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서울중앙지법은 필로폰 4㎏의 밀수를 기도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중국 선양(瀋陽)지역 흑사회 간부인 조선족 정모(35)씨에게 징역 10년, 2억3500만원 추징을 선고했다. 2009년 한국과 중국의 폭력조직들이 연계해 북한산(産)으로 추정되는 필로폰을 대량으로 밀수한 이 사건은 2000년대 들어 최대 규모의 마약 사건이었다. 주범인 국내 총책은 자살했고, 밀수를 주도한 부산의 조직폭력배 Y파 고문 김모(56)씨는 최근 1심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았다.
정씨에 대한 선고 직후 서울의 안가(安家)에 은신한 A(38)씨는 검찰로부터 선고 결과를 연락받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A씨는 이 사건의 전모를 검찰에 알린 제보자였다.
한때 서울 강남 폭력조직원이었던 A씨는 2004년 연쇄살인마 유영철을 검거하는 데도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A씨는 자신이 운영하던 출장마사지 업소에 고용된 여성들이 잇달아 종적을 감추자 직접 범인을 찾아 나서 유영철 검거를 도왔다. 그는 포상금과 표창장도 받았다. 유영철 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추격자'의 주인공 엄중호(김윤석 분)의 실제 모델이 A씨였다. 이 영화에서 엄중호는 자신이 운영하는 출장안마소 여성들이 잇달아 사라지는 일이 발생하고, 한 여성을 불러낸 손님의 전화번호와 사라진 여자들이 마지막으로 통화한 번호가 같다는 것을 알아내고 범인 추적에 나선다.
그러나 A씨는 그 뒤 범죄의 늪에 빠졌다. 필로폰 밀수로 한 차례 감옥에 갔다 나온 뒤 지난해 2월 같은 범죄로 또 구속 기소됐다. '새 출발'을 결심하고 결혼한 지 한달 만이었다. 고민하던 A씨는 작년 5월 검찰을 찾아가 "가장으로서 책임을 느낀다. 마약 세계를 떠나고 싶다"며 흑사회 밀수 사건의 전모를 털어놨다.
그는 자신이 중국 다롄(大連), 선양(瀋陽)을 오가며 필로폰 대량 밀수를 알선했다고 진술했다.
서울중앙지검 강력부(부장·김희준)는 수사에 나서 일당 13명을 붙잡아 재판에 넘기는 전과를 올렸다. 주범들의 혐의 입증에는 그의 법정 증언이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정씨 등 주범들은 부장검사 출신의 변호사를 선임해 "A씨 진술밖에 없는데, A씨가 자기 형량을 줄이고 빚을 갚지 않기 위해 허위증언을 한 것"이라고 맞섰다. 증인에 대한 보복이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검찰은 A씨를 위한 '증인보호 프로그램'을 가동해 검사들조차 모르는 안가에 그를 숨겼다. 부인도 외국으로 도피했다.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지난해 12월 그는 안가 바깥으로 나가 식사하다가 청부살해범으로 추정되는 괴한들에게 칼을 맞고 머리에 상처를 입은 것이다. A씨는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정씨 재판에 3차례 증인으로 출석해 범행을 상세히 증언했다. 재판부는 "A씨가 추가 처벌과 보복 범죄를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굳이 검찰에 진술하게 된 동기와 증언 내용 등을 보면, 정씨의 범행이 충분히 입증된다"고 밝혔다. 검찰은 A씨를 계속 보호할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증인보호 프로그램
형사 공판에서 결정적인 증언을 해야 하는 증인이나 참고인에 대해 신변 위협 등의 우려가 있을 경우 증인보호 프로그램을 가동한다. 대상자가 되면 비밀리에 안가로 옮겨지고, 대검의 극소수 관계자들만 보호 대상자의 상태를 모니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