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진(35)은 겁 없고 독한 여자다. 2002년 잘 나가던 디자이너를 때려치우고 연예계에 뛰어들었다. 10대들이 주름잡는 연예계에서 매니저도, 최근까지 기획사도 없이 오로지 뛰어다니기만 했다.
대역배우도 했고 얼굴 안 나오는 광고 뒷배경 모델도 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지난해 인기를 끈 '아이리스(IRIS)'에 출연하면서 비로소 '김혜진'이란 이름을 알게 됐다.
올 초부터 신동엽과 예능프로 '달콤한 밤'의 공동 MC를 맡고 있고 사극(史劇) '동이'에서 평양 기녀(妓女) 설희로 출연하고 있다. 그가 말했다. "연예인의 90%가 생계비도 못 번다. 난 8년 만에 대중들이 알아줬다. 행복하다."
김혜진은 홍익대 산업디자인과를 수석졸업했다. 2002년까지 여러 디자인회사에서 일했다. 그해 마지막 직장이던 외국인회사가 문을 닫았다. 머리도 식힐 겸 김혜진은 미국 친척집으로 놀러갔다.
그때 '두산 메이퀸 선발대회'라는 이벤트가 있었는데, 재미로 인터넷을 통해 신청한 이 이벤트에서 덜컥 진(眞)으로 뽑혀버렸다. "배우라는 인생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폭주하는 이메일 가운데 첫 출연작이 배우 차태현이 주인공인 현대해상보험 하이카 광고였다. 계단에서 굴러 다리 인대가 끊어졌는데 광고 계약이 됐다는 전화가 왔다. 깁스 풀고 목발 감추고 촬영장으로 갔다.
다행히 앉아만 있는 역할이라 무사히 촬영을 끝냈다. 김혜진이 "목발 좀 갖다달라"며 일어서자 사람들이 독한 여자라고 기겁을 했다. 2004년부터 그 '독한 여자'를 기억하고 있던 광고주들이 그를 찾기 시작했다.
일감이 밀려들었다. 계약이 되면 큼직한 가방에 의상과 메이크업 도구를 싸들고 촬영장으로 갔다. 택시 타고 다니며 계약도 혼자 했고 화장도 혼자 했다. 그렇게 출연한 광고가 TV 광고만 100편이 넘는다.
화보와 지면광고는 본인도 숫자를 잘 모른다. 기내에 숨어 비빔면을 먹는 스튜어디스들(팔도비빔면), '꼭 잡고 있는 거죠?' 하며 자전거 타고 과거로 돌아가는 LG 광고, 빗속에서 보험회사 직원 김명민을 기다리는 LIG손보 광고….
현재 전파를 타고 있는 김혜진의 출연작들이다. 대스타들이 출연하는 드라마 앞뒤에는 언제나 김혜진 출연 광고가 있을 정도였다. 박카스, 도시바노트북, 페브리즈, 오뚜기올리브유, 풀무원워터라인….
잠시 쉬었다가 다시 이어가본다. 아이클리보, 다음다이렉트보험, 에버랜드, 동양생명, 농심쌀새우깡, 성원상떼빌, 뉴코아아울렛, 김정문알로에, GS칼텍스, BYC, 애니콜 기타 등등이다. 업종 불문(不問)에 역할 불문이다.
연기 욕심도 채워갔다. 대역배우로 나가고 단역으로 출연했다. 제5공화국(2005), 불멸의 이순신(2004)에도 얼굴을 비췄다. 김혜진이 말했다. "어느 날 선배들이 '너 그러다 단역배우로 끝난다'고 경고를 했다. 맞는 말이었다. 욕심 때문에 생각이 짧았던 거다. 그래서 단역 출연을 그치고 광고에만 매진했다. 그래, 광고만큼은 끝장을 보자고 생각했다."
스스로 "박리다매"라 할 정도로 욕심 내지 않고 독하게 일했다. 그 사이에 몸값은 서서히 올라갔다. 2007년 김혜진은 한국모델협회로부터 CF모델상을 받았다. 속칭 'CF퀸'이다. 그렇게 정점을 찍고 김혜진은 연기로 눈을 돌렸다.
단역으로 다시 시작했다. '비상'(2009), '과속스캔들'(2008) 같은 영화에도 출연하더니 2009년 아이리스에 출연하면서 홀연히 광고 여왕 권좌 대신 '신인배우'로 대중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제야 사람들은 '김혜진'을 검색하면서 그녀가 출연한 광고들을 역추적해 "걔가 걔였어?" 하고 놀라워했다.
"인기? 한순간이다. 연기하는 게 그저 즐거울 뿐이다. 디자이너로 살 때는 결과를 그리며 살았다. 지금은 과정을 즐기며 산다. 스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없다. 다만 내가 노력한 만큼은 인정받고 싶다. 아니면 서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