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4월 19일자 조선일보엔 전화(電話)를 이용해 왕실을 사칭한 사기 사건이 크게 보도됐다. 종로 어느 금은방에 전화벨이 울리면서 사건은 시작됐다. 수화기 속 사내는 "대비(大妃) 전하께서 금비녀·금반지 등을 급히 구입하려 하시니 창덕궁으로 가져오라" 했다. 놀란 상인이 허둥지둥 준비해 창덕궁 금호문(金虎門)으로 달려갔더니 양복을 빼입은 청년이 "이렇게 늦으면 어떻게 하느냐"며 왕실 사무관처럼 소리를 질렀다. 혼이 빠진 상인에게 사내가 "전하가 고르실 수 있도록 물건을 먼저 달라"고 하자 상인은 거액의 귀금속들을 모두 건넸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 사건에서 눈길을 끄는 건 사기 수단이 전화라는 대목이다. 전화는 1896년 고종황제 때 궁궐에 들어온 뒤 1902년 민간에도 개통됐으며 1920년대까지도 평양 등 전국 각 도시에 한창 보급되고 있었다. 전화기를 '첨단 기계'로 여기던 아득한 시절부터 요즘의 '보이스 피싱'을 닮은 전화 사기가 등장한 것이다. 초창기의 '전화통'이란 주로 높은 분들이 아랫사람에게 지시할 때 쓰는 일이 많아 사기 수단으로 제격이었다. 기계 속에서 흘러나오는 얼굴 없는 목소리에 위압감을 느껴 속아 넘어가는 사람이 많았다.

한복을 입은 교환수들이 근무하는 20세기 초 전화교환국 모습. 전화는 초창기부터 문명의 이기인 동시에 범죄의 수단이기도 했다.

1927년 2월 4일자 본지엔 요즘 같은 '송금 요구' 사기가 보도됐다. 황해도 어느 실업가의 동생이 형의 거래처에 형을 사칭한 전화를 걸어 물건 대금 8천원(약 1억6천만원)을 전신환으로 입금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어지간히 어수룩한 시절이었는지 어설픈 사기가 통했다. 범인은 은행에까지 형을 사칭한 전화를 걸어 "내 동생이 대신 돈 찾으러 간다"고 미리 연락한 끝에 돈을 무사히 출금해 줄행랑을 쳤다.

남의 이름을 사칭하여 물건을 배달해 달라고 주문한 뒤 길목을 지키고 섰다가 상품을 가로채는 수법은 이런 전화 사기의 가장 흔한 유형이 됐다. 1928년 10월 19일에 일어난 사건의 경우, 범인은 인천의 포목점에 특정 양화점 주인을 사칭하여 "점원을 보낼 테니 옥양목 한 필만 보내라"고 연락한 뒤 도중에 물건을 가로챘다. 범인을 잡고 보니 겨우 20세 청년이었고 그간 100여원(약 200만원)을 이런 식의 전화 사기로 챙겨 유흥비로 탕진했다고 본지는 크게 보도했다.

당시에도 교환대를 통하면 발신 전화의 가입자를 추적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전화 사기범들은 병원 전화기를 슬쩍 쓰거나(1937년 3월 18일자), 공중전화를 이용해 범죄를 저지르며(1938년 5월 31일자) 추적을 피했다. 경찰은 늘 '엄중 단속'을 외쳤지만 오늘의 보이스 피싱이 그렇듯, 뿌리는 쉽게 뽑히지 않았다. 조선일보 1935년 3월 15일자는 전화 사기범과 욕설 전화하는 자들을 싸잡아 '전화이용 불량군(不良群)'이란 신조어로 명명해 꾸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