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이후 첫 대통령 선거를 10여일 앞두고 박정희·윤보선 후보가 뜨겁게 격돌하던 1963년 10월 4일, 조선일보 광고면에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식품 하나가 등장했다. '삼양공업주식회사'가 9월 15일 국내 최초로 출시한 '삼양라면'이다. '오늘의 화제!/ 우리의 식생활은 해결됐다!'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여성 모델이 방긋 웃으며 라면 봉지를 들고 있는 사진까지 넣었다. 이제는 한 해 국내 판매량 35억2000만개, 1인 평균 72.4개나 먹게 된 '국민 주식(主食)'의 역사가 그렇게 출발했다.
제1호 라면의 겉모습은 요즘과 같지만 광고 속 '제품 특징'은 오늘날 라면과는 사뭇 다르다. '영양가가 풍부'하며 '손님 접대용'으로도 끓여내라고 했다. '선물용에는 최고품'이라는 구절도 있다(조선일보 1963년 10월 4일자). 간편하게 한 끼 때우는 값싼 인스턴트 식품의 이미지는 어디에도 없다. 1965년 초 등장한 '내외실업'의 '뉴 라면'은 봉지 맨 위에 '특수 영양 강화 국수'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올렸다. 역시 '최고의 영양과 맛을 겸한 완전 식품'이라며 '엄마의 손님 접대' '아빠의 직장'에 알맞다고 알렸다(1965년 1월 20일자).
'최고의 영양 식품'이라는 광고에도 불구하고 초기의 라면은 별 인기를 끌지 못했다. 오랜 세월 밥만을 주식으로 삼아 온 사람들에게 비닐봉지 속 꼬불꼬불한 국수란 낯설었다. 제조회사는 '라면'이라는 제품명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광고마다 '즉석국수'라는 글자를 별도로 크게 적어야 했다. '라면'을 '羅綿(라면)'으로 오해해 옷감이나 실의 한 종류인 줄 아는 사람도 있었다. 판매가 부진하자 1964년 한 해 라면 회사 임직원들은 극장 앞이나 공원 등으로 냄비 들고 나가 '무료 시식회'까지 열면서 맛을 알렸다. 1960년대 중반엔 '롯데' '럭키' 등이 가세해 서너 개 라면이 각축을 벌였다(1967년 5월 6일자).
라면 판매를 결정적으로 늘린 것은 정부의 정책이었다. 1960년대 초반, 잦은 흉년 등으로 한 해 300만~600만석의 쌀이 모자라자 정부는 '혼식(混食)·분식(粉食) 장려'를 거국적으로 추진했다. 1969년에는 박정희 대통령 지시에 따라 서울에 '종합분식센터' 및 각 구청별 '시민분식홀'을 만들어 라면·빵 등을 실비로 판매하며, 각 도에 라면· 빵 공장을 1개씩 세우도록 했다(1969년 2월 12일자). 정책 시행과 함께 신문엔 '라면 판매 급증'이라는 구절이 보이기 시작했다(1969년 3월 16일자). 군인들이 1주일에 한 번 라면을 먹게 된 것도 1969년 상반기부터다(1969년 1월 21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