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가 손에 든 액자 속의 진아춘은 1985년 모습이다. 그 시절 기억을 되살려 찾아오는 손님들은 가슴 속에 품고 사는 ‘젊었던 때’ 이야기들을 하나 둘씩 풀어 놓기도 한다.

85년 된 가게가 있다. 손으로 빚은 군만두와 자장면·굴짬뽕으로 유명한 중국 음식점이다. 지금 위치는 애초에 터 잡았던 곳이 아니지만 아직도 그 '오래된 가게'를 잊지 못하고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

서울대 동숭동 캠퍼스 시절 문리대와 의대생들의 단골 모임장소이었던 그곳에 다시 그 학생들이 돌아와 옛이야기를 꽃피우고 있다. 서울 대학로의 중국음식점 진아춘(進雅春)의 형원호·박숙경 부부가 간직한 세월 속 이야기다.

진아춘은 1925년 중국인 이진산이 종로구 학림다방 옆 2층 건물(약 100평)에 창업했다. 이씨는 중국 산둥성 지역에 살았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고 먹을 게 없어지자 조선땅으로 건너왔다. 이씨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다.

자식은 첫 아내와 낳은 딸 한명뿐이었다. 둘째 아내는 주방일을 도왔다. 6·25를 거치면서도 중국집은 버텼다. 장사도 꽤 잘되는 편이라 종업원을 10명 가까이 두고 있었는데 그 중 송협국이란 종업원이 이씨 마음에 들었다.

아들이 없던 이씨는 송씨를 양자(養子)로 들였다. 1970년대 말 이씨가 죽자 송씨가 가게를 이어받았다. 송씨는 2남1녀가 있었는데 딸은 '마산진아춘'을 운영하다 대만으로 이주했고 나머지 아들 둘은 미국으로 떠났다.

송씨도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조카였던 형원호씨가 진아춘을 맡았다. 그러다 1993년 1월 송씨의 큰아들이 미국에서 돌아와 진아춘을 맡겠다고 했다. 형씨 부부는 지금 동숭아트홀 밑에 '도일처'라는 이름의 음식점을 차렸다.

송씨 큰아들이 운영하게 된 진아춘은 손님들의 발길이 점점 뜸해졌고 1995년 함흥냉면집으로 바뀌었다. 형씨는 "진아춘의 그 오랜 역사가 끊겼다는 게 너무 마음이 아팠다"고 말했다.

형씨 부부는 1999년 12월 말 도일처를 정리하고 미국 오하이오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 중국음식점을 차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생각이 바뀌게 됐다. '진아춘'의 기억을 잊지 못한 이들이 그곳에 많았던 것이다.

"미국에 가보니 대학로 진아춘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던 서울대 학생들이 교수가 돼 살고 있었습니다. 그분들을 보고 음식점을 다시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2000년 2월 귀국한 부부는 광화문 흥국생명 빌딩 근처에 '중화'라는 이름의 음식점을 차렸다. 자장면을 뺀 모든 메뉴가 주변 가게보다 500원 이상 비쌌지만 개점 3달이 채 되지 않아 줄을 서서 먹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아졌다.

"어느 날 병원에서 온 걸로 보이는 차들이 가게가 있는 골목을 가득 채웠습니다. 알고 봤더니 현재 두산그룹 박용현 회장이 찾아온 거였어요. 박 회장이 서울대 병원에 계실 때 저희 가게를 애용하셨거든요."

GS 계열의 한 오너도 찾아와 "오랜만에 진아춘 음식 먹으니 맛 좋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전해준 형 사장의 부인 박숙경씨는 "아직도 기억해 주는 분들이 많다는 걸 알고 용기가 생겨 다시 대학로에 '진아춘'이란 가게를 냈다"고 말했다.

'중화'는 형 사장의 여동생 부부가 운영한다. 진아춘을 찾는 손님들은 '예전의 그 학생들'이다. 1950~70년대 서울대 학생들은 외상으로 자장면을 먹고 담보를 잡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형씨는 "2004년 서울대 박물관에서 학생들이 찾아가지 않은 담보를 기증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 보냈습니다. 그 때 보니 맡겨진 시계만 해도 몇백개가 됐고 학생증이나 학생들이 사용하던 가방 등도 있었다"고 했다.

창업주 이진산씨 때부터 내려오는 일화도 있다. 장면 전 총리는 대학로에 있는 동성고(당시 동성상업) 교장 시절 이 집 단골이었다. 누가 볼세라 항상 문 옆에 있는 식탁에 숨어 자장면 곱빼기를 먹었다고 한다.

또다른 단골인 정세현통일부 장관은 "어렸을 적 먹었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음식을 먹을 수 없겠냐?"고 물어 형 사장이 유산슬·양장피·자장면 등으로 이뤄진 코스를 개발하기도 했다.

박숙경씨는 "돌아가신 서울대 임원택 교수님이 가장 기억에 남는 단골"이라고 했다. 임 교수는 일주일에 1~2번은 꼭 들렀는데 제자들과 올 때는 그 수에 상관없이 '소고기 탕수육'을 머릿수대로 시켰다고 한다.

형 사장 부부는 이제 가게가 받은 사랑을 사회에 환원하려 한다. 부부는 1995년부터 100만~300만원씩 서울대병원에 기부금을 내왔다. 작년 11월부터는 손님들이 군만두를 먹고 내는 현금을 모아 서울대 어린이병원에 기부했으며 성균관대에 1억원 기부금을 약정해 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