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직했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하늘이 금방이라도 뭔가를 쏟아낼 것 같았다. 지난 1월 14일. 서초동 R아파트를 찾았을 당시 날씨가 그랬다. 오후 네 시. 하교 시각이라선지, 아이를 동반한 채 단지 내를 걷는 엄마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하나같이 손을 꽉 맞잡은 모습이었다. 흐린 날씨만 빼면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바로 1주일 전, 비극이 일어난 곳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사건이 발생했던 ○○○동 앞으로 가서 ○○○호를 올려다봤다. 에어컨 실외기가 보였다. 베란다에 어스름히 비치는 블라인드도 그대로였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했다. 인기척은 한참 동안 없었고 우편함은 비어 있었다. 이내 괜한 적막함이 밀려왔다. 그 집만은 '1월 6일'에 갇혀 있었다.

1월 6일 새벽, 그곳에선…
자상한 아버지였다. 사건 발생 전날인 1월 5일까지만 해도 그랬다. 강모(47) 씨는 그날 밤 배가 아프다는 큰딸(14)에게 "빨리 나으라"며 손수 약을 타줬다. 이후 아내 이모(44) 씨에겐 직접 따른 와인을 건네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다였다.

두 잔 모두에 수면제가 들어 있었다. 강 씨는 비정한 아버지로 돌변했다. 그는 모녀가 잠들 때까지 기다리며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노트를 꺼내 메모를 남겼다.

"미안해 여보. 천국으로 잘 가렴. 나는 지옥에서 죗값을 치를게."

타 직계가족에게도 메시지를 남겼다. "통장에 남은 돈은 부모님과 장인, 장모님의 치료비와 요양비에 쓰라"는 내용이었다.

그사이 세 모녀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1월 6일 새벽 3시부터 4시 30분. 참극이 시작됐다. 그는 잠든 부인과 큰딸, 그리고 작은딸(8)을 차례대로 죽였다. 세 모녀의 목을 조른 스카프 2장을 내려놓고, 강 씨는 집에서 빠져나왔다. 새벽 5시. 자가용을 몰고 청주로 갔다. 대청호에 뛰어들기 위해서였다. 그날 오전 6시 28분. 119에는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수화기 너머로 "아내와 딸 둘을 죽였다. 나도 곧 죽을 것"이라는 자백이 들려왔다. 강 씨였다.

그러나 막상 자살엔 실패했다. 신고를 해놓고 죽지 못하자, 겁이 난 그는 다시 차를 몰고 경북 문경까지 갔다. 그동안 경찰이 출동했고, 결국 검거됐다. 낮 12시 21분 문경 농암면 대정숲 인근. 라운드 티셔츠와 검은색 운동복 바지 차림인 강 씨의 행색은 초라했다. 바지는 모두 젖어 있었다. 그는 큰 저항 없이 검거에 응했다. 손목엔 자살을 시도한 흔적이 보였다. 모두 12시간 남짓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세 모녀가 살해된 서초동 R아파트

엘리트 가장의 몰락
부인과 딸 둘을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강 씨. 검거 직후 그의 신상이 밝혀지자, 여론은 들끓기 시작했다. 일견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조건. 사람들은 일제히 물었다. "대체 왜?"

강 씨는 서울 소재 Y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누구나 알 만한 외국계 IT회사에서 재무를 맡았다. 그곳에서 상무이사까지 역임했다. 그러던 2012년, 한 대형 한의원 재무회계 담당으로 회사를 옮겼다. 당시 연봉은 9천만원. 승승장구하는 듯했다.

그러나 평탄한 삶은 오래가지 않았다. 직전 회사였던 한의원의 원장이 바뀌면서, 1년 만에 퇴사를 종용당하고 만 것. 이후 재취업을 꾀했지만 녹록지 않았다. 딸들에겐 끝까지 실직 사실을 숨겼다. 대신 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선후배들이 일하는 사무실을 전전하며 지냈다.

이마저도 여의치 않자 자택 인근 고시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최근 1년간은 월 30만원짜리, 2평 정도의 고시원 방으로 출퇴근하기로 했다. 강 씨는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주식투자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끼니는 라면으로 때웠다.

○○텔이란 이름의 이 고시원은 강 씨의 집에서 약 1.5㎞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강 씨가) 이곳에 머물면서 주로 뭘 했느냐"고 묻자 고시원 관계자는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다. 취재진이 이렇게 자꾸 찾아오면 곤란하다"며 말을 아꼈다. 이 관계자는 다만 "점잖고, 예의 바른 사람으로 보였다는 언론의 보도는 사실"이라고 전했다.

강 씨 재무상황 분석해보니
잘나가던 '상무님'의 고시원 출퇴근. 강 씨의 범행 동기는 초기 '실직 가장의 생활고'로 보도됐었다. 하지만 그의 재무상태를 살펴보면 그렇지도 않다.

우선 R아파트는 자가다. 단지 내에서도 가장 큰 평수(145.5㎡(약 45평)). KB부동산시세에 따르면 강 씨의 자택은 매매가 기준 평균시세가 11억원이다. 전세가만 해도 7억9천5백만원이다(1월 17일 기준).

아파트 인근에 있는 'S부동산' 관계자는 "R아파트는 2호선과 9호선이 인접해 있고, 각종 문화쇼핑센터 및 학군 등을 따져봤을 때 강남 최고의 학군 및 학원가"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 아파트 인근에는 서초구 내 최고 라인이라고 일컬어지는 S중학교, B고등학교 등이 인접해 있다.

강 씨는 지난 2004년 5월에 이 아파트를 구입했다. 대출을 끼지 않고 전액을 지불했다. 등기부등본도 그때까진 깔끔했다. 그러나 수입이 중단됐던 2012년 11월. 강 씨는 아파트를 담보로 대출을 받았다. 6억원의 근저당이 설정된 것으로 봤을 때, 대출금은 약 5억원으로 추정된다. 통상 아파트 담보대출은 시세의 85%(약 9억원)까지 가능하지만 그는 4억원의 여유를 남겨뒀다.

대출금은 주식투자 자금 및 생활비 명목이었다. 실제로 지난 2년간 그는 매달 생활비로 400만원을 아내에게 줬다. 매달 나간 돈에는 이자도 있었다. 대출금의 연이율을 최소 3.5%라고 잡는다고 해도, 월이자만 150만원이다. 400만원의 생활비에, 이자 150만원. 못해도 매달 500만원은 썼다는 얘기다. 500만원을 2년 동안 냈다고 하면 어림잡아도 1억원이 훌쩍 넘는다. 한편 '전문 투자자'로 재기를 꿈꿨던 강 씨의 꿈은 무산된 지 오래였다. 그는 대출을 받은 이래, 주식투자에서만 2억7천만원의 손실을 봤다.

하지만 '생활고'로 속단하긴 이르다. 손실액과 지출금을 모두 감안하더라도, 강 씨의 자산은 평균을 상회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만일 11억원인 집을 판다면, 대출금을 갚고도 6억원을 손에 쥘 수 있다. 여기에 남아 있는 주식투자 자금 1억3천만원까지 더한다면, 7억이 넘는 금액. 심지어 부인 이 씨의 통장에 남아 있던 2억원대의 잔고를 더하면, 강 씨 부부에겐 약 10억원의 자본이 있는 셈이다.

살해 동기는 상대적 박탈감?
사건 발생 열흘. 아직까지 강 씨의 정확한 범행 동기는 밝혀지지 않은 상황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그의 살해 의도를 '상대적 박탈감'에서 찾고 있다.

한 경찰 관계자는 "경제적인 측면만 놓고 봤을 땐 범행 동기를 설명하기 힘들지만, 성격적 측면으로 접근한다면 범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성공 가도를 달리던 예전의 모습에 갇혀 현재의 잇따른 실패, 추락에 자괴감을 느낀 게 범행 동기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자존심이 강하고 실패에 익숙지 않다 보니 이를 수용하고 대처하는 방법을 몰라 극단적인 선택으로 번졌다"고 분석했다.

상대적 박탈감. 강 씨에게 '상대'는 그가 속한 집단일 가능성이 크다. 서초동 S부동산의 한 공인중개사는 "이 동네 주민들은 한 달 생활비로 5백만원에서 1천만원 정도를 지출할 만큼 소비 수준이 높다"면서 "주민의 ⅓이 법조인이라는 얘기도 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나보다 나은 사람들로부터 느끼는 상실감. 과연 살해를 야기할 정도로 파급력이 있는 걸까. 권수영 연세대 교수는 "그간 사회학자들은 위기가 닥쳤을 때 자살률이 높아진다고 생각해왔지만, 경제적 호황을 누릴 때 높아지기도 한다"면서 "예를 들어, 세계 엑스포나 월드컵 개최 도시에서 자살률이 높아지는 경우"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신 나는 일이 일어나고, 괴로운 일은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 같은 상대적 박탈감은 훨씬 강한 고립감과 자괴감을 가져오고, 이것이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반대 의견도 있다. 모 법률사무소 변호사는 "범인의 진술에만 의존해서 단순히 '박탈감'을 원인으로 보고 사건을 마무리해서는 안 된다"면서 "피해자들과 범인의 통화 내역, 문자메시지, 카톡메시지까지 좀 더 구체적으로 수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범인은 자의식이 강한 사람이기에 단순히 경제적인 원인만으로는 이런 끔찍한 살인을 벌였을 리가 없다. 치정관계 관련 문제일 수도 있고, 가정 내부에서의 어떤 심각한 문제였을 수도 있다. 혹은 제3의 범인이나 공범이 있을 수도 있는 사건"이라고 언급했다.

지난 1월 9일 한남동의 모 병원에서 세 모녀의 발인식에 숨진 아내 이 씨의 어머니(강 씨의 장모)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들어섰다

형량은?
지난 1월 9일 한남동의 모 병원에서 세 모녀의 발인식이 치러졌다. 장례식장에 숨진 아내 이 씨의 어머니(강 씨의 장모)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들어섰다. "(강 씨가) 장인, 장모한테 잘했었느냐"는 취재진에 질문에 그는 힘없이 "그렇다"고 답했다. 아내 이 씨의 어머니는 짧게나마 강 씨에 대해서도 말했다. 그는 "실직 상태여서 스트레스를 받았겠지만 다른 건 없다. 그게 가장 큰 요인으로 보인다"고 했다. 이날 세 모녀의 별다른 장례절차는 없었다. 운구차량은 한 시간을 달려 서울의 한 추모공원에 도착했고, 화장 후 안치됐다.

이 사건은 지난 1월 13일 비공개 현장검증 이후 검찰로 송치된 상태다. 현재 추가조사가 진행 중이라 아직 형량이 결정되지는 않았다. 앞서 경찰은 강 씨가 수면제인 '졸피뎀'을 지난 12월에 미리 구입했다는 사실에 의거, 계획된 범죄임에 무게를 두고 수사를 진행했다.

한 경찰 관계자는 "형량은 조사 이후 검찰에서 판단할 부분"이라면서 "다만 현재까지 밝혀진 것을 보면 우발적이라기보다 계획적이고, 직계비속 살해는 직계존속과는 달리 가중처벌은 없지만 일가족을 몰살하고 피해자 수도 많기 때문에 최소한 무기징역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강 씨, 왜 그랬을까?
"부모의 지나친 기대, 큰 부담이었을 것"

권수영 연세대학교 상담코칭학과 교수는 이를 어린 시절 원가족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보고 있다. 권 교수는 "부모의 높은 기대에 부응해야만 인정받고, 만일 인정받지 못한 경험이 많다면 (남들이 보면 꽤 인정받을 만한) 성취를 이뤄도 자신의 내면에는 늘 부족한 자화상을 가지고 살게 된다"고 했다. 그는 또 "아내에게, 자녀에게, 주위 가족 모두에게 더 이상 그럴듯한 존재로 지낼 수 없을 것 같은 불안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클 경우 무시무시한 방법으로 자신의 존재의 불안을 종결하려는 행동을 취할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권 교수는 또 "강 씨가 위기 시 정작 가족들에게 자신의 약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숨기게 된 것도 이러한 원가족 경험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상대적 박탈감은 누구나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정도는 모두 다르다. 좀 더 유연하게 받아들이게 하려면,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해주는 게 필요하다.
권 교수는 "자녀에게 부모가 좋아하는 방식을 강요하고, 부모의 인정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고 지나치게 강요하다 보면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버릇을 가지게 된다"면서 "인정받기 위해서 자신의 욕구나 감정을 숨기거나 억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도 부모가 수용해준다면, 남들이 평가하는 나의 모습에 연연하지 않고 나 자신에게 당당해지는 소위 '강한 멘탈'의 소유자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권 교수는 이번 사건에 대해 "무엇보다 가족의 전반적인 유대 관계가 아쉽다"고 했다. 그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세상에는 실직 사실을 제일 먼저 가족 구성원에게 알리고, 가족의 도움과 협조를 구하는 가장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면서 "이런 경우에는 가장의 성격적 요소도 중요하겠지만, 가족 전체가 이러한 심리적 어려움을 얼마나 평소에 안전하게 공유할 수 있었는지도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강 씨가 아내에게만 실직 사실을 털어놓았다고 했는데, 좀 더 일찍 자신의 심리적 어려움을 충분히 토로하고 아내뿐 아니라 자녀들에게도 공감 받고 위로받을 수 있는 가족 분위기였다면 이러한 극단적인 참사는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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