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데는 많은 사람이 아니라 강철 같은 단 한 사람의 신념과 의지만으로도 가능하다는 생각을 했다. 영국 사회개혁가 로버트 오언(1771~1858)의 ‘뉴래너크 방직공장(New Lanark Mill)’을 보고 든 느낌이다.
오언이 활동하던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의 영국 노동자들은 인간이 아니라 그냥 일손(helping hands)으로 취급받았을 뿐이었다. 흑인 노예들보다 조금 나은 정도의 존재였다.
고용주들은 물론 사회 누구도 노동자들의 권익이나 노동조건, 근무환경 등에 관심이 없었다. 당시 노동환경은 필설로 다 묘사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열악했다.
그런 시대에 오언은 노동자들의 복지를 개선하면 노동자들이 더욱 열심히 일해 결국 더 많은 경영성과를 낸다는, 지금으로 보면 너무나 당연한 ‘노동자 복지’라는 개념을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시험해 성공한 위대한 선각자이다.
오언은 자신의 성공을 세상으로 들고 나갔다. 노동자의 권익에 관한 사회 각 부문의 개혁을 위해 투쟁에 가까운 노력을 했기에 더욱 위대하다.
영국 노동자들이 지금 누리는 각종 노동환경과 근무조건은 그의 활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영원히 바뀌어졌다.
오언이 이룬 개혁의 자국은 지금도 영국 각 곳에 남아 있다. 단풍이 곱게 물든 스코틀랜드 뉴래너크(New Lanark) 계곡 기슭에 위치한 10여동의 아주 절제된 조지아 양식의 단아한 석조 건물들이 오언이 자신의 이론을 시험한 공장과 노동자의 숙소, 학교들이다.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공장들은 지금은 박물관과 호텔로 개조되어 방문객을 받고 있다.
세상을 살면서 존경의 대상을 가지는 것도 큰 행복 중의 하나다. 영국에 와서 처음으로 접한 오언의 생애는 알수록 정말 놀라울 따름이었고 존경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 오랜 존경의 대상이 이룬 ‘성지’로 순례를 떠난 때문인지 런던에서 글래스고 바로 밑 뉴래너크 마을까지의 8시간 자동차 운전도 전혀 힘들지 않았다.
오랫동안 와 보고 싶었다는 마음 때문이었는지 박물관과 공장을 돌아보는 내내 경건하기까지 했다. 뿐만 아니다. 공장 중 하나를 개조한 호텔은 깊은 산골에나 들어앉은 듯 잡소리 하나 안 들려 오랜만에 중간에 한 번도 깨지 않고 편안하고 깊은 잠을 잤다. 존경과 경건한 마음가짐 때문이었던 듯했다.
오언의 뉴래너크 방직공장은 오언이 떠난 이후 계속 운영되다가 1960년대 더 이상 외국과의 경쟁을 견디다 못해 문을 닫은 이후 지금은 뉴래너크재단에서 관리하고 있다.
공장 건물에 여유 있게 만들어진 박물관에는 당시의 직접적인 흔적은 별로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공장 한편에 있는 구식 직조기계로 소량의 제품을 옛 방식대로 생산해 박물관 상점에서 팔고 있어 그나마 당시의 공장 분위기가 좀 살기는 한다.
2000명이 살아서 움직이던 때의 활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결국 어느 유적지를 가나 느끼는 거지만 이런 곳에서는 그냥 상상 속에서 그려야 할 뿐이다. 그나마 방 하나에 모아 놓은 오언의 저서와 스코틀랜드 국립박물관에서 대여해 온 오언의 귀한 유화 초상화와, 자료에 많이 등장하는 컬러 펜화 초상화 원본이 전시되어 있어 반가웠다. 한때 귀청이 떨어지게 돌아가던 공장이 너무 조용해 쓸쓸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래도 이 박물관에만 연간 8만명이 방문하고, 단지에는 20만명이 들러 간다니 결코 잊혀진 사적지는 아닌 듯했다. 재단 홍보 담당자인 제인 마스터씨는 “뉴래너크 방직공장의 관리와 보존은 이런 수입으로 충분해 정부의 보조는 받지 않는다”고 했다. 아직도 전 세계 특히 미국에서 방문객이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공장 뒤 언덕에 있는, 노동자들이 살던 5층의 아파트들에는 지금은 공장과는 관련 없는 불과 200여명의 주민이 산다. 어떻게 이 정도 크기의 건물에 한때 2000여명의 노동자와 그들의 가족이 살았는지 의아했다. 19세기 초 산업혁명 절정기에 글래스고, 리버풀, 맨체스터 같은 공업대도시들은 몰려든 노동자들을 모두 수용할 수 없어 포화 상태였다. 부모와 자식이 한 방에서 밥해 먹고 잤다. 많은 경우에 7~8명이 한 방에서 지내야 했다. 삶은 비참했다. 당시를 재현해 놓은 전시관에 가보면 오언이 제공한 뉴래너크의 노동자 아파트는 그나마 방 두 개로 이루어져 있었다. 방 하나는 부모가 자고 나머지 방에는 부엌을 겸하면서 아이들이 자게 되어 있다. 대도시 노동자들의 상황과 비교하면 이런 뉴래너크의 1가족 1주택의 주거 시설은 천국 같은 곳이었다니 200년 전 노동자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쉽게 이해가 간다.
당시 노동환경은 열악했다. 노동자들은 보통 일주일에 6일간 70~80시간을 일해야 했다. 통풍 시설이 안 된 공장 안에는 목화 먼지가 날아다니고 있어 공기는 탁했다. 여름에는 기계들의 열기로 노동자들이 질식해 실신하기도 했다. 기계 소음에 그대로 노출되어 귀가 먹는 것은 보통이었고 안전장치가 미흡해 작업 중 부상은 다반사였다. 부상을 당해도 보상은 전혀 없었다. 그냥 일을 못해 해고되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병이 나서 결근하면 일당은 받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병이 나건 부상을 당하건 돈이 필요하면 나와서 일을 해야 했기에 노동자들은 건강을 더욱 해쳤다.
당시 어린이들의 노동환경은 더욱 처참했다. 유아원이 없으니 아이를 맡길 데가 없는 부모는 아이를 데리고 공장에 와서 옆에 놓고 젖을 먹이면서 키웠다. 걸음마를 하는 나이가 되면 기계들 사이에서 놀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서너 살만 되면 엄마를 도와 일을 시작했다. 여섯 살부터는 정식 노동자가 되었다. 작은 몸집으로 전속력으로 돌아가고 있는 위험한 방적기계 밑을 곡예사처럼 돌아다니며 떨어진 실이나 천 조각을 줍는 소년소녀들의 모습은 정말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다. 몸집이 작아야 기계 밑을 잽싸게 돌아다닐 수 있고 손가락이 가늘어야 끊어진 실을 잇기 쉬워 섬세한 원단 직조에 유리하다고 해서 아이들을 고용했다. 당시 공장 내부 모습을 재현한 뉴래너크 박물관의 3D 영상을 보면 이런 현장이 생생하게 나온다. 그때는 어린이 노동이 전혀 문제가 안 되던 시절이었다.
10살에 견습공으로 노동을 시작해 20살에 맨체스터 최대의 방직공장 공장장이 될 때까지 오언은 이런 노동현장의 참상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1800년 그의 나이 29살에 장인 데이비드 데일의 공장을 인수할 때까지 오언은 관리직으로 근무하면서 노동자들을 지켜봤다.
당시 노동자들의 근무 태도도 근무환경만큼 나빴다. 술로 인한 폐해를 비롯해 절도, 태만, 기만 등을 보면 도저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정도였다. 고용자와 피고용자 어느 한쪽만을 나무랄 수가 없었다. 오언은 이 악순환을 깨는 방법으로 노동환경을 먼저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품성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 아니고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다(Not made by him but for him)”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인간은 원래 착하게 태어나는데 환경이 나쁘다 보니 악하게 되어 버렸다고 믿었다. 그래서 오언은 공장의 경영 상태를 획기적으로 개선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의 정신 상태와 생활습관을 바꾸지 않고는 안 되며, 그 시작은 노동자들의 복지를 획기적으로 바꾸는 것으로 시작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근무환경, 복지후생제도 등을 바꾸면 노동자들이 바뀌고 그러면 더 열심히 일해 결국 이익을 더 많이 내는 경영 성과가 나오게 된다고 오언은 믿었다. 뉴래너크에서 오언은 그 간단한 이론을 시험했고 결국 성공했다.
오언은 우선 노동자의 신뢰를 얻어야 했다. 첫 번째로 그가 개선한 제도는 생필품 조달문제였다. 당시 공장들은 공장 내 상점에서 조악한 물건을 비싸게 팔아 노동자들을 이중으로 착취했다. 오언은 양질의 상품을 공장에서 대량으로 직접 구입해 가격을 낮추었다. 최소한 25%는 저렴하게 노동자들이 생필품을 구입하게 되었다. 금방 노동자의 얼굴에서 화색이 돌고 옷도 깨끗해지고 가정 내의 상황도 좋아졌다.(나중에 이 제도는 생필품 공동구매조합 형태로 남아 지금도 Co-op슈퍼마켓을 영국 시중에서 볼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또 오언은 ‘영국 생협운동의 창시자’로 불리게 된다.)
그렇게 해도 자본가에 대한 노동자들의 오랜 의심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1806년 미국이 목면 수출을 금지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목면 값은 금방 천정부지로 올라 직물 생산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그렇다고 노동자를 해고할 수도 없었다. 어디 갈 데도 없는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비인간적인 일을 오언은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공장이 돌아가지 않는 동안에도 노동자들에게는 월급 전액을 지불했다. 그런 일로 인해 노동자들이 오언을 전적으로 믿고 따르기 시작하자 오언은 다음 단계의 개혁을 시작했다. 생산 증대와 양질의 제품 생산을 위해 ‘무언의 모니터(silent monitor)’ 제도를 고안했다. 4면에 다른 색깔을 칠한 나무를 해당 노동자 작업대 위에 그 전날의 실적에 따라 달아 놓은 것이다. 검은색은 나쁜 실적, 푸른색은 그저 그렇고, 노란색은 좋고, 흰색은 아주 좋다는 평가였다. 아무런 통제 없이 작업에 임하던 노동자들이 처음으로 긴장하게 되고 작업에 집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거의가 다 흑색이었으나 날이 갈수록 색깔이 바뀌어 나중에는 흰색이 아주 많이 등장했다. 결국 생산이 늘어 생긴 이익은 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투자를 보상하고도 남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이런 가시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복지에 대한 투자, 특히 노동자들과 아이들 교육을 위한 학교 건물 건설 같은 투자에는 파트너들의 반대가 심했다. 전혀 들어보지도 못하고 결과도 모를 교육에 대한 거액의 투자를 그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결국 오랜 법정 투쟁을 거치고 은행의 융자를 통해 오언은 그들의 주식을 다 사들였다. 모든 법적 절차를 끝내고 말 네 마리가 끄는 마차를 타고 뉴래너크로 돌아오는 길에 오언은 영원히 잊지 못할 광경과 대면하게 된다. 뉴래너크 수십 리 밖에 주민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말에서 마차를 분리해 자신들 손으로 끌고 가기 시작한 것이다. 진정한 감사의 표시이다. 언덕을 올라가는데도 말 네 마리가 끄는 것보다 더 빨리 올라갔다. 마을의 모든 창문과 문에는 동네의 모든 아이와 어른들이 달라붙어 손을 흔들고 있었다고 했다. 그들의 감사와 사랑과 환희가 정말 몸으로 느낄 정도였다고 오언은 고백했다. 200년 전의 얘기를 쓴 글을 읽으면서도 진한 감동이 전해 와서 콧마루가 찡할 정도였으니 당사자들은 어떤 감정이었는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오언의 전적인 경영하에 공장은 엄청난 성과를 거둔다. 그동안 투자한 금액의 4배에 해당하는 엄청난 수익이 4년에 걸쳐 나왔다. 비판하고 빠져나간 전 동업자들은 정말 땅을 칠 일이었다. 이 수익으로 오언은 다시 학교와 유아원 같은 환경 개선을 위한 투자를 시작할 수 있었다. 오언이 믿어온 간단한 이론을 성공으로 세상에 증명한 셈이다.
오언은 특히 아동들의 노동 시작 연령을 6살에서 12살로 올리고 10시간 이상 일하지 못하게 했다. 12살 이하는 유아원을 가게 하고 그 이상은 일과가 끝나면 학교로 보내 교육을 받게 했다. 올해가 출판 200주년이 되는 오언의 유명한 저서 ‘신사회관(新社會觀·A New View of Society)’에는 ‘아이들에게 매일 운동을 하게 해야 하고 중요한 과학 과목, 가정경제, 농업, 공업, 상업을 비롯한 다른 산업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가르쳐 나중에 아이들이 택하게 될 직업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습득하게 해야 한다’ ‘읽고 쓰고 셈하는 것과 문법, 그림을 가르쳐야 한다’라는 놀라운 내용이 들어 있다. 거의 현대 아동교육법을 읽는 듯하다. 뿐만 아니다. 오언은 ‘아이가 걷기 시작하자마자 유아원으로 보내져야 한다. 인간의 행복은 주로 자신의 감정, 품성, 그리고 주위 환경에 의해 정해진다. 유아일 때 이런 좋은 환경이 주어져야지 좋은 감정과 품성을 가지게 된다’라고 책에서 얘기한다.
그런 교육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했다. 부모로부터 나쁜 버릇을 배우기 전 좋은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본 것이다. 심지어는 집안 청소, 방 정리, 요리, 재봉도 배워야 한다고 했다. 영국이 이런 유의 교육을 전 국민을 대상으로 시작하기 70년 전에 오언은 이미 교육을 시작했다. 오언이 세운 유아원은 영국 최초의 유아원이다. 이래서 그를 ‘영국 최초의 조기교육자’라고 한다. 그는 공장 내 학교를 ‘성격형성 신학원(New Institution for the Formation of Characters)’이라고 이름 붙였다. 학교 교실에 들어서니 당시에 쓰던 교재들이 그대로 남아 있고 어린이들이 입었던 하얀 가운이 벽걸이에 걸려 있어 아이들이 수업을 하다 금방 집으로 간 듯하다.
어떻게 오언이 당시로는 놀라운 신사고를 가질 수 있었는지에 대한 비밀의 열쇠는 오언이 맨체스터에 온 후 공장을 인수해 직접 운영하기까지의 9년간에 있다. 오언은 당시의 사회개혁가 중에는 특이한 존재였다. 웨일스의 마구상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계속된 광적인 독서로 자신을 단련했다. 이런 독서가 그를 나중에 탁월한 이론가를 겸한 지식인으로 만들었다. 거기다가 오언은 다른 중상층 이상 출신의 동료 지식인들과는 달리 직접 현장에서 10년간 일한 노동자 출신이었다. 옆에서 보고 직접 겪은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은 젊은 오언으로 하여금 깊은 사명감을 느끼게 했다. 이런 오언의 사명감에 이론적 뒷받침을 할 중요한 삶의 계기를 나이 23살에 맞는다. 맨체스터 문학철학협회 회원 추대가 바로 그것이다. 소위 ‘Lit & Phil’이라 불리는 맨체스터 문학철학협회는 영국에서도 유명한 지식인 모임이다. 여기에 무학(無學)의 하류계급 노동자 출신이 회원이 된 것이다. 맨체스터로 온 지 단 2년 만에 맨체스터 최고의 지식인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여기서 그는 세상을 구해야 한다는 계몽주의의 사명감에 불타는 수많은 영국 엘리트 이론가들과 접하게 되고 그들로부터 많은 깨달음을 받는다. 특히 그중에도 당시 영국 최고의 지성인으로 평가받던 공리주의자 제러미 벤덤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다. 오언은 벤덤의 수많은 책을 읽으면서 영향을 받는다. 이렇게 해서 그의 시대를 앞선 독창적인 사상이 완성되는 것이다.
뉴래너크의 성공으로 오언의 이름은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영국과 유럽을 비롯해 미국에까지 명성이 퍼져 나가게 되었다. 유럽 각국의 정치인, 개혁가, 왕족들의 방문으로 오언은 일을 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심지어는 러시아의 니콜라스 황제가 직접 방문했고 자신의 총신을 공장에 6개월간 머물게 해 모든 것을 배워 가게 할 정도였다.
오스트리아제국의 왕세자도 마차를 타고 순례오듯 찾았다. 이런 반향에 고무된 오언은 자신의 공장만이 아니고 다른 공장들의 개혁운동을 시작했다. 오언은 자신의 공장 운영 방식을 다른 공장들이 따라하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개혁을 선전해야만 했다. 1813년부터 이런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인격의 형성’(1813년)과 ‘신사회관’(1814) 등의 저서를 냈다.
올해가 그 200주년인 셈이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연설을 했고 자신의 연설문을 인쇄해 영국뿐만 아니라 유럽 각국의 사회 유력 인사들에게까지 보냈다. 첫 두 달 동안 4000파운드(현재 15만파운드, 2억6000만원 상당)의 사재를 털어 넣었다. 하지만 이런 투어 중에 영국 국교인 성공회를 비롯해 사유재산, 결혼제도 같은 당시 일반적인 사회 통념을 비판했기 때문에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어 그의 활동은 동력을 잃었다. 결국 자신의 꿈을 시도해 볼 새로운 세계를 찾아 떠날 수밖에 없었다.
1827년 오언은 이미 모든 시도를 해 본 뉴래너크 공장에 흥미를 잃고 주식을 판 다음 아들 넷과 딸 하나를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자신의 거의 전 재산을 들여 인디애나주 뉴하모니에 부동산을 구입한다. 뉴하모니 실험, 즉 자신이 꿈꾼 ‘커뮤니티(Community)라고 부른 신공동체’를 시작한 것이다. 소위 말하는 ‘공산(共産) 공동체’를 실제 시험해 보려 한 것이다.
이 실험은 결국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빈털터리로 영국으로 돌아온 오언은 런던을 중심으로 급진적 개혁론자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영국 노동조합운동, 협동조합운동의 시작 단계에 아주 큰 영향을 미쳤다. 1832년 런던의 전국공정노동교환소 설립, 1834년 전국노동조합대연합, 1839년 퀸우드 협동사회건설, 공장법 창설, 빈민법 제정에 주도적으로 관여하기도 했다.
미국에서의 공산 공동체 시험 때문에 그를 공산주의자라 하는 경우가 있지만 오언은 절대 러시아 10월혁명 식의 폭력적인 혁명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오언은 인류는 점진적으로 제도권 안에서 개혁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주장한 ‘노동자에 의한 독재’는 귀족과 자본가에 의한 독재와 절대 다르지 않다고 봤다. 동시에 그는 노동자는 자신들을 직접 관리할 수 없는 존재들이라서 자기와 같은 사람이 노동자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1848년 공산당선언에서 오언은 부르주아이자 ‘유토피안 사회주의자’라고 매도당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한다.
오언은 죽기 수년 전부터 빅토리아 시대 진화론자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처럼 심령학에 빠져 지냈다. 벤저민 프랭클린, 토머스 제퍼슨 같은 이미 죽은 미국 대통령을 만났다는 주장도 했다. 1858년 11월 17일 88세의 나이로 우연하게도 자신의 생가 바로 옆 호텔에서 위대한 개혁가로서 마지막 숨을 거둔다.
그의 저서를 읽어 보면 볼수록, 행적을 찾아보면 볼수록 놀라울 뿐이다. 어떻게 200년 전에 이런 형안을 가질 수 있었는지 정말 감탄을 금치 못한다. 세상은 이렇게 밝은 눈을 가진 사람들이 이끌어 가는가 보다라고 감탄하면서 다시 8시간을 걸려 런던으로 돌아왔다. 위대한 몽상가와 같이한 행복한 1박2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