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이야기를   영원히 간직할게요”

‘맥도날드 할머니’ 권하자 씨가 지난 7월 세상을 떠났다. 가족도 친구도 없는 그녀의 마지막 순간에 한 외국인 여성이 함께 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캐나다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스물여덟의 스테파니 세자리오는 권 할머니의 “유일한 가족”이었다.

지난 10월 10일, ‘맥도날드 할머니’로 유명해진 권하자 할머니(73)의 사망 소식이 한 방송을 통해 보도됐다. 광화문과 서소문 일대의 패스트푸드점과 프랜차이즈 커피 전문점을 전전하며 노숙생활을 해 온 권 할머니는 지난 7월 송파구 거여동의 한 요양병원에서 끝내 숨을 거뒀다.

권 할머니는 2010년 7월, 방송을 통해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그 당시 20년 동안 외무부에서 근무했던 미모의 엘리트였다는 사연이 전해져 놀라움과 안타까움을 전하기도 했다.

별세 소식이 전해진 가운데 가족이 없는 권 할머니를 병원에 데려가고 마지막을 함께한 한 외국인 여성이 눈길을 끌었다. 그녀는 주한 캐나다교육원 강사인 스테파니 세자리오(28). 세자리오는 복막암을 앓고 있는 권 할머니를 지난 5월 29일 처음 국립의료원으로 데려갔다. 세자리오는 2011년 권 할머니를 처음 만났으며 올해 초부터 매주 그녀를 만나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죽기 전, 권 할머니는 세자리오에게 “당신이 내 유일한 가족이군요”라는 말을 건넸다. 외로운 권 할머니의 마지막을 함께한 그녀, 스테파니 세자리오를 만났다.

SBS <당신이 궁금한 이야기Y>에 소개되며 처음 알려진 고 권하자 할머니. 2005년 24시간 영업하는 서울 시내의 한 맥도날드 매장에서 밤을 지새는 노숙 생활로 화제를 모았다.

 언제 처음 할머니를 알았나요?
할머니를 처음 본 건 2009년이에요. 그해 처음 한국에 왔는데 광화문역 8번 출구와 청계천 인근의 한 커피 전문점 주변을 맴도는 할머니를 보았어요. 새벽 1시나 되는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나이 많은 분이 바깥에, 그것도 혼자 있어서 기억에 남았죠.
처음 대화를 나눈 건 언제인가요?
2009년에 1년 정도 한국에 있다가 다시 캐나다로 돌아갔어요. 그리고 2011년에 다시 한국에 왔는데, 그해 1월에 서대문의 한 커피 전문점에서 다시 할머니를 볼 수 있었어요. 제가 쓰레기를 버리러 잠깐 일어서는데 다른 테이블에 앉아 있는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죠. 그래서 미소를 지어 보이고 말았는데 잠시 후 할머니와 또 눈이 마주쳤어요. 그래서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했더니 바로 고개를 숙이더라고요. 30초쯤 지났을까요? 할머니가 갑자기 제 자리로 와서는 한국말을 할 줄 아냐고 물었어요. 제가 짧은 한국말로 잘 못한다고 답했는데 이번엔 영어로 "여기 자주 와요? 난 여기 매일 오는데 당신은 오늘 처음 봐요"라고 말씀했어요. 정말 놀랐어요. 영어로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요. 그러더니 이번엔 언제 또 올 거냐고 물으셨어요. "네가 좋은 사람 같아 보여서 너랑 얘기를 더 하고 싶다"고요. 그녀가 "내일?" 하고 묻기에 바쁘다고 주저했더니 "그럼 월요일? 화요일?" 하고 계속 물어서 결국 화요일에 만나자고 했죠.
그래서 화요일에 만났나요?
네. 그날 두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눴어요.
무슨 이야기를 나눴나요?
서로가 살아온 이야기요. 할머니는 외교관에서 근무했던 시절 이야기를 들려줬어요. 일본 도쿄에 살았다고도 했어요. 그날 이후로 할머니를 가끔 만났어요.
주로 어디서 만났나요?
맥도날드나 그 주변의 여러 커피숍에서요. 출퇴근할 때마다 맥도날드에 있는 할머니를 자주 볼 수 있었어요. 언젠가 한번은 음식을 사줄 테니 먹고 가라는 거예요. 괜찮다고 사양했죠. 사실 그때 운동하러 가던 길이었거든요.(웃음) 근데 계속 사주신대서 어쩔 수 없이 먹고 갔어요.
그때가 2011년인가요?
네. 그해에 5~6번쯤 할머니를 만났어요. 부활절에는 컵케이크를 만들어 갖다드리기도 했어요. 그러다 6월쯤 제가 캐나다로 돌아가게 됐는데, 깜빡하고 떠난다는 말을 전하지 못했어요. 기분이 영 찜찜하더라고요. 편지를 쓰고 싶었지만 주소를 몰랐고 전화도 할 수 없었죠. 할머니는 휴대폰이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다시 만난 게 언제인가요?
올 초 한국에 다시 오게 됐어요. 오자마자 할머니를 만나러 맥도날드에 갔는데 맥도날드가 없어진 거예요. 할머니가 자주 가던 다른 커피 전문점으로 가봤는데 거기에도 없었어요. 그래서 '다신 만날 수 없겠구나.' 생각했죠. 그러던 어느 날 출근길에 할머니를 우연히 만났어요. 고개를 숙인 채 걷는 할머니에게 "안녕하세요!" 하고 말을 건넸더니 "어머! 어머!" 하고 놀라더라고요. 저를 기억하고 있었어요. 지금은 어디에 머무느냐고 물었더니 커피 전문점을 전전한다고 하더라고요. 그 후로 매주 수요일 아침마다 할머니를 만났어요.
당신이 매주 찾아간 건가요?
네, 맞아요.
할머니를 계속 만난 이유가 있나요? 그냥 무시하고 지나쳤을 수도 있고, 한 번의 대화로 끝날 수도 있었는데 말이에요.
처음엔 할머니와 친구가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어요. 저는 그저 미소를 지었을 뿐이고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을 뿐이었죠. 할머니는 그런 저를 궁금해했고 그러다 보니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도 늘어났어요. 그렇게 점점 친구가 되어간 거죠.
혹자는 할머니에게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고 말하기도 해요. 당신의 생각은 어땠나요?
그렇게 생각하진 않아요. 굳이 특이한 점을 꼽자면 과거에 늘 얽매여 있었어요.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했고 언제나 그리워했거든요. 할머니에게 왜 집이 없는지, 가족이 없는지 알 수 없지만 미쳤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아니, 미치지 않았어요. 할머니는 오히려 똑똑했고 기억도 또렷했으니까요.
외교관에 근무했던 시절 얘기를 자주 하셨나요?
우리가 나눈 대화 중 많은 부분이 그런 얘기였어요. 정치적인 상황이 변하면서 직장을 잃게 됐다고 들었어요. 직장을 다니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했죠.
어떤 정치적인 상황이죠?
자세히 모르겠지만 아마 1980년대를 말하는 게 아닐까요? 어쨌든 할머니는 정치에 대해 잘 알았고, 어떤 이슈를 논하든지 분명한 자기 의견을 갖고 있었어요. 때로는 그게 너무 강했는데, 그게 아마 가족이 더 이상 그녀와 말하고 싶지 않아 했던 이유인 것 같아요. 물론 자세한 이유는 저도 모르지만요.
그 밖에 할머니와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요?
할머니와 서너 번 같이 저녁을 먹은 적이 있어요. 한번은 세종아트센터의 한 레스토랑에서 스파게티를 먹는데, 할머니가 굉장히 좋아했어요.(웃음) 젊었을 때는 그런 음식을 자주 먹었다고 했어요. 그렇다고 전처럼 먹지 못하는 현재를 불평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죠. 돈을 빌려달라거나 하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어요. 아팠을 때만 빼고요.
아팠을 때는 돈을 빌려달라고도 하셨나요?
일단 할머니와 나눈 취미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말씀드릴게요. 할머니는 영화를 좋아했어요. 근데 한국영화는 별로 안 좋아한다고 하셨죠.(웃음) 그 이유가 너무 슬퍼서래요. 이 개봉했을 때 같이 보러가자고 했더니 원작을 이미 (원어로) 읽었다고 하셨어요. 불어도 공부하셨던 것 같아요. 어쨌든 같이 보러 갔는데, 할머니는 그 영화가 별로라고 했어요.
너무 슬퍼서요?
아뇨. 다른 버전이 더 맘에 든대요. 할머니는 같은 할리우드 고전영화를 좋아했거든요.
아까 돈 얘기를 하다 말았는데요.
석가탄신일 무렵에 할머니가 몸이 아프다고 했어요. 신촌의 어느 글로벌센터로 가겠다고 했죠. 거기에 가면 TV도 볼 수 있고 편안한 의자에서 쉴 수도 있다고요. 커피숍에 있으면 나가라고 하는 경우가 가끔 있거든요. 그 당시에 할머니는 굉장히 아파보였으니까요. 어쨌든 신촌으로 가려면 택시를 타야 했는데 돈이 없으니 택시비를 빌려줄 수 있냐고 했어요. 그 후로 적게는 10만 원, 많게는 30만 원 정도 되는 돈을 드렸어요. 근데 계속 신촌을 오가고 잠은 커피숍에서 해결하다보니 돈이 계속 모자랐죠. 안 되겠다 싶어 강하게 말씀드렸어요. 쉼터로 가야 한다고요. 제가 드리는 돈은 궁극적으로 할머니를 도울 수 없었기 때문이에요. 할머니에게 1백만 원, 혹은 그보다 큰돈이 생겼다 할지라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할머니에게는 돈이 아니라 '쉼터로 가야 한다'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쉼터로 가셨나요?
처음엔 안 가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5월에 다시 할머니를 만났는데 그전보다 상태가 많이 악화되어 있었죠. 체중도 많이 줄었고요. 암이란 걸 직감할 수 있었어요. 저희 삼촌도 암이었는데 증상이 매우 비슷했거든요. 그래서 (커피숍 같은 데서 잘 게 아니라) 쉼터로 가야 한다고 했고, 그제야 알겠다고 했어요. 한국인 친구의 도움을 받아 근처의 쉼터 정보를 얻었고 서울역의 한 쉼터로 할머니를 데려다드렸어요.
그곳에서 잘 적응하시던가요?
아니요. 노숙자를 위한 쉼터였는데 여건이 굉장히 안 좋아보였어요. 소리를 지르거나 온몸에 멍이 든 사람들로 가득했죠. 관계자에게 할머니가 머물 수 있는 다른 곳을 꼭 알아봐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리고 얼마 후 병원으로 모셨어요. 5월 말에 입원하셨는데, 그로부터 두 달을 못 채우고 돌아가셨어요.
임종을 지켰나요?
지금의 남자친구와 첫 데이트가 있던 날이었어요. 목사님에게 문자가 왔죠. 아참, 할머니를 병원에 모신 다음 교회에 도움을 청했어요. 저 한 명만 찾아뵙는 걸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았거든요. 할머니가 자주 가던 새문안교회의 목사님이 함께 할머니를 돌보고 도와주었어요. 할머니의 말소된 주민등록번호를 연장하는 것도 도와주었고요. 어쨌든 데이트 하던 날, 목사님에게서 문자가 왔어요. '정말 슬픈 일이에요. 그렇죠?(It's so sad, right?)'라고요. 보자마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 있었죠.
소식을 듣고 어떻게 했나요?
남자친구와 함께 병원으로 달려갔어요. 그날 밤 비가 내렸는데 택시가 잡히질 않아서 종로에서부터 동대문까지 우산을 쓰고 걸어갔죠. 병원에서 시체안치실에 누워 있는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었어요. (세자리오는 눈시울이 불거지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할머니를 위해 마지막 기도를 해드렸어요. 그리고 할머니의 이야기를 영원히 간직하겠다고 약속했어요.
할머니와 함께한 순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때는 언제인가요?
같이 사직공원을 산책하던 날이 기억나요. 할머니는 벤치에 앉아 기분 좋은 목소리로 "공기가 참 좋네요. 그렇죠?"라고 했어요. 사실 그날은 할머니가 처음으로 저희 집에 찾아온 날이에요. 전에 주소를 적어드린 적이 있는데 그걸 기억하고 찾아온 거였죠. 사실 조금 당황했어요.(웃음) 근처를 지나다가 잠깐 들렀다고 하시기에, 그럼 짐을 여기 내려놓고 사직공원을 산책하자고 했어요. 항상 들고다니던 무거운 쇼핑백들을 내려놓은 할머니는 굉장히 가뿐해보였어요.
할머니가 영어를 정말 잘하셨나 봐요.
100% 유창하진 않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히 잘하셨어요. 멋진 여성이었어요.
할머니를 뭐라고 불렀나요?
(한국말로) '할머니'라고 불렀어요. 할머니가 자신을 지칭할 때는  '미스 권'이라고 했고요.
가족 이야기를 하지는 않던가요?
종종 했어요. 특히 엄마 얘기를 많이 했어요. 엄마가 해준 요리가 그립다고요. 오빠가 굉장히 똑똑하다고도 했어요. 오빠네 가족이 미국 뉴저지에 있는데 연락은 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조카를 무척이나 보고 싶어 했어요. 여동생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지만 별로 친하지 않다는 건 느낄 수 있었어요.

할머니가 당신에게 "당신이 나의 유일한 가족이군요."라고 말했다고 들었어요.
병원에 있을 때 그런 말씀을 했어요. 할머니는 저를 가족처럼 가까이 여겼던 것 같아요. "우리가 만나고 이야기했던 순간이 참 행복했다"고도 했죠. 우리는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눴거든요.

이 일이 당신의 인생에서 굉장히 소중하고 인상 깊은 기억으로 남을 것 같아요.
물론이에요. 마음속에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할 거예요. 할머니 덕분에 많은 걸 배웠어요. 할머니가 들려준 과거의 이야기를 잊지 못할 거고요. 우리는 앞만 보고 달려가며 바쁘게 살지만, 때로는 뒤도 돌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야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요.

인터뷰에 앞서 세자리오는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친 후,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많은 이들이 도와야지 생각만 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당신이 행했기 때문이라고, 그 지점에서 많은 이들이 감동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러자 그녀가 이렇게 답했다.

“저는 할머니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지 않았어요. ‘당신은 도움이 필요하니 여기 돈과 음식이 있다’라고 말하지 않았죠. 저는 그저 미소만 지어보였을 뿐이에요. 할머니에게는 대화할 친구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만약 당신이 아주 좋은 직업을 갖고 있었는데 그 직업을 잃었다고 상상해보세요. 누가 당신에게 동정심을 갖길 바라진 않을 거예요. 그래서 할머니는 도움받길 원하지 않았어요. 나중에 할머니가 많이 아프고 열악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서 약간의 돈을 건네기는 했지만, 한 번도 할머니가 불쌍해서 돈을 건네지는 않았어요. 도와줘야 할 대상이 아니라, 친구로 생각하고 다가갔기 때문이에요.”

세자리오는 할머니의 이야기를 최대한 많은 이들과 공유하고 싶다. 쓸쓸히 세상을 떠났지만 할머니의 이야기만큼은 많은 이들이 알아주었으면 하고 바라기 때문이다. 할머니와의 추억을 빠짐없이 기록한 그녀는 언젠가 할머니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고 싶단다. 권 할머니의 마지막 가는 길이 캐나다의 젊은 여성 스테파니 세자리오 덕분에 외롭지 않았기를 바란다.

[- 더 많은 기사는 여성조선 11월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