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

동욱(25세): 미대생

유미(26세): 케이블 방송국 아나운서

무대

동욱의 작은 원룸이다. 무대 왼편 통로가 현관의 역할을 하며 현관과 닿은 쪽부터가 부엌이다. 싱크대와 가스레인지와 소형 냉장고. 무대 가운데는 소파랄지 침대랄지 쓰임에 따라 이름이 달리 붙을 두툼한 매트리스가 놓였고, 그 앞엔 낮고 허술한 나무 탁자가 하나 놓였다. 오른편에는 책장이 하나 우뚝 섰지만, 책보다는 옷가지나 컵, 탁상시계, 스탠드, 가방, 분무기, 면도기 등 자질구레한 생활용품들이 속속 들어차 있다. 그 와중 듬성듬성 위치한 석고상과 피규어, 레고, 작은 조소 작품들이 이 집주인의 전공 내지 취향을 드러낸다. 오른편 통로로는 화장실을 내어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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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트레이닝 바지에 목 늘어난 티셔츠 차림의 동욱, 책장 앞 공간에서 열심히 무언가 작업을 하고 있다. 그 작업이란 것은 서로 마주본 채 밀착한 마네킹 두 점을 트리용 전구로 발치부터 친친 동여 감는 행위다. 불 꺼진 꼬마전구가 촘촘히 박힌 전선줄은 벌써 두 사람(?)의 명치 부근까지를 한데 묶어 버렸다. 설치 미술에 가깝지 싶은 동욱의 행위는 무척이나 진지하고 또 섬세하여 보는 이의 시선을 붙드는 데가 있다.

현관문을 거칠게 두들기는 소리가 그 성실한 정적을 깬다.

유미: (소리)문 열어!

문 두드리는 소리 거세지는데. 유미의 목청도 높아지는데.

유미: (소리)안 열어!

문 걷어차는 소리가 거의 소음 공해다 싶을 때까지도 동욱은 작업에만 열과 성을 다한다. 이제는 문이 부서지고야 말겠지 싶은 순간, 동욱은 만지던 부분을 매듭짓고 스프링처럼 튀어나가 문을 연다. 세련되고 화사한 정장 투피스 차림의 유미, 벌컥 집 안으로 쏟아져든다.

그림=클로이

유미: 너 왜 전화 안 하는데?

유미, 더 뭐라 쥐어박으려는데 그런 그녀를 덥석 끌어다 안는 동욱.

유미, 동욱에게서 몸을 억지로 떼어내고 잠시 그의 얼굴을 혼란스레 들여다본다.

유미: (할 말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자) 초인종 좀 고쳐.

동욱: 보고 싶었어, 유미야.

유미, 동욱을 세게 밀쳐내고 방으로 들어온다. 방구석에 우뚝 선 마네킹에 눈을 주더니 냉장고로 가 물을 찾는데…… 없다. 할 수 없지, 맥주 페트병을 꺼내 마신다. 벌컥벌컥 마신다. 동욱, 탁자로 가 앉아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인다.

동욱: (무심하게) 믿기 싫음 말어.

유미: 어릴 때 난 기다리길 잘하는 여자애였어.

동욱: 왈칵 화내기도 잘하는 여자애였지.

유미: 자랄수록 기다리는 것보단 죽는 편이 낫겠단 생각을 자주 하게 됐어.

동욱: 그래, 비약하기도 좋아하는 여자애였어.

유미: 일주일 기다렸어!

동욱: 그렇게나 됐어?

유미: 그지 같은 새끼!

동욱: 바빴어.

유미: 뭘 하느라?

동욱: 일.

유미: (설치 미술 가리키며) 바빴니?

동욱: 일이야, 내 일.

유미: 보통은 출근 시간 지하철 역 찍고 사무실 개인 책상 찍고 퇴근 열차까지 찍는, 이 일련의 과정을 일이라고 하더라.

동욱: 너처럼?

유미: 그래, '누나'처럼.

동욱: (노래하듯) 더불어 '넌' 방송도 찍고~.

유미: (그만두려다 울컥) 넌 대체 애가 뭘 믿고 그렇게 건방질까?

동욱: (돼지코 하며) 내 코가 잘생겼다는 건 믿어. 커피 타?

유미: 내가 타!

유미, 싱크대 앞에서 능숙하게 커피를 찾아 탄다.

말 없이 뻐끔뻐끔 담배 피우는 동욱을 슬쩍 건너다보더니 한 잔을 더 탄다.

머그 두 잔을 들고서 걸어오는 유미에게 제 옆 자리를 두들겨 앉으라 하는 동욱.

거기 앉지 않고 조금 떨어진 곳에 무릎 꿇고 앉는 유미. 짧은 치마 때문에 영 불편하다.

보는 사람이 무안할 정도로 서로를 빤히 마주 보는 둘.

동욱, 담뱃불을 끄고 유미에게 다가앉더니 재킷을 벗기려 한다.

유미: (놀라서 방어적으로) 무슨 짓이야?

동욱: (머쓱해서) 뭐가……. 쪼여 보이니까는.

유미, 재킷을 더 여며 입고는 단추를 일일이 꼭꼭 채워 벗을 뜻이 없음을 보여준다.

동욱: 아, 숨은 쉬어야 될 거 아냐.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갈아입을 거 뭐 줘?

유미: 잠깐 있다 갈 거야.

동욱: 그러시든지.

유미: 개새끼!

동욱: (기가 차서 웃음 터지며) 아 이 아줌만 왜 오자마자 욕지거리야.

유미: 보여? 이 토끼눈! 턱에 요 뾰루지! 분장으로 가려지지두 않아! 완전 망했어!

동욱: (자신 없게)…… 화면으론 잘 안 보일 걸?

유미: (한숨) 그저껜 뉴스 중에 오독만 자그마치 열, 일곱 번이었어. 모니터하면서 세는데 손이 다 달달 떨리더라. 어젠 어미가 잠겨서 소리가 이탈했구. (뉴스 톤으로) 시청해주신 여러분, 고맙습니(삑사리)다. 다. 다. 흠! 흠!

동욱, 무심히 쳐다보면 불쑥 가까이 붙어 앉는 유미.

둘의 그림, 오랜 연인이나 우애 좋은 남매처럼 자연스럽다.

유미: 해 봐, 타이완 타이둥시의 야채장수 천수쥐씨.

동욱: 뭐?

유미: 아, 해봐! 타이완 타이둥시의 야채장수 천수쥐씨.

동욱: 타이완 타이둥시의 야채장수 천수쥐씨. 이게 뭐.

유미: 오늘은 이게 자꾸 씹혀서 식은땀만 줄줄. 타이완 타이둥시의 야채장수 천수쥐씨. 천수쥐씨. 아 왜 지금은 잘만 되냐?

동욱: 허. 실수 안 하기로 소문난 정 아나 아니었어?

유미: 무예독 원고도 술술 읽기로 소문난 정 아나 아니겠어?

동욱: 케이블에서 썩기엔 그 실력과 미모가 너무나도 아까운 정 아나!

유미: 곧 다가올 공중파 진출을 위해 늘 발톱을 갈고 있다는 정 아나!

동욱: 그 뻔뻔하기가 하늘을 찔러 생방송마저 나른~하게 진행한다는 정 아나!

유미: (적절한 액션과 함께) 매의 눈! 뱀의 혀! 사자의 심장을 지닌 정 아나! 어흥!

동욱: 그런 정유미 아나운서께서 어찌하여 그리도 초보틱한 실수를 연발하셨나이까?

유미: (동욱의 멱살을 잡으며) 그게 다 이 화상 때문에!

동욱: (고개를 뒤로 젖혔다 되돌리며) 하! 나 때문에?

유미: (초조하게) 잠을 잘 수가 없어. 퇴근해서 돌아오면 몸은 완전 녹촌데, 신경은 한 올 한 올 곤두서서 잠이 들질 않어. 골이 사방에서 꽝꽝꽝. 수면제? 새벽부터 뉴슨데 못 깨나면 어쩌려구? 눈만 감고 누워서 빨랑 이 밤이 사라지길 비는 거야. 아침아 와라. 차라리 출근길 길거리서 푹 고꾸라져버려라. 그렇게라도 잘 수 있다면……. 아으. 골이야.

유미, 가방에서 두통약을 찾아 입에 넣고 커피로 꿀꺽 삼킨다.

동욱: 안 돼, 커피랑은!

유미: 늘 이러는걸 뭐. 그냥 둬.

동욱: 많이 아파? 누울래?

유미: (핸드폰 던져 놓고) 핸드폰을 부숴뜨리려다 말았다. 약정만 아니었음 가루가 됐겠지.

동욱: …….

유미: 난 이 지경이 되는 동안 넌 여기 박혀 내내 (설치 미술 가리키며) 쟤넬 주무르고 있었어. 그래?

동욱: 나라고 잘 먹고 잘 잔 건 아냐.

유미: 어떻게 됐는지 정돈 알려줬어야 할 거 아냐. 왜 전활 안 해?

동욱: 저녁은 먹고 다니냐.

유미: 우리가 밥만 먹구 저녁 8시에 빠이빠이한 거면 말을 안 해. 아니, 그렇게 헤어졌어도 궁금했을 거 같아. 잘 들어갔는지 어쨌는지!

동욱: (유미의 손을 잡으며) 손이 왜 이리 뜨거워.

유미: (손 빼내며 빠르게 따따따따) 꼭 살을 대봐야 뜨거운 줄을 알아? 우리 금요일 내내 같이 있었구 새벽 내내 엉켜 있었구, 토요일 오전도 줄창 붙어 있었어, 니네 엄마 역 앞에 오셨다는 전화 오기 전까지! 나 그렇게 보내놓고 잘 들어갔는지 어떤 기분일지 나쁜 맘은 안 먹을지! 그런 상상 안 되디? 걱정이 안 되디?

동욱: (고통스럽게) 누나아.

유미, 동욱의 '누나' 소리에 말문이 막혀 벌컥 일어선다.

찬물을 뒤집어쓴 개처럼 우왕좌왕 걷다, 문득 동욱을 본다.

유미: (불안하게) 몇시지?

동욱: 아직 시간은 7시야. 낮이 짧아진 거지.

유미: (떨며)…… 어두워 오면 불안해.

동욱: 자고 갈래?

유미, 우뚝 서서 무언가 고민하는 태도로 찬찬히 이마를 문지르더니, 치마를 내려다보곤 탁탁 턴다.

유미: 분무기.

책장에서 분무기를 찾아다 유미에게 건네는 동욱.

유미, 살짝 구김이 간 제 치마에 물을 칙칙 뿌린다.

그러다 돌변해 동욱의 얼굴에 사정없이 물을 뿌려버린다.

유미: 분이 안 풀려! 나쁜 놈! 나쁜 놈!

동욱: 야! 야! 악! 야!

필사적으로 피해 다니는 동욱이지만 역시 필사적으로 뿌리는 유미.

결국은 얼굴이 엉망으로 젖은 동욱, 풀썩 쪼그려 앉더니 얼굴을 가리고 징징 우는 체를 한다.

유미: 사내자식이 엄살은.

동욱: (버럭) 페브리즈란 말야! 아, 눈 따거.

놀라서 조금은 미안해지는 유미.

화장실로 휑하니 들어가 버리는 동욱.

유미: (화장실에 대고) 야, 팔자주름 쫙 펴지겠다!

대답 없는 화장실.

유미: (슬쩍 웃으며) 향기도 솔솔~.

유미, 키득키득 웃으며 빙글 돌더니 분무기를 총처럼 잡고 마네킹을 겨눈다.

유미는 부러 '쾌활'을 연기하지만 짙게 깔린 '불안'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유미: 움직이면 쏜다! 너희들의 죄명은…… 연애다! 빵야, 빵야!

세수하고 나온 동욱, 유미의 손에서 분무기를 뺏어 본래 자리에 갖다 둔다.

매트리스로 가 털썩 주저앉는 동욱을 물끄러미 보던 유미, 마네킹을 끌어안는다.

유미: 도망치지 말구 태연하게 맞이할 걸 그랬어.

동욱: (웃으며) 챠! 쌍으로 벗구서 말이지?

유미: 아줌마 어쩜 기절했을지도 몰라. 옛날부터 싫어했잖아, 너랑 나 단둘이 한 공간에 있는 거. 우리 키가 어른 겨드랑이에도 못 미치던 꼬꼬마 적부터 말야. 난 어린 맘에두 왜 그리 예민을 떠나 했다. 아으, 내가 그냥 현관 벌컥 열고 환영해버리는 거였는데! (생글생글하고 능글능글하게) 오셨어요, 아주머니? 결혼 소식 잘 들었어요, 저희가 먼저 축하하려고 술을 좀 했는데 기분이 기분인지라 과음을 했네요? 그러고는 보시다시피 이렇게 일을 쳐버렸구요!

동욱: 아가씨, 됐거든요? 그날 우리 꼴이 기억 안 나서 이러는 거지?

유미: (웃으며) 빈집에서 현관문 따는 소리 들은 고딩들마냥, 옷 주워 입기 바빴어, 그래.

동욱: 그래서 넌 스타킹도 못 신구 맨다리로 튀어나갔지. 타타타! 육상선수 안 부럽더라.

유미: 어쨌어? 니가 숨겼니? 안 들켰지?

동욱: 들킴 어때. 작업 재료라고 둘러대면 될 걸.

유미: 마네킹에라도 신길 거야?

동욱: (손가락을 튕기며 능글맞게) 괜찮은 생각인데? 넌 내게 영감을 줬어.

유미: 변태 새끼. 어따 뒀어?

동욱: 가져가게?

유미: 비싼 거야. 일본 직수입이거든. 그런 섬세하고 촘촘한 레이스를 국내에선 짤 수가 없대요.

동욱: 으쩐지 촉감이, 촉감이~ 예사롭지가 않드라.

유미: 에? 신어봤어?

동욱, 매트리스 밑에서 스타킹을 꺼낸다. 오른손에 장갑처럼 끼우고 무언가를 쥔 것 같은 손동작을 하더니 아래위로 팔을 흔든다.

유미, 의아한 얼굴로 동욱이 하는 양을 보다가 이내 뜨악한 얼굴이 되어 펄쩍 뛴다.

유미: (잡히는 대로 던지며) 으익! 더러워! 변태 새끼!

동욱: (피하며) 장난이야.

유미: 제발 장난이길 바란다!

동욱: 혹시 몰라 빨아두길 잘했네. 샴푸로 조물조물 손빨래했어.

동욱, 유미에게 스타킹을 던지면 유미 받는다.

의심스레 냄새를 맡아보는 유미. 달달한 샴푸 향에 안심한다.

탁자로 돌아와 앉아 가방에 스타킹을 넣는 유미를 유심히 바라보는 동욱.

동욱: 너 그런 야한 거 한 개두 안 어울려. 청순한 게 맞는다고.

유미: (머리 귀 뒤로 넘기며) 알어요, 나두. (노래한다) 그대 모습은~ 보랏빛처럼~.

동욱: 그 새끼 취향이구나?

유미: 눈치 좋네?

동욱: 마담 스타일? 고루하긴.

유미: 마담 스타일은 무슨. 섹시하고 매력적이지만 권태로운 여교수 스타일. 우~아.

동욱: 어유. 하여간에 머리 좋은 놈들이 변태가 많아요.

유미: 정우씬 아냐. 평범한 쪽이지.

동욱: 평범? 입으로 해주는 거 환장하고, 눈 가리고 하는 여성 상윌 즐기는 게 평범?

유미: (뜨악해 쏘아보며) 니 놈이 그걸 어찌 알지?

동욱: 누나가 나한테 해줬잖아, 그렇게 저렇게 요렇게. 잘하더라?

유미: (꿀밤을 먹이며) 요 새끼가 진짜.

동욱: 아. (이마 문지르며) 많이 하냐? 그 새끼랑?

유미: 우린 충동에서 자유로운 커플이거든요?

동욱: 무미건조 커플이란 말로 들리거든요?

유미: 커피가 너무 뜨거우면 단맛을 모른다네, 청년.

동욱: 다 식은 커피가 커핀가? 까만 설탕물이지.

유미: 이게 지가 불리해지니까 엉뚱하게 정우씰 걸고넘어지네? 그 사람이 지금 여기서 무슨 상관이야?

동욱: 제일 상관있지, 왜. 누나 그 새끼랑 결혼 깨질까 봐 전전긍긍하는 거 아냐.

유미: 뭐야 이 새끼야?

동욱: 내가 널 몰라? 똑바로 말해. 니네 아버지 바람나서 이혼하든 말든 그건 아버지 인생, 넌 니 인생에만 흠집 안 나면 전-혀 상관없을 거야. 아니라고 하기만 해.

유미: 그래, 이왕 터진 입인데 함부로 더 지껄여봐. 미친 새끼야.

동욱: 새끼 새끼 하지 마라. 누나 누나 해주니까 진짜 니가 내 누나 같냐?

유미: (폭발해서) 니네 엄마랑 우리 아빠 결혼한다며! 그럼 누나지!

동욱과 유미 서로 팽팽하게 노려본다.

그러나 이게 무슨 소용인가. 둘 다 맥이 빠져 한숨을 쉰다. 문제의 본질은 이게 아니지 않은가.

유미, 동욱의 담배를 한 개비 꺼내 입에 문다.

동욱, 불을 붙여준다.

유미: 울 엄만 결정 끝냈더라. 도장 찍겠대. 다 큰 딸내미가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데도 소용없어, 철벽이야. 너두 알지, 울 엄마랑 나 깊은 정은 없는 거.

동욱: 오래 버티셨어. 더 끌어 뭘 어째.

유미: 아빠가 서류 땜에 집에 들렀다 가는데, 어쩜 나랑도 눈 한 번을 안 마주치더라. 2년 만에 밟아보는 집구석 장판이면서.

동욱: 못 마주치신 거지.

유미: 오전부터 소낙비가 툭툭 떨어졌다. 챠, 아침밥이 다 뭐야. 우산 하날 안 챙기곤 그렇게 도망하듯 내빼더라. 쥐색 잠바 등판에 빗줄기가 쫙쫙 그어지는데……. 그거 내 눈엔 영락없이 채찍이야.

동욱: 면목이 없으신 거야. (보다가) 적당히 빨고 꺼라. 목에 안 좋아.

유미: 니네 엄만 울 엄마한테 진짜 이러면 안 되는 거지. 반칙이라고!

동욱: (한숨 쉬며) 내 말이.

유미: 생각 할수록 열 받아! 언니 언니 해가며 친한 척할 땐 언제구! 우리 집 와서 수세미니 체중계니 밑반찬이니 야금야금 뺏어가더니……. 이젠 남편까지 뺏어가?

동욱: (담배 뺏어가 끄며) 뺏어가긴 뭘 뺏어가. 아저씨가 물건이야?

유미: 엄만 아줌마 진심으로 아꼈어!

동욱: 울 엄마도 진심으로 아줌말 친언니처럼 따랐어. 친자매보다 깊은 우애, 몰라?

유미: 아아, 그렇게 우애가 깊어서 남자도 노나 먹니?

동욱: 왜 우리 엄마만 나쁜 년 만드냐? (잠시) 따지고 보면 이거 다 아저씨 잘못 아냐?

유미: 너 이제 보니까 니 엄말 쏙 빼닮았구나? 요만할 때 아저씨 아저씨 하며 엉기던 게 머리 좀 굵곤 아버지 아버지 따르더니, 이제 진짜 아버지 되게 생기니깐 기분이 영 찝찝해? 어?

동욱: 나 아저씨 미운 마음 없어.

유미: 그러시겠죠. 홀어머니 과부 청산이 다 누구 덕이려구요.

동욱: 진심으로 아저씰 아버지처럼 생각했어. 내 아버지였음 좋겠다 소원했어.

유미: 좋겠다! 니 소원대로 되고 있으니.

동욱: (서늘하게)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딴 소원 빌 일도 없었겠지.

유미: …….

동욱: (분위기 바꿔서 큰 한숨 뒤) 좋은 분이시지. 아버지 없이 크는 거 맘 쓰인다고, 어릴 적부터 세심하게 들여다봐주셨잖아. 어린이날이고 성탄절이고 꼭 누나랑 내 손 붙들고 놀이동산 가주셨고. (옛 기억에 슬쩍 웃으며) 기억 나? 우리 신밧드의 모험 탔을 때, 누나 무섭다고 내 멜빵 땡기면서 징징 울었던 거. 갑자기 딱 놔가지고 꼭지가 얼마나 쓰렸게.

유미: 아빤 그때부터 널 끔찍이도 챙겼어. 다 이유가 있었네. 친한 동생이 미혼모 된 게 안타까워 널 거둔 게 아냐. 사랑하는 여자 아들은 곧 내 아들, 그런 마음으로 널 돌봤던 거다, 울 아빠. 징글징글해.

동욱: 맞다, 열한 살 땐가. 누난 열 두 살이었고. 롯데월드 열기구 탔을 때 기억나지?

유미: 안 나.

동욱: 넌 진짜 이상해. 어떻게 그걸 기억을 못해?

유미: 그런 거 일일이 기억하고 있는 니가 더 이상해.

동욱: 그때 우리 뽀뽀했잖아.

유미: 뭐?

동욱: 누나가 먼저 와서 여기다 쪽.

유미: 웃기지마, 니가 먼저 와서 쪽 했지!

동욱: (비웃으며) 기억하시는구만~.

유미: ……영악한 놈.

동욱: (추억하며) 히야, 그랬네. 그러니까 우리 첫 뽀뽀가 고등학생 때가 아니었네.

유미: (발끈) 그 얘기 하지 말랬지!

그림=클로이

동욱: 무슨 얘기. 누나랑 나,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독서실 구석에 숨어 뽀뽀했던 얘기?

유미: 야, 김동욱!

동욱: 키스였나, 뽀뽀였나? 가물가물해. 뭐였지?

유미: 뭐였긴, 실수였지.

동욱: 충동이었고?

유미: 객기였고, 십대들의.

동욱, 얼굴이 어두워진다. 한참 회상의 필름 어딘가를 더듬더니 고개를 흔든다.

동욱: 좀 더 용길 냈어야 해.

유미: (불안해서) 그만 하자, 구질구질한 얘기라면 이제 귀가 짓무를 것 같아.

동욱: 하나만 묻자.

유미: 묻지 마.

동욱: 하나만.

유미: 안 돼!

유미, 동욱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붙잡아 늘인다.

아파하는 동욱. 손을 떼는 유미.

유미: 괜찮, 니?

동욱: 안 괜찮아. 그러니까 묻자, 좀!

유미: 묻지 마, 좀!

동욱: 이대로 묻을 일 아니잖아.

유미: 이대로 묻어질 일도 아니지. (차갑게) 그러니까 굳이 파낼 것도 없어.

동욱: 두렵니?

유미: (극도의 불안으로) 아무 얘기도 꺼내지 마, 제발 그 입 좀 다물고 있어주라, 응?

동욱: (상처받아서) 비겁하긴. 전화했어도 안 받았을 거다, 넌.

유미: 그래도 했어야 한다, 넌.

동욱: 정말 내 전활 기다렸어?

유미: 샤워할 때도 전화길 가지고 들어가야 했어.

동욱: 왜 니가 먼저 하진 않고.

유미: ……무서웠어.

동욱: 왜.

유미: (조용히) 안 받을까봐.

동욱, 유미를 끌어다 안는다. 얼른 그 품을 빠져나오는 유미.

동욱, 다시 잡지 않는다.

동욱: (힘없이 웃으며) 제일 가는 겁쟁이네. 알고는 있었지만 이건 너무 가혹해.

유미, 괴로움으로 얼굴이 일그러진다.

감정을 숨기기 위해 일어나 마네킹에게로 간다.

그저 웃음소리일 뿐인 웃음소리를 낸다.

유미: 유재석 나오는 예능 프로보다두 웃기지? 오십줄은 되는 인간들 하는 짓이, 꼭 눈에 뵈는 거 없는 철딱서니들 꼴이야. 자기들이 무슨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 그 애들두 반대만 없었어봐. 그렇게 물고 빨고 뒈지고 난리 브루스를 쳤을 거 같아? 안 된다니까 더 하고 싶은 거야. 불륜도 불장난도, 금지된 거니까 부득부득 넘고 싶은 거라구.

동욱: 우리가 불장난이란 얘긴, 이제 철마다 트는 영화보다도 지루하다.

유미: 그럼 재밌는 얘기! 나 초등학교 다닐 때, 뽑기를 무지막지 좋아했다. 이렇게 백 원짜릴 넣구 끼리릭 뿅! 튀어나오는 동그란 캡슐, 꼭 기계가 알을 낳는 거 같애. 그걸 밟아 으깨는 맛에 빠져서, 동전만 생겼다 하면 쪼르르 문방구행이었어.

동욱: 나도 소싯적 그 맛에 재산 탕진 좀 했지.

유미: (깔깔 웃으며) 응, 재산 탕진. 그래서 하루는 울 엄마가 뽑기 금지령을 내렸어. 한 번만 더 하다 걸리면!

동욱: 오른 손목을 포기해라?

유미: (절레절레) 웨딩 피치 시청권을 박탈하겠다……!

동욱: (과장해서) 맙소사! 세상에! 웨딩 피치를!

유미: 가혹한 일이었지, 소녀에겐. 하아. 생각하니까 담배 땡기네.

동욱: 줘?

유미: 너 피는 김에 한 모금.

동욱,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빨고는 유미에게 건넨다.

유미, 정말이지 꼭 한 모금을 빨아들이곤 되돌려준다.

유미: 안 된다니까 더 하고 싶은 거야. 꿈에서도 홈에다 백 원을 넣고 있어, 내가. 입 안이 바짝바짝, 수시로 손이 떨리고.

동욱: 오바.

유미: 뭐든 간절하면 그리 되는 것이야.

동욱: 몰래 한 적은?

유미: 있지! (회상에 젖어) 있지. 몰래 먹는 쪼꼬렛이 더 달잖아? (사이) 어느 날엔간 진짜 못 참겠길래, 아빠한테 통 사정을 했어. 원 없이 뽑기 해보는 게 소원이라고. 그럼 진짜 공부도 열심히 하고 아빠 엄마 심부름도 잘하겠다고 공수표를 빵빵 날렸지.

동욱: 아빠는 딸 편! 효과 있었어?

유미: 아빠가 만 원을 죄 백 원짜리 동전으로 바꿔 왔어.

동욱: (웃음을 터뜨리고 박수치며) 브라보! 아저씨답다!

유미: 그날 진짜 땅거미 질 때까지 울 동네 문방구란 문방구 뽑기는 내가 다 거덜냈다. 이만한 사과 박스가 가득 찰 때까지 뽑고 뽑고 또 뽑고.

동욱: 이야. 소원 풀이 제대로 했네.

유미, 탁자로 가 앉아 동욱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유미: 근데 이상해.

동욱: 응?

유미: 하나도.

동욱: 응.

유미: 진짜 하나도.

동욱: …….

유미: 기쁘지가 않았어. 조금도. 요만큼도.

동욱, 말없이 유미에게서 시선을 떼고 담배를 피운다.

유미, 마네킹을 바라보다 자조적으로 미소 짓는다.

유미: 실컷 만나고 실컷 자고 실컷 사랑하고. (잠시) 그 사람들, 행복해질까?

유미, 동욱의 손에 들린 담배를 뺏어 깊숙이 빨고는 재떨이에 비벼 끈다.

동욱, 간절함을 담아 유미의 어깨를 붙든다.

동욱: 열일곱 독서실 그날부터 8년이야. 널 안기까지 8년이 걸렸어.

유미: (뿌리치며 왈칵) 대체 왜 전활 안 했냐구! 별생각이 다 들더라. 난 왜 얘 전활 기다리고 있나. ……하긴 우리가 언제부터 연락 꼬박꼬박 주고받은 사이라고. 하지만 우린……. 하 웃겨, 시발. 우리가 뭐지? 우리가 뭔데? 이제 잤으니까 연락해야 된다는 건가? 정유미, 추해. 원나잇 후에 쩔쩔매는 한심한 여자애 꼴이야! 내가, 김동욱이한테. 내가…….

동욱: 후회 해?

유미: (약해지지 않으려) 그래.

동욱, 담뱃갑을 손안에서 쥐었다 놓았다 한다. 괴롭게 말을 고르는 기색이 역력하다.

동욱: ……무서웠어. 난 니 그런 대답, 그런 대답 듣는 게 무서웠어. 그래서 전화 못 했어.

유미: 동욱아.

동욱: 그날도 말했지만, 난 우리가 미쳤다고 생각하지 않아. 누나도 그렇잖아?

유미: 김동욱.

동욱: 더 빨리 너랑 안 그런 게 후회돼 죽을 것 같더라, 난. 스무 살 때라도, 아니 열일곱 때라도 우리 후딱 일 치고 막말로 임신이라도 해버렸으면,

유미: (애써 웃으며) 끔찍한 소리 마.

동욱: 그랬으면 적어도 우리가 먼저겠지.

유미: (비아냥거리며) 이게 무슨 먼저 애 가지면 이기는 게임이야?

동욱: 봐, 넌 내가 한발 다가가면 꼭 이렇게 뒷걸음질을 쳐. 내가 전활 안 했기 때문에 넌 이리 한 발 올 수 있었던 거야. 언제나. 똑같아!

유미, 마네킹을 망연히 보더니 그리 간다.

슬픔으로 온몸이 깨질 것 같지만 눌러 참는다.

감다 만 전선줄을 잡고 만지작거리더니 동욱 쪽을 돌아다본다.

유미: 이거 이대로 친친 감을 작정이야?

동욱: ……궁리 중이야. 머리는 남겨 둘지.

유미 내가 좀 해본다?

유미, 동욱이 그러했듯 진지한 태도로 두 마네킹을 친친 동여맨다.

네 줄 정도 감더니 결심한 듯 손을 멈추고 동욱을 본다.

동욱도 말없이 유미를 바라본다.

유미: 나. 정우씨한테 프러포즈 받았어. 정식으루.

유미, 동욱 가까이로 와 앉더니 블라우스 속에 감춰졌던 목걸이를 꺼내 보여준다. 줄에 반지가 걸려 있다.

유미: (무릎 꿇고) 유미씨, 우리 이제 같이 살까? 어차피 할 결혼, 몇 개월 좀 앞당긴다고 손해 볼 것도 없겠지 싶은데. (웃더니) 하여간에 멋대가리라곤 약에 쓸 것도 없어요. 그래두 뭐, 첨부터 그 점이 맘에 들었던 거니까. 오케이! 해버렸어.

동욱, 오로지 반지만을 뚫어져라 본다.

유미: ……녹겠다. 계속 그러구 볼 거야?

동욱: (쓰디쓰게) 축하해. 잘 됐네. 다이아 끼워줄 남잘 그렇게 바라더니.

유미: 땡. 다이아 아냐.

동욱: 그럼?

유미: 크리스탈.

동욱: (놀라서) 그런데 오케일 했다고?

유미: 어어.

동욱: 누나 그 새끼 사랑해?

유미: (깔깔 웃으며) 얘 좀 봐, 사랑으로 결혼을 해?

동욱: 크리스탈에 넘어갈 니가 아니니까 하는 말이야.

유미: 그래, 맞아. 크리스탈로 결혼할 거였음 죽어라고 공부하고 코 높여서 아나운서 된 보람이 없잖아.

동욱: 이마에 부채 넣고 앞트임한 얘긴 왜 쏙 빼?

유미: 개새끼. 누가 그 말 들음 나 성형 중독인 줄 알겠다.

동욱: 누가 그 말 들음 아닌 줄 알겠다.

유미: 그래, 나 중독이야! 가슴도 넣고 싶었는데, 지성미가 떨어질까 애써 눌러 참았다!

동욱: (웃으며) 지금이 딱 좋아. 내 손에 싹 들어오는 사이즈.

유미: 정우씨는 너보다 손이 커.

동욱: 시발. 샌님 같이 생긴 게. (문득) 그것도 크냐?

유미: 자, 따라해 봐. 매, 형!

동욱: 매형은 얼어 죽을. 다이아도 스킵하는 새끼랑 왜 결혼하겠단 건데?

유미: 그 사람을 알아, 나는. (반지를 만지작대며) 정우씬 완전히 자기 것이 된 거에만 투자를 해, 그게 돈이든 애정이든. 본인 소유가 됐을 때에야 비로소 빗장을 풀고 쏟아지는 타입이거든. 그 점이 난 좋아. 안심이 돼. (반지 도로 블라우스 속에 넣는다.) 이 반지를 지니고 있는 한 이제 그 사람을 비롯 그 사람의 모든 건 다 내 차지가 돼, 미래까지도. 단단히 손에 쥐어지는 내 차지.

동욱: (빈정거리며) 장기 투자가 적성에 맞나 보네. 결혼 1주년에야 받을 다이아를 바라보고 크리스탈에 보험을 드는 여자라! 역시 너 다워. 형체도 없는 감정으로 가슴 들썩일 때보다야, 단단한 돌 하날 쥐고 있는 편이 너는 행복하겠지. (벌컥 화가 나서) 누나 너 진짜 어떻게 된 거 아냐?!

유미: 속물이라고?

동욱: 속물이지! 허세지!

유미: (바로 받아서) 허영심이고? 그 대산 이제 닳아 빠져 화도 안 난다. 넌 내가 전공 상관없이 이대 택할 때도 그 말로 날 찔렀고, 다섯 달 알바해서 샤넬 2.55 손에 넣던 날도, 맞선 본지 일주일 만에 정우씰 애인 삼았을 때도 지금 그 얼굴로 날 비웃었어. 원하는 걸 얻으려고 손 뻗는 게 뭐가 나빠? 이렇게 골방에 틀어박혀 마네킹이나 주무르는 삶. 이게 꿈이고 열정이지, 너한텐? 난 아냐. 떳떳한 학벌, 폼 나는 직장, 잘 나가는 애인! 그런 게 난 필요해. 남들 앞에 네모 반듯, 반짝반짝 윤나게 닦인 나를 전시할 거야! 그리고 그 침 흘리는 낯짝들을 구경하는 거! 그게 내 꿈이야. 이게 내 추구고, 열정이고, 열망이야! (슬퍼서) 나한텐 보이는 게 진짜야. 진짜인 걸 갖겠다는 게, 그렇게 잘못된 거야?

동욱: 넌…… 어떻게 됐어. 정상이 아냐.

동욱, 벌떡 일어나 마네킹에게 가더니 전선줄을 바쁘게 동여 감는다.

그 모습을 멍청히 바라보던 유미, 다가가 동욱의 등에 살짝 기댄다.

동욱은 동요하지만 그렇지 않은 체, 전선을 감을 뿐이다.

유미: 결혼식엔 올 거 없어. 너도, 아빠도, 아줌마도, 전부 다 내 인생에서 퇴장할 캐릭터들이야.

동욱: (묵묵히 전선을 감으며) 신랑한테 니 손 맡길 아버진 필요할 거 아냐.

유미: 그게 아빠가 맡은 마지막 역할이 되겠지.

동욱: 내 마지막 씬은 이렇게 너한테 등 빌려주고선 지금이야?

유미: ……아주 아주 나중에, 에필로그 정도에 슬쩍, 아주 슬쩍 등장하는 것 정돈 고려해볼게.

동욱: 내 생각엔 말야. 이대로라면 엔딩씬이 너무 밋밋해.

동욱, 유미를 매트리스 위로 쓰러뜨리고 그 위로 무너진다. 치마 속으로 들어오는 동욱의 손을 잡아 저지하는 유미.

유미: 미친놈……. 이런 엔딩은 시청률도 안 나와.

동욱: 그래?

유미, 동욱의 위로 올라탄다.

동욱, 웃음을 터뜨린다.

동욱: 이건 광고비 좀 나와?

유미: 글쎄…….

유미, 동욱의 목을 두 손으로 감싼다.

유미: 이런 엔딩은 어때?

유미, 동욱의 목을 누른다.

동욱: 미동 않고 참아보지만 점차 숨이 막힌다.

유미의 팔을 부여잡고 힘으로 뜯어낸다.

몸을 일으켜 컥컥대며 숨을 몰아쉰다.

멍하니 허공 어딘가를 바라보는 유미.

유미: 일주일 전 널 안고 있는 내내 생각했어. 동욱이, 죽였음 좋겠다.

동욱, 뒤로 털썩 누워버린다. 크게 한숨을 쉰다.

유미: 너무 좋았거든. 니 입술이 내 몸 여기저길 닿던 순간, 니 손바닥이 내 머리카락을 헤집던 순간, 귓속에서 웅얼대는 목소리랑…… 니가 꽉 들어찬 그 느낌. 널 정말 이렇게 안고 있어도 되나.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 깨달은 것처럼) 기억 나? 육학년 때 한강 폭죽놀이. 반짝! 터진 후엔 길고 짙은 어둠뿐이야.

동욱: (혼잣말로) 반짝 행복…….

유미: 절벽을 알면서두 내달리는 말이 될까 두려웠어.

동욱: (쓸쓸하게) 왜 살려뒀어.

유미: (웃으며) 정말로 죽이면 나 두 사람이랑 다를 바 없는 거잖아? 철부지 늙은 로미오와 줄리엣. (잠시) 있지. 난 네가 몇을 상상하든, 그것보단 많은 남자를 상대해봤어. 이게 어떻게 들릴진 모르겠지만. 나 자면서 좋아본 건 니가 처음이다! 처음 알았어. 여자도 기분 좋을 수 있단 거.

동욱: 나도 처음이야, 좋았던 거…….

유미: 거짓말하면 손목 잘려.

동욱: 진짜야. 남자라고 무조건 다 좋은 줄 아냐.

유미: 몸이 꼭 맞아떨어진 모양이네.

동욱: (일어나 앉으며 유미 팔 붙잡고) 그런 게 아냐. 잘 들어, 정유미.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좋을 수 있는 거야. (설득하려고) 사랑하는 사이니까.

유미: (외면하며) 또 역겨운 사랑 타령이야!

동욱: (절박하게) 널 안는 내내 머리가 멎을 것 같더라. 너니까 이러면 안 될 것 같단 생각이랑, 너니까 이래도 된다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부딪쳤어. ……처음부터 모든 게 정해져 있었던 걸까? 우린 누군가의 경솔한 손에 들린 피규어들이고…… 우리 주인은 해피엔딩 따위엔 취미가 없어. 어떻게 생각해? 응? 너는 날 알잖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내가 모르는 순간마저 너는 알잖아? (힘주어) 단 한 순간도 널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 유미야.

유미, 동욱을 떨쳐내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소리 내어 쿡쿡 웃는다.

아니 운다.

웃는다.

아니, 우리는 그녀가 지금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다.

유미, 손을 뗀다. 울었는지 웃었는지 알 수 없다.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유미: 난 아빠 핸드폰을 몰래 뒤져보는 딸이었어. 어느 날엔 문자 수신함에 걸린 비밀번홀 풀었고. 아빠가 너희 엄마랑 그렇고 그런 사이란 걸 알게 됐어. 고등학생 때 얘기야. 너랑 키스하기 훨씬 전의 일이고. ……멍청한 김동욱. 키스였어, 바보야. (힘없이 웃으며) 아빠랑 아줌마가 그리도 긴 세월 질리지도 않고 속삭거린 문자들, 구구절절 걸작이야. 난 그 유행한 귀여니 소설 한 권을 안 읽고도 로맨스를 익혔다. '나는 너를 단 한 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 이 대산 공식이니?

동욱: 유미야.

유미: (외면하며 괴롭게) 내 이름 부르지 마.

동욱: 하나만 묻자.

유미: …….

동욱: 아니, 하나만 부탁하자.

유미: …….

동욱: 다시는 이런 부탁 안 할 거야. 니 말대로 오늘 우리 쫑났어. 끝이야, 다신 안 봐, 약속해. 그러니까 들어주라.

유미: 들어줄 수 있는 것만.

동욱: 들어줄 수 있을 거야.

유미: 말 해봐.

동욱: 말 해줘, 우리 사랑이었다고.

유미, 한참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조용히 일어나 마네킹으로 가 천천히 전선줄을 감는다.

손이 자꾸만 떨린다. 팔도 가슴도 입술도.

유미: (떨림을 누르며) 그깟 게, 그렇게 중요한 거야?

동욱: 어떤 사람들한텐, 중요한 거야.

유미: 어떤 사람들한텐, 숨이 막혀도?

동욱: 어떤 사람들한텐, 숨이 다 해도 지키고 싶은 거잖아.

유미, 잠시 손과 숨을 멈춘다.

고통스러운 속을 감추고, 전선줄을 팽팽하게 감는다.

감고 또 감는다. 감고, 또 감는다.

유미: (바람처럼 천천히, 공들여서) 사랑이었어. 그 어떤 칼보다도 쉬이 상처를 내는. 제일로 오래 가는 흉터를 새기는. 사랑이었어. 그래, 사랑이었어.

유미, 어느새 전선으로 두 마네킹의 머리까지를 전부 동여 감쌌다.

매듭을 짓고는 살짝 미소를 짓는 유미.

유미:(쾌활하게) 행복하니? (바라보다) '칼과 칼'이 좋겠다, 제목은. 너흰 영원히 서로를 겨눈 칼끝이야. 서로에게 수도 없는 흠집을 남기겠지. 흠집에 흠집이 나더라도 멈추지 못하겠지, 그만두지 못하겠지. 그건……. 보통은 너희를 '사랑'이라 부르는 까닭이야.

유미, ‘칼과 칼’ 내지는 ‘사랑’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옷매무새를 정리한다.

힘없이 굽은 등을 하고 앉은 동욱.

유미, 그를 보지 않고 탁자 곁의 가방을 들어 어깨에 건 후 미련 없는 발걸음으로 현관까지 걷는다.

현관에 놓인 구두에 발을 하나씩 넣고 잠시 그대로 섰다가, 퇴장한다.

홀로 남은 동욱 위로 서서히 내려앉는 어둠.

동욱, 벌떡 일어난다. 잠시 좁은 방 안을 서성이다 ‘칼과 칼’, 아니 그에게는 ‘사랑’일 그것 앞으로 걸어간다. 완벽하게 동여진 두 사람을 가만히 쓰다듬던 동욱, 바닥에 놓인 전원 스위치를 누른다.

환하게 불 밝힌 ‘사랑’의 모습.

꼬마전구들이 발하는 황홀한 주홍빛에 에워싸인 둘을 멍하니 바라보고 선 동욱.

어디선가 장작불 타들어가는 소리 들린다.

당선 소감 - 벼랑 끝서 잡아준 손들 …계속 고맙습니다

'슬기야, 글 써라' 하는 분께 '못 쓰겠습니다' 하고 돌아와 시작된 감기 몸살. 절절 끓는 전기장판 위에 조기 마냥 누워 규슈 6박7일 도주를 궁리했다. 연말부터 연초에 걸쳐 이 땅을 뜰 절호의 기회, 괜찮은데? 가만. 돈이 없잖아. 요즘 단기 알바는 '케이크 팔이 아가씨'가 대세네. 성탄 시즌 3일 내내 길 위에서 케이크를 팔면 10만원 획득. 후.

넷북을 끄고 휴대폰도 끈 후 이불을 머리까지 덮었다. 글 쓰는 걸 좋아하는 거랑 잘 쓰는 건 다른 얘기……악! 암전. 이런 이유로 당선 전화는 아파트 관리사무소 아가씨가 대신 받아주셨다. 에? 13단지 사는 김슬기씨요? 신춘문예요? 아가씨께 맛난 빵을 사다 드리련다.

'난 너 언젠가 일 낼 줄 알았어, 근데 좀 빠르긴 하다?' 한 최상미 어머니, '법대 나와 사법고시 패스한 거랑 비슷한 거잖아?' 한 김중배 아버지, 하이파이브해준 김종혁 동생, 야옹 최델리 동생. 내 가족 해줘 고맙습니다. 친언니 솜저메, 문주희 작가, 인텔리전트 지영, 임나진 작가, 공식 미녀 태희, 복승아언니, 맹언니, 랴옹, 근영오빠 등 동대 문창식구 모두 고마워요. 10년 지기 써니, 소울메이트 엽이, 야늘, 망고, 울동생 수호, 개쥬, 미친근, 마들경아, 이주영 감독, 정신적 지주 로찌, 뮤즈 재민이 고마워. 이만희 선생님, 이종대 선생님, 이원 선생님을 비롯한 문창과 선생님들 존경합니다. 후진 극 안에서 유미랑 동욱이 참 고생했어.

임영웅 선생님, 이강백 선생님! 벼랑 끝에서 잡은 힘센 손들이셔요, 제겐…. 죄송하고 죄송하고 계속 고맙습니다. 끝으로 전국에 계신 문우 여러분, 세상에 이런 글도 됐어요! 건필!

▲1986년 서울 출생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희곡 심사를 맡은 임영웅(왼쪽), 이강백 씨

심사평 - 선정적 소재를 재치있는 성적 판타지로

좋은 음악을 듣는 순간 어떤 정서가 우리를 감싸듯 잘 쓴 희곡 또한 그 구성과 리듬으로 어떤 정서를 생산한다. 그래서 희곡을 읽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좋은 음악을 들을 때와 같은 어떤 고양된 정서 상태에 이를 수 있다. 그러나 서툴게 쓴 희곡은 사건을 보여주기에 급급해서 어떤 2차적 정서도 스며 나오게 하지 못한다.

김현경 작 '라일락 향기의 오후'와 김슬기 작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을 최종심에 올려 논의했다. '라일락 향기의 오후'는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이야기가 그들의 아들이요 남편인 남자의 묘소를 배경으로 전개되고 있다. 죽음보다 고독이 두려운 그녀들에게서 감춰두었던 원망과 갈등이 표출되지만 끝내 화해에 이르는 드라마가 맛깔스럽게 전개된다. 그러나 이 희곡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정서는 우리나라 현대 희곡의 발생기부터 면면히 있어온 익숙한 정서였다.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은'은 선정적일 수 있는 소재를 감정 과잉이 되지 않도록 억누르는 소위 쿨한 작품 전개가 돋보인다. 남녀 두 명의 등장인물로 단조로울 수 있는 극을 리드미컬한 대사, 재치있는 행위들, 성적 판타지 등을 어우러지게 하여 발랄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오랜 논의 끝에 우리 희곡에서는 드물게 보이는 새로움, 냉정한 정서를 높이 사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을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정상미 작 '일곱째 날'과 임채영 작 '코끼리 낳는 방법'도 최종적으로 논의되었지만 단막극이 아닌 장막극에 가까워 응모 규정에 맞지 않았다.


/ 임영웅(연출가)·이강백(극작가·서울예대 극작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