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은 남북이 분단된 지 70년 되는 해다. 사람 나이로 치면 드물게 오래 살았다는 뜻의 고희(古稀)다. 그 긴 세월 동안 같은 민족이 둘로 갈라져 살아온 것이다. 남북은 그 사이 수백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을 치렀고 지금도 서로를 향해 총포(銃砲)를 겨누고 있다. 남북이 갈린 이 70년은 우리 민족이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 민족으로 통합된 이후 겪는 최장(最長)의 분단이다. 첫 번째 분열 시기였던 후삼국(後三國)시대(892~936년)는 44년 만에 끝났다.
더욱 답답한 것은 분단이 장기화하면서 이런 비정상의 역사를 정상인 것처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북의 김씨 왕조가 쇠퇴기에 접어든 1990년대 이후 한국 내부에서는 거꾸로 분단을 당연시하고 통일을 두려운 미래로 받아들이는 현상이 강해졌다. 역대 정권들은 북의 급변(急變) 사태 등을 걱정하면서도 정작 우리가 대한민국 주도의 통일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선 사실상 손을 놓아 버렸다. 통일의 당사자인 한국이 이렇게 나오자 국제사회도 한반도 통일은 결코 다가오지 않을 미래의 일처럼 여기기 시작했다. 조선일보가 분단 70년을 앞둔 올해 연중 기획 '통일이 미래다'를 시작한 것은 이 같은 나라 안팎의 흐름을 제 위치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절박함에서다.
통일로 가는 길은 어떤 어려움, 무슨 난관이 도사리고 있는지 예측하기 힘든 미지(未知)의 여정이다. 그러나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 해도 대한민국은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독일은 동·서독 통일을 발판 삼아 세계의 부국(富國)이자 유럽의 실력자로 우뚝 섰다. 25년 전 독일 통일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시점에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시작됐다. 독일은 적잖은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통독(統獨) 과정에서 최대 실수로 꼽히는 동·서독 화폐 1대1 교환이 대표적 예다. 이로 인해 통일 비용이 치솟았고, 동독인의 서독 이주를 촉발시키면서 동독의 산업 기반을 무너뜨렸다. 독일이 통일 후유증에 시달리던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 내내 세계 언론은 "독일은 유럽의 병자(病者)"라고 조롱했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 이후 정반대 상황이 벌어졌다. 이제는 누구도 독일을 통일 비용에 발이 묶인 환자 취급을 하지 않는다. 지난해 영국 이코노미스트지는 "유럽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가 궁금하면 '독일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에서 답을 찾으면 된다"고 했다. 2008년 경제 위기로 미국과 유럽 대국(大國)들이 신음할 때도 독일만은 건재했다. 20세기 전반부 50년을 독일과의 전쟁으로 보냈던 나라들이 이제는 앞다퉈 독일에 손을 내밀고 있다. 패전국 독일이 1960년대 '라인강의 기적'을 통해 1차 경제 부흥을 이뤘다면 2000년대 중반 이후에 맞은 독일의 2차 부흥은 '통일의 선물'이다.
독일 정부는 통일 후 20여년간 경제성장의 25% 이상이 값싸고 숙련된 동독 노동자의 유입 효과인 것으로 분석했다. 통일 후 10년 만에 독일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도 2배로 늘어났다. 독일 통일 전 마지막 동독 총리였던 로타어 데메지에르는 3~4일 서울에서 열린 조선일보 주최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에서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면 지금처럼 번영을 구가하는 독일은 없었을 것"이라며 "동·서독 통일이야말로 독일에 찾아온 엄청난 행운"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한반도 통일이 독일보다 더 크고 의미 있는 도약의 기회를 제공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우리는 독일 통일의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목격한 만큼 기회를 극대화하면서 실수와 잘못은 극소화(極小化)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세계적 투자자인 짐 로저스는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에서 "한반도가 통일되면 각국이 투자할 것"이라며 "통일 비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단언했다. 로저스 본인부터 투자하겠다고 했다.
대외정책연구원은 최근 남북통일에 따른 한반도 경제 통합이 동북아 경제 공동체 시대의 시발점이 될 것이라며 "통일에 따른 엄청난 경제적 효과는 한반도를 넘어 중국과 일본 등 아시아와 세계로 확산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도 한반도 통일이 이뤄지면 동북아는 경제 규모와 성장률, 노동력, 지하자원, 대학 진학률, 기술력 등에서 모두 세계 1위인 글로벌 경제 허브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엄청난 잠재력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바로 남북 분단이다. 태평양과 유라시아 대륙을 잇는 모든 물류와 정보, 인적(人的) 흐름이 고립과 폐쇄를 고집하는 북한이라는 벽 앞에서 멈춰 서 있다. 한반도 분단으로 막혀 있는 맥(脈)을 뚫으면 새로운 유라시아 시대가 열릴 것이라는 전망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미국·소련·영국·프랑스 모두가 독일 통일이 자신에게 이익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한반도 통일이 주변 주요국과 아시아 전체, 나아가 전 세계에 커다란 이익이 될 것이란 공감대를 만드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오늘은 민족이 나라 잃은 설움 속에서 조선일보가 첫 한글 신문을 발행한 지 94년 되는 날이다. 조선일보는 94년 전 창간(創刊) 취지문에서 '유럽의 대전란(1차 세계대전)이 끝을 맺자 세계인은 전란(戰亂)의 상처를 치유하고 더 잘살아보려는 일에 몰두하여 평화의 대경쟁이 바야흐로 막을 열었도다'라고 했다. 한민족과 세계인이 손을 잡고 한반도에서 정말로 '더 잘살아보기 위한 평화의 대경쟁'을 시작해야 하는 시기가 바로 지금이다. 조선일보는 분단 70년을 한 해 앞둔 올해를 국가적 차원의 통일 대비 원년(元年)으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분단 100년을 개탄하는 비극만은 막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