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되어 있었던 정명훈의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가 공연을 한 주 앞두고 취소됐다.

알려진 이유는 아들의 사고로 인한 병간호. 언제나 "가족이 먼저, 음악이 두 번째"라 말해온 그는 영예로운 그 자리를 마다하고 아들의 곁을 지켰다.

지난 10월 11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홈페이지에 18일부터 20일까지로 예정되어 있던 공연의 지휘자가 돌연 변경됐다는 공지를 내걸었다. 당초 예정되어 있던 지휘자는 바로 서울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정명훈이었다. 정명훈은 10월 18일부터 20일까지 베를린필과 함께 자신의 장기인 올리비에 메시앙의 과 차이콥스키의 을 지휘하기로 되어 있었다. 또 21일에는 피아니스트로서 베를린필의 악장인 바이올리니스트 가시모토 디아신과 듀오 무대를 마련할 예정이었다. 그야말로 ‘정명훈 위크’라 할 만했다.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알려졌다시피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다. 이 단체를 지휘한다는 자체만으로도 지휘자로서는 굉장한 영예로 여긴다. 더구나 한 명의 지휘자가 지휘와 연주로 한 주간을 담당한다는 사실은 꽤 특별한 일이다. 정명훈은 이제까지 네 차례 베를린필을 지휘한 경험이 있다. 그는 독일 자르브뤼켄 방송 교향악단의 음악감독 시절이던 1984년 5월, 31세의 나이로 베를린필을 지휘해 화제가 되었고, 지난 2001년 말러 으로 네 번째 지휘를 했다. 예정대로였다면 이번 공연은 다섯 번째 지휘가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명훈은 공연을 일주일 앞두고, 네 번의 공연 지휘와 연주를 모두 취소했다. 세 번의 공연은 크리스티얀 예르비가 대신 지휘를 맡게 됐고, 다아신과의 듀오 무대는 무기한 연기됐다. 이뿐 아니다. 11월에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있을 오페라 일정도 모두 취소했다. 정명훈은 라 페니체 극장에서 오페라 와 를 지휘할 계획이었다.

정명훈, 직접 세 끼 밥하면서 병간호
대개 지휘자의 갑작스러운 공연 취소는 천재지변이 아닌 이상, 건강상의 이유가 대부분. 정명훈의 베를린필 지휘 무산 소식이 국내에 처음 보도됐을 때만 해도 정확한 이유가 알려지지 않아 갖가지 추측이 있었다. 이에 대해 베를린필 측은 "정명훈 가족의 건강 문제"라고 밝혔고, 서울시향 측은 "정명훈의 셋째 아들인 정민 씨가 사고를 당했고, 정명훈은 아들을 병간호하고 있다"고 전했다. 세간의 관심은 어떤 사고였기에 정명훈이 두 달여의 연주 스케줄을 모두 취소했나에 쏠렸다. 그러던 중 정명훈의 누나이자 정민 씨의 고모인 첼리스트 정명화에게 자세한 내막을 들을 수 있었다.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정민이가 하와이 여행 중에 사고를 당해서 중상을 입었어요."
정명화는 사고 당시 상황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정민 씨가 수영을 하기 위해 다이빙을 했는데, 그때 사고가 벌어졌다는 것이다.

"바닷속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그걸 모르고 다이빙을 했대요. 바다로 뛰어든 순간 바위에 부딪힌 거죠. 다행히도 빨리 발견됐다고 해요. 만일 사고 당한 걸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그 상태로 둥둥 떠내려갈 뻔했어요."

정민 씨는 꽤 심각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담당의는 "다섯 살만 많았어도 회복이 힘들었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 아버지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달려간 것은 당연했다.

"사고가 난 직후 가족 모두 하와이로 갔어요. 명훈이는 아들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다하는 아버지인데, 공연이 중요하겠어요?"

정명훈은 예정된 모든 공연 스케줄을 취소하고 아들 곁을 지켰다. 10년 전 요리책을 냈을 정도로 요리에도 전문가인 그는 아들이 건강을 회복할 수 있도록 세 끼 식사를 손수 만들어 먹였다고 한다. 아버지의 지극한 정성 덕분에 정민 씨는 서서히 건강을 회복하고 있다고 한다.

"다행히 하와이 현지 의료진들이 훌륭하고, 가족이 곁에서 잘 돌봐주고 있기 때문에 많이 좋아졌어요. 그래도 시간은 좀 걸릴 것 같아요. 베를린필 공연은 취소됐지만, 정민이 경과가 좋아져서 오페라는 예정대로 지휘하게 됐어요. 불행 중 다행이죠."

가족이 먼저, 음악은 두 번째

정명훈이 모든 공연 일정을 취소하고 아들 곁에서 병간호를 하게 된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예전부터 "가족이 먼저"라고 말해왔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첫아이를 낳은 후 삶이 바뀌었다. 음악은 2순위로 밀려났지만, 오히려 음악을 대하는 태도에 여유가 생겼고 음악에 대한 사랑이 깊어졌다"고 말한 바 있다. 또 "가족에 대한 소중함을 모른 채 음악만 탐닉했다면, 음악이 고통스러운 존재였을 것"이라면서 "출산 후 아내를 더욱 사랑하게 됐고, 가족을 내 전부로 생각하게 됐다"고 고백했다.

정명훈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첫째 정진 씨는 건축 디자이너, 둘째 정선 씨는 재즈 기타리스트로 활동 중이고, 막내 정민 씨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다.

2007년 지휘자로 데뷔한 정정민 씨는 아버지를 꼭 빼닮은 외모로 유명하다. 지휘하는 뒷모습까지 닮았다.

2007년 지휘자로 데뷔한 정정민 씨는 아버지를 꼭 빼닮은 외모로 유명하다. 지휘하는 뒷모습까지 닮았다. 서울대학교에서 바이올린과 독문학을 전공한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지휘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랐고,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지휘 공부를 했다. 정민 씨에게는 아버지가 가장 큰 스승이다. 그래서인지 “아버지가 객석에 앉아 있을 때 부담이 된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는 아버지의 기대와 바람대로, 실력 있는 젊은 지휘자로서 자리 잡고 있다. 알로이시오 관현악단의 지휘를 맡고 있고, 최근에는 젊은 아티스트들로 구성된 디토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기도 했다. 알로이시오 관현악단은 부산 소년의집 학생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로, 정명훈은 이 사단법인 미라클오브뮤직을 통해 이 단체를 지원하고 있다.

부자는 종종 나란히 한 무대에 서기도 한다. 부자가 함께 서는 무대에서는 정민 씨가 지휘자로, 정명훈이 피아노 협연자로 나선다. 주로 기부 관련 행사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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