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에 망명한 독립운동 지사들은 신문을 발행하면서 항일의지를 불태웠다. '해죠신문'(1908.2.26.)을 시초로 대동공보(1908.11.18.), 대양보(1911.6.5.), 권업신문(勸業新聞)(1912.5.5.)으로 항일언론의 계보를 이어갔다.
해죠신문(海朝新聞)은 러시아지역 최초의 우리말 신문이었다. 한말 언론을 대표하는 장지연(張志淵)〈아래 사진〉이 주필로 붓을 잡았고, 러시아 원동지역 여러 곳과 국내의 평양·개성·성진·원산에 발매소를 두었다. 서울은 대한매일신보사가 판매를 대행했으나 3개월간 제75호까지만 발행하고 5월 26일 폐간하고 말았다.
해죠신문이 폐간되자 그곳 유지들은 시설을 인수하여 곧 대동공보(大東共報, 1908.11.18.)〈아래 사진〉를 창간했다(연해주의 大東共報는 미국의 大同公報와 별개의 신문이다). 미국에서 건너온 이강(李剛)과 정재관(鄭在寬)이 뒤를 이으면서 이 신문의 주필을 맡았다. 두 사람은 샌프란시스코의 '공립신보' 발간에 참여하였던 인물로 정재관은 주필(1907.4.~1909.1.)이었다.
샌프란시스코[공립신보-신한민보], 블라디보스토크[대동공보], 서울[대한매일신보]의 세 지역 신문은 태평양과 동해라는 지리적 장벽을 뛰어넘어 긴밀한 삼각 연대를 형성하였다. 신문 참여 인물들의 인적(人的) 유대가 강했고, 서로 기사를 전재하는 방법으로 국권회복이라는 동일 목표를 지향하였다. 러시아의 대동공보와 미국의 신한민보는 신문 보급도 상호 대행했다. 통감부는 해외 발행 신문을 모조리 압수하여 국내 유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하였다.
"해삼위 지방을 한인의 국권회복 하는 단체의 근거지로 삼도록 고취한 자, 암살자를 의사라 하는 사상을 널리 퍼지도록 힘쓰는 자, 폭도를 지목하여 국가에 충성하는 자라 하여 이것을 위하고 도와주는 취지의 기사는 모조리 압수하라"는 것이 '경찰사무개요'에 명시되어 있었다.(신보, 1910.5.14., 소위 신문 압수의 처분)
대동공보는 러시아에서 한국인을 일본의 앞잡이로 보는 관점에 대해 사례를 들어 비판하면서 재러 동포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대변했다. 한일 강제합방에 대해서는 피로써 투쟁할 것을 강조했다. 대동공보는 1910년 8월 '대동신보'로 제호를 바꾸었으나 한일 강제합병 직후 연해주 군사령관의 명령으로 9월 1일 폐간되고 말았다. 일본의 강점에 무장 항일투쟁을 전개할 것을 호소하는 기사를 실었던 것이 폐간의 원인이었다. 대동공보가 폐간되자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 지도자들은 좌절하지 않고 새로운 신문의 발간을 준비하였다. 국내에서는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에서 항일의 붓을 들었던 신채호(申采浩)가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신문 발간에 참여했는데 1911년 6월 5일 창간된 '대양보(大洋報)'의 주필을 맡았다.
미국과 러시아 지역에서 발행된 우리말 신문은 항일운동을 연결하는 구심점이었고, 국내와 해외 동포들의 민족의식과 독립정신을 널리 전파하는 선전기관이었다. 두 지역의 독립운동사 연구의 일차 사료는 현지에서 발행된 신문이 가장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