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3월 5일 발행된 조선일보 창간호가 발견됐다.

조선일보사는 그간 창간호를 보유하지 못했으며 그 현존 여부도 알지 못해, 1920년 3월 9일자로 발행된 제3호를 가장 오래된 조선일보 지면으로 간직해 왔다.

조선일보 창간 90주년의 해에 발견된 이 창간호는 그간 미술사가 황정수씨가 소장하고 있었으며, 최근 근·현대사 자료전문가 김영준씨가 입수해 공개했다. 발견된 지면은 창간호 제3·4면 3장, 제13·14면 3장 등 모두 6장 12쪽이다. 발행 당시 2장씩 붙어있던 지면들이 낱장으로 떨어져 있다.

창간호 전체 지면이 아닌 일부 지면이며 신문의 얼굴인 1면이 포함되지 않았지만 한국 언론 역사의 공백을 메워줄 귀한 자료로 평가된다.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를 빼앗긴 뒤 이 땅의 모든 민족신문은 사라졌으며, 그 '언론 암흑' 10년 만에 가장 먼저 나온 신문이 조선일보였다. 언론학자 정진석 교수(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일제하에서 최초로 창간된 우리나라 민간신문인 조선일보의 창간호가 일부나마 발견됐다는 것은 조선일보 역사뿐 아니라 한국 언론사의 복원을 위해 의미가 큰 일"이라고 말했다.

이번에 발견된 조선일보 창간호의 제14면. 꽃무늬를 배경으로 ‘祝朝鮮日報創刊(축 조선일보 창간)’이라는 컷을 머리에 올렸다.

이번 발견에 따라 조선일보 창간호가 16면이며 그 판형(版型)도 오늘의 신문과 같은 배대판(倍大版)이라는 그간의 정설이 '물증'을 통해 확인됐다. 일반적으로 신문을 하루 4개 면씩 발행하던 당시로선 매우 많은 페이지의 특집으로 창간호를 낸 것이다.

이번에 발견된 창간호의 기사들은 각계인사들의 축하 기고를 제외하면 이 땅의 경제 현실을 진단한 기사들이 많아 눈길을 끈다. 제4면과 14면은 창간 축하 광고와 기고로 채워 일반 기사는 제3면과 13면에 있다.

제3면에서는 '조선(朝鮮)현하(現下)의 공업(工業)상태'라는 기획기사를 통해 "조선의 공업을 말하면 종래 이를 천시했을지언정 장려하지 않아 수요를 따라가지 못한다"며 조선땅의 제조업 생산 기반이 취약한 상태에서 일본 제품들이 대량으로 수입되는 현실을 짚어내고 있다.

13면에도 '삼림사업과 수전(水電·수력전기)'이라는 전문가 기고와 '1919년의 조선무역 개황(槪�v)'이라는 연재의 첫회가 실리는 등 경제 기사 위주다. 이 연재는 조선에서의 수출과 수입 액수의 증감 추이를 싣고 수입에 의존하는 조선경제를 우려하고 있다. 이렇게 조선일보는 창간호부터 식민지 경제의 폐해를 지적하는 방식으로 일본제국주의 체제를 향해 쓴소리를 던지고 있다.

이번에 발견된 조선일보 1920년 3월 5일자 창간호 3면 지면(왼쪽) 상단에 발행연월일을 나타낸‘大正九年’의‘正’자(점선 안)가 거꾸로 세워 인쇄돼 있다. 3월 9일자 창간 3호 1면(오른쪽) 제호 위 연월일의 正 자도 똑같이 반대로 인쇄돼있다.

조선일보 창간호가 알려주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일왕의 연호를 뒤집어 인쇄한 '의문의 오식(誤植)'이 또 발견됐다는 것이다. 창간호 제3면 상단, 발행연도를 표시한 '大正九年'에서 요시히토(嘉仁) 일왕의 연호인 '다이쇼(大正) 중 '正' 자가 거꾸로 인쇄돼 있다.〈사진 참조〉 이보다 앞서 1985년 발견된 조선일보 제3호 1면의 발행연월일 표시에도 똑같은 '오식'이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 시절에 일왕을 상징하는 연호가 뒤집혀 인쇄된다는 것은 용인될 수 없는 일이었다. 제3호의 오식만으로는 단순 실수인지 '고의'인지 판별할 수 없었으나, 창간호에서도 똑같은 사례가 나옴에 따라 당시 조선일보 관계자 누군가가 일제에 대한 반감을 표시하기 위해 일부러 글자를 뒤집은 것 아니냐는 추정에 힘이 실리게 됐다.

조선일보는 창간호에서부터 민족 현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넘쳤고 그렇게 출발한 조선일보에 대해 온 민족이 보낸 뜨거운 성원이 창간호 지면에 넘친다.

이번에 발견된 창간호 4개의 전 지면에 걸쳐 창간을 축하하는 광고가 70여개에 이른다. '천도교 중앙총부'를 비롯해 조선매약(朝鮮賣藥)주식회사, 경성전기(京城電氣)등 30여개의 기업과 단체들이 조선일보 창간 축하 광고를 냈다. 당대의 이름난 요리집 '명월관(明月館)'이 낸 조선일보 창간 축하 광고도 보인다. 주소와 이름만 명함처럼 적은 개인 광고들도 30개가 넘었다. 창간호 제14면에 실린 '홍제당(洪濟堂) 주인(主人) 이민홍(李敏弘)'의 글은 오늘의 표현으로 옮기면 이렇게 축하하고 있다.

"참 반갑도다. 기쁘도다. 이 소식이여. 10년을 갈망하던 이 신문이여. 우리 2천만 동포의 대양사(大良師·훌륭한 큰 스승)이고 대경탁(大警鐸·깨우쳐주는 큰 존재)인 이 신문이 반도 강산에 출현하였도다. 사랑하느니 이 신문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