면 오라'고 타일러 보낸 사건은 애교 수준에 불과한 셈이다.












연습벌레의 하루
숭의여중 시절 새벽부터 자정까지 드리블 연습

 운동회 때마다 쥐구멍을 찾아야 했다. 허리춤에도 못 미치는 녀석들에게까지 밀려 꼴찌를 도맡았다.



뛰는 것도 뛰는 것이었지만, 우선 출발 총소리에 놀라 혼이 반쯤은 나갔다. 운동 얘기에 경기부터 일으키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한데 막상 농구를 시작하자 잠재해 있던 운동 본능이 나오기 시작했다. 하나를 가르치면 두 개를 깨쳤다. 게다가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고 시키는 건 다 했다.



6학년 때 어린이신문에 기사가 한 번 실리자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실력 발휘도 하기 전에 키 하나로 스타가 된 것이다. "처음엔 기분이 삼삼한 게 희한했죠. 근데 인터뷰가 반복되면서 끝도 없이 했던 얘기 또 하다 보니 너무 힘들더라고요. 기자들이 따라다니며 갖은 취조와 심문으로 얼마나 괴롭혔으면 '아무리 좋은 신랑감이 나타나도 기자라면 절대 결혼 안 하겠다'고 했을까요."



대신 숱한 관심 속에서 책임감이라는 걸 느꼈다. '잘해야겠구나. 실망시키면 큰일 나겠구나' 하는.



숭의여중 가면서 어금니 독하게 물었다. 매일 도시락 두 개씩 싸 갖고 새벽 5시 반에 집을 나섰다.



학교 체육관에서 1시간 반 동안 땀 흘리는 것으로 하루를 열었다. 볼 감각 익힌다고 불도 안 켜고 드리블 연습을 했다. 운동 끝나면 도시락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오후 단체훈련이 끝나면 저녁 먹고 운동부실에 가서 숙제하며 시간을 보냈다. 숭의여고 농구부 운동이 끝나면 밤 8~9시. 그때 체육관 불 다시 켜고 10시 반까지 또 개인훈련을 했다.



이사한 쌍문동 집 근처 버스 정류장에 내리면 어김없이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셨다.



어머니 팔짱 끼고 수다 떨며 집으로 가다 보면 통행금지 사이렌이 울었다. 밤 12시였다.



< 최재성 기자>











기적 같은 LA올림픽 은메달
올림픽 직전 무릎연골 파열

은퇴-복귀 고민하다 출전강행

 1983년 태릉선수촌에서 훈련하다 말고 털썩 주저앉았다.



오른무릎 연골이 파열했다는 끔찍한 검사 결과가 나왔다. 수술이 불가피했다. 운동선수야 다치기 예사라지만 하필 LA올림픽을 앞둔 시점이라 충격이 컸다.



"그런 부상 처음이었어요. 이젠 끝이구나 싶었죠. 그 와중에 '이번 기회에 그만두자'는 마음도 들더라고요. 많이 힘들었던가 봐요."



경희의료원 수술대에 올랐고, "기자 양반들 오셨는데 정신 차려야지~" 하는 어머니 목소리에 실눈을 떴을 때는 이미 병실이었다. 가장 먼저 반긴 건 카메라 플래시였다. 끝도 없이 터졌다. '아~, 박찬숙이는 아파서도 안 되는구나'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상처가 아물어 가면서 은퇴냐, 복귀냐를 두고 고민했다.



조승연 대표팀 감독이 그랬다. "어차피 본인이 해야 할 결정이지만, 사람은 시작과 끝이 멋져야 한다. 멋지게 은퇴해야 한다."



그 충고에 멋진 마무리를 다짐하며 코트에 복귀했고, 마침내 올림픽 무대에 섰다.



경기를 며칠 앞두고 우연히 첫 게임 상대인 캐나다의 감독과 주장을 만났다. 옆에 있던 조 감독이 "어떠냐, 준비는 됐냐"고 인사를 건넸다. 그랬더니 캐나다 감독이 "한국만 이기면 메달 딸 수 있다"고 받았다.



"거기서 자신감을 얻었어요. 용기도 얻고, 부담도 덜었어요. 사실 LA 가기 전부터 무척 두려웠거든요. 그런데 상대도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고, 박찬숙이를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니 한번 해보자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일단 캐나다를 잡았다.



문제는 중공. 진월방(2m7)과 정하이샤(2m4)가 버티는 중공은 가히 난공불락이었다. 1m88의 박찬숙이 막고 뚫기에는 누가 봐도 역부족이었다.



너무 고민한 탓일까. 경기 전날 중공과 경기하는 꿈을 다 꿨다.



"지는 상황은 아니었는데 무척 힘들게 게임을 하는 꿈이었어요. 밤새 시달렸죠. 그런데 막상 일어나니 몸이 가뿐하더라고요. 경기장 가서 몸 풀 때도 날개 단 듯 가벼웠어요. 경기가 시작됐을 때는 더 희한한 경험을 했습니다. 림이 엄청나게 커 보이고, 코트가 다 내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예요."



결국, 중공까지 잡았다. 지금도 자랑스러운 은메달 역사다.











우리 아이들은요...
대학생 딸 연예인 꿈, 중학생 아들은 축구선수

 선수보다 어려운 게 엄마 노릇이다.



외국어를 잘하는 딸(서효명)은 외교관이 되어 줬으면 했다. 하지만, 딸의 말마따나 그건 엄마의 꿈일 뿐이었다.



배우를 꿈꾸던 딸은 중학교 때부터 대학로 한 번 나가면 연예기획사 명함을 한 움큼씩 받아 왔다.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나 보다. 그리고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나 보다. 딸에게 열 번째 설득당하던 날 연예인의 길을 허락하고 말았다. 고작 '중간에 포기하면 끝이다'는 협박성 단서 하나 달았을 뿐이다.



딸은 세종대 연극영화학과에 진학했고, 지금은 EBS 오락프로 '생방송 톡톡 보니하니'에서 메인 MC 하니를 맡아 맹활약하고 있다.



아들 수원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작년 이맘때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갑자기 축구 하겠다고 바득바득 우겼다.



자식에게 고달픈 운동선수를 대물림하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그 피가 어디 가겠는가.



결국, 경신중학교 축구부에 들어가 GK 장갑을 꼈다. 손재주까지 엄마를 닮았다.



"정말 자식만큼은 맘대로 안 되더라고요. 이젠 그냥 뒷바라지 잘하면서 잘하기만 바랄 뿐이에요. 그래도 곧잘 하니까 좋긴 하네요."



< 최재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