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2월 12일은 한국 현대사의 흐름을 바꿔 놓은 날이다. 12·12사태는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세력이 일으킨 군사반란사건이다.
신군부세력은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당한 이후 군부 내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러한 12·12를 계획했다.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을 맡고 있던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가 김재규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10·26사건 수사에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임을 내세워 강제 연행했다. 정승화의 연행에는 허삼수·우경윤 등 보안사 수사관과 수도경비사령부 33 헌병대 병력 50명이 동원됐다.
연행은 대통령은 승인 없이 이루어졌다. 신군부세력은 정승화를 연행한 다음 대통령이었던 최규하를 협박해 13일 새벽 승인을 받아냈다. 12·12사태를 계기로 신군부 세력은 권력의 중심으로 급부상했다. 특히 사건을 주도한 전두환은 군부 권력을 장악하고 정치적인 실세로 등장했다.
이 군사정변으로 전두환, 노태우, 허화평 등 신군부세력은 한 손에 권력을 장악했고 당시 대통령 최규하와 육군참모총장인 정승화는 사실상 실각했다. 군사정부 시절부터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화를 갈구했던 김영삼, 김대중은 다시 한번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역사의 한 분수령이었던 그날로부터 31년이 지난 지금 그때 그 사람들은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화려하게 부상한 신군부세력
12·12 사태는 하나회 소속 군인들의 입지를 지키기 위해 일어난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하나회는 1964년에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김복동 등 육군사관학교 11기생들의 주도로 비밀리에 결성한 조직이다.
10·26사태 이후 하나회소속 군인들이 장성진급 등에서 불리해지고 여러 분야에 걸친 자신의 월권행위가 문제가 되자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이 결단을 내렸다는 것이다.
전두환은 12·12사태의 기획자이자 집행자였다. 12·12사태로 힘을 얻은 그는 1980년 8월 대통령선거 단일후보로 나서 제1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듬해에는 민주정의당 총재가 되어 제12대 대통령에 당선했다.
'보통 사람' 노태우도 12·12사태의 수혜자였다. 전두환의 육사 동기인 그는 12·12 사태에 가담해 단숨에 신군부 내 핵심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는 제5공화국 기간에 외교·안보담당 정무 제2장관, 1982년 체육부장관을 거쳐 내무부 장관, 1983년 서울올림픽대회 및 아시안게임 조직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전두환이 대통령직선제를 수용했고 노태우는 민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당초 불리할 것이란 평을 받던 그는 양김(金)이 분열한 틈을 타 ‘보통 사람’이라는 구호를 부각시키며 제13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육사 17기였던 허화평은 12·12사태 이후 신군부의 황태자라는 평을 받았다. 허화평을 포함한 육사 17기들은 5공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했다. 그중에서도 허화평을 비롯한 허삼수 당시 보안사 인사처장과 수경사 33경비단장이었던 김진영은 17기의 트리오로 불렸다.
허화평은 1982년 대통령비서실 정무1수석비서관이 되면서 정권의 실세로 활동했지만, 전두환의 친인척이 관련됐던 장영자 사건의 처리 과정에서 전두환의 미움을 받게 되어 사임하였다. 당시 그는 장영자 사건의 원칙적 처리를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최규하와 정승화
최규하는 국무총리 재임 중인 1979년 10·26사태를 맞아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었다가 같은 해 12월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는 한국 헌정사상 정당에 관여하지 않은 직업공무원으로서 과장·국장·차관·장관·국무총리를 차례로 거쳐 대통령이 된 첫 번째 사람이었다.
그러나 신군부 세력의 12·12사태로 인해 대통령으로서의 통치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1980년 8개월 만에 사임해 역대 최단기 대통령이 됐다.
정승화 전 육군 참모총장은 12·12사태 때 신군부에 의해 강제연행되고 나서 대장에서 이등병으로 강등돼 군복을 벗는 등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정승화는 군 교도소 독방에서 일반 사병 죄수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으며 지내다 1980년 6월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석방됐다. 군적(軍籍) 박탈상태는 지속됐다.
그는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자 12·12사태 피해자들과 함께 신군부 측을 고소, '12·12는 군사반란이었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1997년엔 서울지법이 그의 내란방조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 17년6개월 만에 완전히 명예를 회복했다. 밀린 군인연금 2억원을 받기도 했다.
◆눈물을 삼켜야 했던 민주화 세력
12·12사태는 박정희 대통령 서거이후 민주화를 기대했던 세력을 허탈하게 했다.
제3·4공화국 하에서 김영삼은 야당인 신민당 당수 등을 거치며 김대중과 함께 민주화 운동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12·12 사태 이후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가 정권을 잡자 김영삼은 가택연금을 당했다. 5공화국 시절에도 단식투쟁 등을 하면서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다.
14대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1995년 5·18 관련 특별법을 제정하고 전두환·노태우 등을 결국 법정에 세워 심판받게 했다.
김대중은 12·12사태 이후 특히 많은 고초를 겪었다. 신군부 세력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김대중 일당이 정권을 잡기 위해 민중을 선동해 일으킨 봉기'로 몰아 내란음모 등의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김대중은 1997년 대권에 도전해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됐다. 그는 2003년 10월 서울고등법원에 '내란음모죄'에 대한 재심을 청구해 무죄를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