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2TV 수목드라마 '추노'가 30%가 넘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 중이다.
드라마가 인기를 끌면서 ‘추노’의 역사적 배경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실과 허구가 혼재하는 드라마다. 노비에게 정말 낙인을 찍었을까, 추노꾼은 실존했나. 드라마 관련 궁금증에 한국학중앙연구원이 답했다.
'추노' 중 이대길(장혁)과 천지호(성동일) 일당은 전문 추노꾼이다. 이들에게 추노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다. 나아가 한몫 단단히 챙길 수 있는 인생 로또다.
18세기 들어 도주 노비가 급증했다. 당시 노비들은 경제력이 이전보다 향상됐지만 인격적 차별 대우는 여전했다. 노비들은 차별 대우와 과중한 몸값 부담에서 벗어나려는 대처로 ‘도망’을 선택했다. 노비들의 도망이 폭발적으로 늘자 노비 소유주들은 잃어버린 노비를 찾고자 적극적인 방법을 모색했다. 한국학 자료에 추노꾼 관련 구체적 증거는 없다. 하지만 추노를 위해 돈을 주고 다른 사람을 고용했다는 사례는 확인할 수 있다. ‘추안급국안’에는 “올해 8월19일에 추노하러 경상도 평해에 갔다. 평해에서 여종 2구를 팔아서 노자(路資)로 하였다”, “이 몸의 집에서는 추노하러 아래로 내려갔는데 함경도에서 강원도로 향하였다” 등의 내용이 나온다. 전문직 추노꾼이 존재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이를 직업으로 삼은 추노꾼이 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추노를 하기 위해 노비들을 고용했는데 이들이 일을 다 마치기도 전 그 값으로 4, 5구의 노비를 지급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 추노에 고용된 값이 상당했음을 짐작케 한다. 추노를 통해 많은 수입을 올릴 수는 있으나 의롭지 못해 저주가 따른다는 글도 찾아볼 수 있다.
드라마 ‘추노’에 등장하는 일부 노비들의 이마, 가슴 등에는 ‘노(奴)’자나 ‘비(婢)’자가 새겨져 있다. ‘낙인찍히다’는 섬뜩한 말 그대로다.
조선시대에도 낙인은 있었다. 그러나 노비의 표식은 아니었다. 죄인에게 내리는 형벌 가운데 하나였다.
조선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도적질한 자 가운데 그 죄가 무거운 자에게 '도(盜)'자 등을 새기는 자자(刺字)형 얘기가 나온다. 공물을 사사로이 훔친 자에게 이 형벌을 내린 사례는 '조선왕조실록'도 간혹 전한다. 또 1506년(연산군12)에는 도망한 노비에게 '도노(逃奴)' 혹은 '도비(逃婢)'를 새기게 하라는 왕명이 내려져 실제로 그런 형이 시행되기도 했다.
문신을 지울 수 있는 방법이 없던 전통사회에서 자자형은 영원히 회복될 수 없는 가혹한 형벌이었다. 가급적 자제돼 유명무실화되다가 1740년(영조16)에 폐지됐다. 도망 노비에게 노비의 낙인을 찍는 것은 형벌로서 한때 존재하기는 했으나 좀처럼 시행되지는 않았다고 추정 가능하다.
노비 업복(공형진)은 밤마다 잔혹하게 노비 소유주, 양반을 살해하는 은밀한 조직에 속해 있다. 이런 조직이 실제로 있었을까.
견고한 유교적 신분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한 조선 후기에는 이런 이야기의 소재가 될 만한 사건들이 여럿 발생했다. 이른바 ‘살주계(殺主契)’, ‘검계(劍契)’ 등 사회적 불만세력의 모임이 나타난 것이다. 살주계, 검계는 노비들이 자신의 상전을 죽이려고 결성한 조직이다. 서울을 중심으로 조직된 것이 특징인데 그만큼 연대하기 쉽고 도심이라 익명성을 유지하기 쉬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인물 중심의 야사를 기록한 역사책 ‘조야회통’에는 1600년대 중반 당시 “무뢰배가 서로 모여 계를 만들어 살략계 또는 홍동계 또는 검계라 칭하면서 … 피난민의 재물을 쫓아가 뺏기도 하고 간혹 인명을 해치기도 했다”고 묘사한 부분이 나온다. 노비, 서얼 등이 조직한 비밀 결사는 자신의 주인 혹은 양반 전체를 대상으로 테러를 감행하거나 재산 약탈, 또는 부녀자 겁탈을 했다.
소현세자가 인조에 의해 독살됐다는 설은 역사가들에 의해 끊임없이 주장되고 있다. 드라마 ‘추노’에서도 소현세자가 독살됐음을 암시하는 부분이 등장한다.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이후 아우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의 인질이 돼 심양으로 끌려갔다. 8년 동안의 볼모생활에서 벗어나 1645년(인조 23) 2월1일 조선으로 귀국했다. 그러나 한양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4월26일 며칠 전 발병한 학질이 위중해져 사망했다. 건강했던 세자가 갑자기 학질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로 인해 세자 독살설이 퍼지게 됐다.
독살설을 뒷받침하는 강한 정황 증거는 ‘조선왕조실록’에 있다. 실록 기록에 따르면, 소현세자의 학질은 1645년 4월23일 발병해 사흘 만인 26일 급사할 만큼 악화됐다. 게다가 사망 이후에는 약물에 중독된 듯한 증상까지 나타나 독살이라는 의문이 제기된 것이다. 이외에도 다양한 정황들이 실록에 실려 있다.
하지만 다른 기록들을 찾아보면 독살이 아니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승정원일기’는 세자가 귀국하기 전부터 이미 건강한 상태가 아니었다고 전한다. 귀국 전후로 세자의 병과 관련된 글이 여러 번 나와 실록에서처럼 건강하던 세자가 갑자기 급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소현세자 병증과 치료에 대한 연구’에서 김종덕은 ‘심양일기’, ‘을유동궁일기’ 등을 분석해 소현세자가 병사했다고 주장한다. 세자가 청나라로 끌려간 이후 고초로 인해 산증을 얻어 완치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울화병이 있는 데다 한기와 접촉해 산증이 재발했다. 귀국 후 의원이 이를 학질로 잘못 진단하고 치료하는 바람에 사망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인조가 소현세자를 독살할 충분한 동기는 있었으나 세자의 병세가 이미 심각해 실제로 독살할 필요는 없었던 것으로 본다. 소현세자의 죽음을 명백한 독살이라고 단정할 구체적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건강이 안 좋은 상태로 계속해서 치료를 받던 중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결국 사망에 이르렀다며 '의료사고'가 사인이라고 정리했다.
인조가 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소문으로 민심이 흉흉하던 때 제주도에 유배된 소현세자의 세 아들 중 막내 석견(김진우)만 살아남았다. 드라마에서는 조선 최고의 무사이자 소현세자의 충복이었던 송태하(오지호)가 원손을 탈출시킨다.
실제 인조는 두 손자가 유배지에서 잇달아 죽자 유배지에서 이들을 돌보던 나인들을 잡아와 국문했다. 이와 함께 다른 나인과 하인을 제주도에 보내 셋째 석견을 더욱 잘 보살피게 했다. 하지만 인조가 손자에게 애정을 보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 전문가의 견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양창진 실장은 “이 기록만으로는 애정을 보였다고 말하기 힘들다. 만약 정말 사랑했다면 네 살인 석견을 귀양지에 보내진 않았을 것”이라며 “정치적인 행동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해석했다.
석견은 효종 대에 이르러 제주에서 남해, 강화로 유배지를 옮겨가며 오랜 귀양살이를 하다 1656년(효종7)에야 풀려났다. 이후 이름을 이회로 개명하고 1659년(효종 10) 윤3월 경안군으로 봉해졌다. 소현세자의 자손들은 모두 군(君)과 군주(郡主)가 됐다. 이 같은 사실은 현재 전해지는 왕실 족보 ‘선원계보기략(璿源系譜紀略)’과 ‘돈녕보첩(敦寧譜牒)’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회는 허확의 딸과 혼인해 이혼(임창군)과 이엽(임선군) 두 아들을 뒀다. 이후 1665년(현종 6) 9월 온천에 목욕하러 갔다가 병을 얻어 생을 마쳤다. 경안군의 묘는 경기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65-2에 있다. 그 아래에 있는 맏아들 임창군의 묘와 함께 고양시 향토유적 제5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