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례1. A씨는 한 출판 홍보대행사로부터 공짜로 책을 보내줄 테니 서점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알려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는 4개 온라인 서점에 가입한 자신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알려줬다. 대행사에서는 "비밀번호를 절대 바꾸지 말라"고 했다. 이 대행사는 A씨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이용해 수시로 신간을 주문했고, A씨 앞으로는 공짜 책들이 배달됐다. A씨는 한 출판사의 인기 시리즈물 중 1권만 세 권을 받은 적도 있다.

#사례2. 대형 서점에서 예정된 저자 강연회. 출판사 측은 '강연회에서 500권을 팔 예정'이라고 서점에 알려왔고, 서점은 이 책의 '선매출'을 500부로 인정했다. 그 결과 책은 그 주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그러나 정작 강연회에서는 책이 예상보다 적게 팔리는 경우도 많고, 무료로 배포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해도 서점은 이미 발표된 베스트셀러 순위를 바꾸지 않는다. 순위 조작에 서점도 가담하는 셈이다.

#사례3. 적발되진 않았지만 혐의가 짙은 경우도 여럿 있다. 올해 초 국내 밀리언셀러급 유명 저자의 신간이 출간되자마자 대형 서점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랐다. 책은 '출간 첫 주 4위→둘째 주 4위'를 기록하며 한 달간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들었지만 다섯째 주 들어 돌연 2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출간 첫 주의 폭발적인 반응으로 볼 때 갑작스러운 추락이었다. 사재기로도 책이 뜨지 않자 해당 출판사가 '작업'을 중단한 것으로 의심받고 있다.

사재기 수법, 갈수록 지능화

문학 작품을 주로 출간해 온 자음과모음 출판사가 자사에서 펴낸 유명 소설가들의 책을 지난해 대량 사재기(자사가 출간한 책을 구입해 베스트셀러를 만드는 행위)한 것으로 뒤늦게 드러났다. 이 사건이 공론화되자, 황석영, 김연수, 백영옥씨는 이 출판사에서 출간한 자신의 책을 절판했다.

자음과모음은 온라인 서점에서 100개 정도의 아이디로 '반복 구매'와 '중복 수령' 수법을 썼다. 사재기 수법 중 '고전'에 속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수법이 더욱 교묘해졌다는 게 출판계 지적이다. 일부 홍보 대행업체의 경우, 책 마케팅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교묘한 '사재기'까지 '대행'해 주고 있다. 이들은 공짜로 책을 보내준다며 4대 온라인 서점 독자 ID를 수백~수천 개 확보한 뒤 1인당 한두 권씩 책을 무료로 뿌리면서 감시망을 피해간다.

출판물불법유통신고센터 민혜홍씨는 "최근에는 반복 구매나 중복 수령이 아니라 일대일로 이뤄지는 사재기가 많아 사실상 적발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현재의 모니터링 방식이 매우 제한적이어서 사재기를 막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다. 교보문고 등 6대 서점에서 주간 베스트셀러 순위를 종합 20위까지 넘겨받아 펼치는 모니터링이라서 '큰 도둑'만 보일 뿐 그 바깥에서 벌어지는 사재기 적발은 내부 고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출판계는 "이번에 들통난 곳은 자음과모음일 뿐, 이보다 큰 중대형 출판사들 상당수가 사재기를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대형 서점이 사재기를 '묵인'한다는 주장도 있다. 한 출판인은 "대형 서점 입장에서는 베스트셀러를 자꾸 만들어야 서점이 출판사로부터 납품받는 가격을 낮추고, 더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다"면서 "그 때문에 사재기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다"고 했다.

불황이 사재기 유혹 키워

지난해 말 출판인회의는 출판계와 서점업계가 5000만원씩 1억원을 내 '내부 고발자를 위한 포상금제(북파라치)'를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사재기가 그만큼 만연해 있다는 방증이다. 그러나 이번 파문에도 불구, 고질적인 사재기 병폐는 쉽게 뿌리 뽑기 어려울 것이란 전망이 많다. 책을 사는 인구가 적으니, 적은 돈만 사재기에 뿌려도 쉽게 순위 조작이 되기 때문이다.

이번 사재기 파문은‘베스트셀러란 무엇인가’라는 해묵은 질문을 다시 던진다. 사재기 대행업체(또는 출판사)는 대세를 추종하는 독자의 심리를 이용해 돈으로 베스트셀러를 만든다. 저자도 독자도 그들의‘작업’에 동원된 셈이다. 사진은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코너의 모습. 기사 내용과는 무관하다.

한 출판사 대표는 "워낙 불황이라 요즘엔 대형 서점 한 곳에서 한 주에 1000권만 팔아도 베스트셀러 10위 안에 든다"고 했다. 그는 "1000만~1200만원을 들여 사재기를 한다 치자. 그러면 서점이 정가의 약 60% 책값으로 다시 출판사에 돌려주기 때문에 서점 한 곳당 실제 들어가는 비용은 500만원이 채 안 된다"면서 "4대 온라인 서점에 쓰는 광고비의 30%만 들여도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릴 수 있다"고 했다. 불황을 이기는 데는 '사재기만 한 게 없다'는 그릇된 인식이 점점 '신념'으로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솜방망이 처벌도 문제를 키운다. 사재기로 적발돼도 출판문화산업진흥법상 1000만원 이하의 과태료만 물면 아무 문제없이 책을 내고, 영업을 계속할 수 있다.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서점 몇 곳만 집중 공략해 조작을 하면 베스트셀러로 둔갑할 수 있는 현재의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며 "영화계의 영화진흥위원회처럼 공신력 있는 단체가 전국 단위 판매량을 투명하게 집계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고 했다.

파문이 확산되자 420여개 출판사가 참여하는 한국출판인회의는 '사재기를 통한 베스트셀러 조작에 관련한 입장'이란 제목의 보도자료를 내고 "사재기는 명백한 범죄 행위"라며 "처벌 조항이 과태료가 아닌 벌금형으로 엄격히 강화될 수 있도록 법·제도 개선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