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완 가수

지난 설날 세배를 마치고 너는 서둘러 네가 세 들어 살고 있는 집으로 가려고 일어섰지. 네가 엄마 아빠에게 내밀었던 세뱃돈 봉투를 엄마가 돌려주자 너는 말 없이 그걸 다시 받았다. "인석아 백수가 무슨 돈이 있냐? 아직은 니 세뱃돈 받을 생각 없다" 하는 엄마 말에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이고 봉투만 만지작거리더구나. 그렇게 되받은 돈봉투를 주머니에 넣기가 뭐한지 그냥 손에 든 채 너는 현관으로 향했다.

네가 거실 계단을 내려가는 모습을 부엌에 앉아 바라보니 어깨가 축 처졌더구나. 왼손엔 세뱃돈 봉투가 들려 있었고 오른손에 엄마가 싸준 빈대떡 보따리가 들려 있었지. 그 꾸러미가 짐스러워 보이더구나. 명절이면 늘 선친(先親)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고 더불어 새로 태어나 가족이 된 아기들을 만나게 되는데 하도 가족이 단출하다 보니 그런 꿈조차 호사스럽게 느껴진다.

너희들의 할아버지 세대는 나라를 찾는 일에 온 힘을 쏟았고, 너희 아버지 세대는 가난을 벗어나느라 애를 썼다. 그 모든 것이 너희들의 행복으로 이어질 줄 알았는데…. 너희 세대가 찾아야 할 것은 무엇이고 걷어내야 할 것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나라야 찾아야 했겠지만 가난을 씻어내고 경제발전을 이뤄야 한다는 구실로 너무 많은 것을 희생시킨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보게 된다. 최근 50여 년 동안에 이룩한 나라의 경제성장이 괄목할 만한 것도 사실이지만 너희들이 따야 할 과실을 익기도 전에 탐욕스럽게 앞 세대가 서둘러 거둔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기만 하다.

몇 해 전부터 명절날에 '결혼' '시집·장가' 같은 말은 금기어가 됐다. 일본 단편소설 '나라야마 부시코'에서 나이 든 아들의 혼처가 정해지자 미련 없이 앞니를 뽑아버리는 어머니의 심정에 공감하게 된다. 나이가 일흔에 가까워 아들이 멘 고려장 지게에 올라탈 날이 얼마 안 남았는데도 이빨이 성성해 매일 동네 아이들의 놀림감이 됐던 어머니가 끝내 생명의 끈을 놓지 않았던 이유는 손(孫) 없이 세상을 떠나게 되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래서 그 어머니는 죽어도 죽을 수가 없었던 것인데 혹시 지금은 우리 세대가 너희들의 혼사길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여간 걱정이 되는 게 아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너나없이 결혼을 부담스러워하는 것 같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든 자식 둔 부모 입장에서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 너희들의 혼처가 정해진다면 정말 스스로 이빨이라도 뽑고 싶은 심정이다. 어디 결혼 문제뿐이냐. 직장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요, 그나마 얻은 직장이라 해도 젊은 나이에 퇴직해야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평생직장은 고사하고 '투잡 스리잡'을 뛰어도 생활은 빡빡하기만 하다. 그런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신세에다 대고 결혼타령을 늘어놓을 수도 없는 일이다.

신발이 많이 낡았더구나. 아버지 눈에 할아버지의 신발은 늘 낡아 있었고, 할머니의 옷은 언제나 남루했지. 그분들에겐 가난이 끼니였고, 가난이 기둥이고 서까래였으니까. 하지만 너의 낡은 운동화는 아버지 눈에 낯설기 짝이 없다.

이전에는 늘 다음에 다가오는 세대에게 더 많은 기회와 더 많은 행복과 더 많은 희망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너의 낡은 운동화가 묻는다. 도대체 당신들은 무슨 일을 저지른 겁니까? 어떻게 희망을 지워 버릴 수가 있으며, 어떻게 더 가난한 세상을 만들어 넘겨줄 수가 있나요?

벼랑 끝에 선 아들아, 너희가 보는 현실이 맞다. 그렇게 험하고 바로 눈앞에 천 길 낭떠러지가 놓여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너희들의 자리가 세상의 끝인 것은 아니다. 날아오르자.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날 기회인 것이다. 거친 싸움과 무거운 탐욕을 벗어 버리고 신인류로 도약할 기회다. 엄마처럼 안 살겠다던 너희 누이들의 각오를 다시 생각해 보거라. 너희에겐 아버지처럼 살지 않을 용기와 자유가 있다.

지혜는 꼭 옛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직과 합리가 새로운 지혜를 짜는 날줄과 씨줄이 돼줄 것이다. 너희 세대는 유사 이래 가장 강력한 과학의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 과학은 새로운 문명의 도약대를 마련해 줄 것이다. 이기심을 버리고 전 인류를 생각하는 삶을 꿈꿔라. 너희는 신인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