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일본의 한국 침략정책에 서방 열강의 여론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한국 신문의 항일 논조가 침략에 큰 장애요소라는 사실도 깊이 깨달았다. 이토는 "나의 수백 마디 말보다도 한 줄의 신문기사가 한국인들에게 더 큰 위력을 지닌다"고 토로했을 정도였다.(재팬 크로니클, 1907.2.5.)
일본은 침략정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서구 열강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었기 때문에 대외홍보에 큰 비중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이토는 총리 재임 때인 1897년 3월 미쓰이·미쓰비시를 비롯한 일본 5대 기업체로 하여금 공동출자 형식으로 '재팬 타임스'를 창간케 하여 자신의 영어담당 개인비서였던 즈모토(頭本元貞)〈왼쪽 사진〉를 주필로 앉혔다. 즈모토의 영어실력은 영국 사람들도 "뛰어나다"고 칭찬할 정도였다.
이토는 통감이 되어 서울에 온 후 영어신문 '서울 프레스'〈오른쪽 사진〉를 발행하여 대외 선전기관으로 활용했다. '서울 프레스'는 원래 영국인 하지(J.W.Hodge)가 주간으로 창간했는데(1905.6.3. 창간), 통감부가 매수해서 1906년 12월 5일부터 일간으로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토는 총애하던 심복 즈모토를 서울로 불러 '서울 프레스' 사장에 앉히고 해외 홍보업무를 맡겼다. 즈모토가 사장에 취임하자 일본의 '재팬 타임스'는 "이제 서울은 사실과 진실에 입각한 신문을 가졌으며 이 신문은 질서와 평화를 위해 분투할 것"이라고 추켜세웠다.(재팬 타임스, 1906.12.10.)
즈모토는 서울 프레스와 재팬 타임스 두 신문이 편집과 경영 양면에서 긴밀한 협조관계를 갖도록 했다. 서울 프레스 1907년 3월 8일자 사설 '오도(誤導)된 애국심(Misguided Patriotism)'은 당시 국내에서 불붙기 시작한 국채보상운동을 비난하는 내용이었다. 이튿날 '한국의 친구들(Korea's Friends)'(1907.3.9.)은 헐버트·베델과 같은 친한 반일적인 서양인들을 비난했다. '펜과 혀를 놀려' 국채보상운동을 격려하고 돕는다고 공격한 것이다. 대한매일신보는 이에 대해 '오도하는 충애(忠愛)'(1907.3.12.)라는 논설로 서울 프레스를 반박했다. 통감부의 영어 신문과 민족지가 논전을 벌이는 사태가 된 것이다.
일본의 재팬 타임스도 논전에 가세하여 서울 프레스를 응원했다. 재팬 타임스 3월 15일자 사설 '한국의 적들(Korea's Enemies)'은 서울 프레스를 인용하면서 "반일적인 한국의 십자군들이 오히려 한국의 적이라는 사실을 세계는 지켜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두 신문은 똑같은 주장을 상대방 신문에서 서로 인용하여 주관적인 주장을 객관적인 여론인 양 교묘히 위장했다. 신문 판매에서도 두 신문은 공조체제를 구축했다.
즈모토는 1909년 4월 초 서울 프레스에서 손을 떼고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동양통보사(東洋通報社)를 설립해 구미 지역에까지 일본을 홍보했다. 서울 프레스는 1937년 5월 30일 폐간될 때까지 31년 동안 일제의 한반도 침략의 대변기관 역할을 수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