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의 눈물' 이후 최고의 사극이다." "선악의 이분법을 넘어서서 각자의 길을 다양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용의 눈물' 을 넘어선다."

KBS 주말사극 '정도전'이 작가의 지명도 부족, 익숙한 소재 등 방영에 앞선 걱정거리들을 기우로 만들며 시청률 15% 안팎을 기록하며 순항 중이다.

60부 중 18부까지 방영된 드라마는 특히 매회 방영 뒤 '대학연의(大學衍義·실제 조선 건국의 원동력이 된 제왕학의 교과서)' 등 사건 소재들이 인기 검색어에 오르는 등 온라인 반응도 뜨겁다. 정도전·이성계·이방원이 만나 역성(易姓)혁명을 이룩해가는 드라마의 힘을 짚어봤다.

14세기 고려 안에 21세기 대한민국 있다

'정도전'이 그리는 여말선초(麗末鮮初) 격동기의 권력 다툼에서 시청자들은 우리의 현실 정치를 읽는다. 당파 싸움에 여념 없는 도당, 왜구·북원·명 사이에 낀 고려 말의 처지는 파벌로 갈리고, 중국·일본 사이에서 샌드위치 신세인 지금의 한국을 빼닮았다. 부패한 위정자, 정치로부터 버림받은 백성들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역사드라마‘정도전’에 등장하는 고려 말 권문세가 우두머리 이인임(박영규·왼쪽)과 새 세상을 꿈꾸는 사대부 정도전(조재현·가운데), 변방 장수에서 중앙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이성계(유동근).

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는 "여말선초, 광복 직후 등은 시대의 흐름이 교체된 시기이기 때문에 역동성이 있어 제대로만 그린다면 언제든 드라마로 성공할 수 있다"며 "특히 새 사회의 설계자로 등장하는 정도전에 대해서는 현실에 좌절하는 중년들이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 같다"고 했다.

주인공보다 더 돋보이는 주변 인물들

여기에 중견 배우들의 열연이 시너지를 내고 있다는 평가다. 특히 이인임 역의 박영규는 최고의 발견으로 꼽힌다. 그는 원래 중후하고 단정한 이미지였지만, 순풍산부인과(1998~2000) '미달이 아빠'의 인상이 너무 강했고, 이후에도 코믹하거나 부드러운 역할을 도맡았다. 하지만 '정도전'을 통해 '노회한 권신(權臣)' 이인임 역을 완벽하게 소화하면서 "드라마 제목을 이인임으로 바꾸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시청자들의 찬사를 받고 있다.

'~했음둥' 등의 투박한 이북 사투리를 쓰는 이성계로 성공적으로 변신한 '용의 눈물'의 '태종 이방원' 유동근도 극에 힘을 불어주고 있다는 평가. 하지만 정작 주인공 정도전 캐릭터가 묻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반면 아직은 이인임과 이성계의 대립 구도가 중심이기 때문이라는 반박도 있다.

윤석진 드라마 평론가는 "조재현이 보여주는 정도전 캐릭터는 역심을 품고 갈등하는 과정을 입체적으로 보여주지 못한다"고 아쉬워했다. 드라마 역사 자문역 조경란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연구원은 "초기 정도전의 행적을 알 수 있는 사료가 거의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 창조가 불가피했다"며 "건국에 주도적 역할을 하는 단계에 들어가면 바뀔 것"이라고 말했다.

'정치란…' 말의 성찬

드라마 '정도전' 인기의 또 다른 힘으로 꼽히는 것은, 강렬한 힘을 지닌 격언 같은 대사들. '정치에 선물이란 없고, 뇌물이 있을 뿐' '힘없는 자의 용기만큼 공허한 것도 없다' '무너뜨리는 것을 할 수 있지만 그걸 세우는 것은 못한다' 등의 대사들은 캐릭터의 성격과 처한 상황을 극명하게 드러내주고 정치의 본질도 담고 있다는 평가. 국회의원 보좌관(2000~2010) 경력을 가진 정현민 작가가 참여한 것이 현실감 있는 정치 발언 양산의 주된 요인으로 꼽힌다. 정현민 작가는 "이성계 캐릭터엔 보좌관 시절 모신 한 초선 의원 모습이, 권문세가를 이끌고 있는 간신 이인임은 지금껏 봐왔던 정치 고수들의 총집합체"라고 말했다. 가령 명대사로 꼽히는 '의혹은 상대방을 감당할 수 있을 때 제기하는 것'이라는 말은, 국회 대변인실에서 묻지 마 폭로전을 벌이는 것을 보면서 작가가 문득 떠올린 대사다.

"정도전의 로맨스는 어색" 반응도

정통 사극을 표방하지만 허구도 있다. 정도전이 귀양 가서 그를 돌보는 천민부락의 딸과 인연을 맺었던 이야기는 100% 가상 스토리. 정도전이 부패한 고려왕조에 절망하는 장치로 활용됐지만, 실제 역사와 싱크로율 높은 사극에 사족(蛇足)을 단 격이 됐다는 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