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에서 지난달 학교를 나간 뒤 한 달 가까이 행방이 묘연해 납치 여부로 국민적 관심을 모았던 여고생 '김은비양' 실종사건은 21세 여성의 자작극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본지 2월 5일 보도
"아이가 무사한 건 다행이지만 허탈하죠." '김은비 실종사건'을 수사한 경주서 이인우 형사는 씁쓸해보였다. "은비를 찾아 달라"고 애원했던 경주여고와 그의 친구들, 그를 보호했던 복지시설 성애원도 허무하긴 마찬가지였다.
경찰은 "황당하고 이해되지 않은 부분이 많은 사건"이라고 했다. 김은비가 나타난 순간, 사건의 모든 '팩트'가 달라졌다. '김은비'라는 이름은 '이모양'으로 바뀌었고 나이도 1992년생에서 1989년생으로 세살 늘었다.
다니던 학교도 경주시 경주여고에서 용인시의 한 고교로 변했다. 도대체 '은비'는 왜 자기 신분을 속인 채 4년 동안 여고생으로 위장해 살았던 것일까?
지난 5일 학교를 떠난 은비가 용인에 사는 가족에게 연락한 건 6일 오전 11시였다. 은비의 아버지 이모씨는 "은비가 동생에게 전화해 '지금 집으로 돌아가고 있어'라고 말했다"고 했다. 은비는 여동생만 셋이다.
이씨는 "첫 전화 후 은비가 한 번 더 전화를 해 '집에 혼자 찾아 오겠다'고 말해 밖에서 기다리다 집으로 데려왔다"고 했다. 7일 외삼촌이 "은비가 부모와 함께 집에 있다"고 신고했다. 은비는 부모와 용인서에 갔다.
아버지는 4년 전 은비가 가출했을 때 용인서에 실종신고를 해 놓은 상태였다. 용인서에서는 당시 자료를 대조한 후 은비임을 확인했다. 오세찬 형사과장은 "아버지는 딸이 실종된 후 지금까지 아이를 애타게 기다렸다"고 했다.
아버지는 "난 딸이 친구들한테 말한 것처럼 유명대학 의사가 아니라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은비는 경찰에서 "기억이 잘 안 난다"고 계속 말했다고 한다. 은비는 "4년 전 학교에 가려고 나와서 버스를 탔는데 깜빡하고 내려야 할 버스 정류장을 지나쳤다. 버스가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 서기에 내렸다"고 했다.
터미널에 앉아 있던 은비는 근처에서 가출한 다른 여학생을 만났다. 이 여학생은 은비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도 집을 나왔는데 경주에 성애원이라는 곳이 있다. 우리 함께 가자." 그래서 은비는 경주행 버스를 탔다.
4년 전 집을 나설 때는 교복 차림이던 은비는 성애원에 들어갈 때는 털 스웨터에 운동복 바지를 입고 있었다. 오 과장은 "은비가 체육복 같은 옷을 들고 나간 뒤 화장실 같은 곳에서 갈아입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렇다면 은비는 왜 가출을 했고 이제 와서 집에 다시 돌아갔던 것일까? 은비의 가족들과 성애원, 용인서는 은비에게 약간의 정신적 문제가 있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은비 아버지는 "은비가 친척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고 했다. 용인서 관계자는 "경찰에 왔을 때도 깜빡깜빡하는 모습을 보였다"며 "은비가 그동안 학교 성적이 좋았던 것과는 다른 문제"라고 말했다.
이것도 전적으로 믿기엔 무리가 따른다. 경주서 이 형사는 "애가 공부하기 싫어 가출했고 4년 전 성애원에 '엄마가 적어줬다'고 말하며 건넨 편지도 가출 여학생이 갖고 있던 편지를 흉내낸 것이라고 진술했다고 들었다"고 했다. 은비가 만났던 가출 여학생은 이름을 말해주며 "나도 성애원에 다니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성애원 원순이 원장은 "그런 이름을 가진 아이는 우리 시설에서 자란 적 없다"고 확인했다.
처음 가출했을 때 은비는 고3이었다. 경주여고에서 집으로 돌아간 시점도 고2에서 고3으로 막 넘어갈 시점이다. 공부에 대한 압박감이 심했을 때다. 은비가 4년 전 다녔던 A고도 은비의 가출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A고 관계자는 "은비 아버지는 공무원이며 가출 당시 '집을 나간다'는 메모를 남긴 것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은비가 본인이 적어내는 모의고사 점수보다 항상 낮게 나와 심적으로 부담이 됐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당시 은비의 담임은 "아이가 공부도 꽤 잘하고 얼굴도 예쁘고 생글생글 잘 웃었다"고 말했다. 은비는 2006년 3월 모의고사를 봤는데 생각보다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았고 집안 사정도 어려워 휴대폰도 갖고 있지 못했다.
이 교사는 "은비와 친했던 친구들이 은비가 평소 '남자친구가 있는데 잘생기고 공부도 잘하고 엄청나게 부자에다가 선물도 많이 준다'고 자랑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친구들에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들통이 났다고 한다"고 했다.
2006년 3월 20일 가출했다고 기억하는 이 교사는 "그날이 월요일이었는데 금요일날 찾아와 '부모님이 이장(移葬)을 하느라 동생들 밥 줄 사람이 없어 자율학습 못할 것 같다'고 해 보내줬는데 그 이후로 소식이 없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