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엄마. 집에선 뛰댕기지 말고 꼽발로(까치발로) 다녀야 해. 아래층 시끄럽다잉."
본사 이전으로 서울에서 전남 나주 혁신도시로 일터를 옮긴 한전 직원 김모(32)씨는 다섯 살 딸아이의 '유창한' 전라도 사투리에 놀랐다.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웠느냐'는 질문에 아이는 웃으며 "워메 여는 전라도랑께"라고 답했다. 회사 근처 어린이집에 맡긴 지 석 달쯤 된 날이었다. 김씨는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회사 복지팀에 전화를 걸었다. "어린이집 선생님 좀 바꿔주시면 안 될까요?"
지난해 7월 경남 진주 혁신도시로 이전한 한 공공기관 사원복지팀 이모(28)씨는 '어린이집 선생님을 서울말 쓰는 선생님으로 구해달라'는 워킹맘 직원들의 집단 민원에 시달렸다. 엄마들은 "회사 내 어린이집에 다녀온 우리 애 말투가 달라졌다"고 아우성이었다. "엄마, 치워주세요"라고 말하던 아이가 "엄마야, 치아라~"라고 말하기 시작하자 엄마들이 단체로 움직인 것이다. 이씨는 "처음 말을 배우는 자기 아이가 표준어를 익혔으면 하는 엄마들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지방에서 완벽하게 서울말을 쓰는 선생님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라고 말했다.
공기업들의 지방 이전이 속속 마무리돼가는 가운데, 지방으로 내려간 회사마다 '표준어를 구사하는 어린이집 선생님 구인' 민원이 제기되고 있다. 이전 기업들 대부분은 사원 복지 차원에서 직장 어린이집을 두고 있는 상황. 학부모들은 어린이집에 직접 그런 요청을 했다가는 '극성 엄마'로 찍혀 아이가 불이익을 받을까 걱정해 "회사가 해결하라"고 등을 떠밀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3월 울산광역시로 이전한 근로복지공단이 본사 이전에 따른 '사원 복지 간담회'를 열었을 때도 어린이집 선생님의 표준어 구사 문제가 핫 이슈였다. "현지에 융화하기 위해선 사투리도 필요하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말을 배우는 아이들에겐 표준어 쓰는 선생님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공단 이전과 함께 서울에서 울산으로 내려온 박모(38)씨는 "아이 말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예컨대 집 안에 떨어뜨린 동전을 주워든 네 살배기 아들이 '아빠 이거 널찟다(떨어졌다), 맞제?'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공단 관계자는 "사투리를 최대한 쓰지 않는 선생님들을 구해서 부모들을 달래고 있다"고 말했다.
3년 전 전남 나주로 이전한 우정사업정보센터 직원들도 비슷한 민원을 제기 중이다. 서울에서 나주로 내려온 김모(35)씨는 "아이들 억양이 미묘하게 달려졌다"며 "아이들은 말투를 스펀지처럼 흡수한다"고 걱정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공기업 본사가 이전하는 지역 어린이집·유치원들은 '표준어를 구사하는 선생님'들을 확보하기 위해 전에 없이 애를 쓰고 있다. 나주 혁신도시의 어린이집 원장들은 인근 광주시에 위치한 대학·전문대학 유아교육과에 "표준어 사용 가능한 선생님들을 우선 추천해달라"며 요청했다. 요청을 받은 대학들도 정규 과목 중에 '표준어 사용의 중요성'을 더 강조하기 시작했다. 광주 동신대 유아교육과 이승은 교수는 "전공수업인 유아언어교육 수업 시간에 '아이들은 선생님의 언어 습관 전체를 흉내 내며 언어를 습득하는 만큼 되도록 표준어를 올바르게 사용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고 말했다.
아이를 둔 엄마 사원들은 사투리를 포함한 교육 여건 문제로 아예 이직까지 고려하는 경우도 있다. 올해 12월 강원도 원주로 본사가 이전하는 도로교통공단 직원 이모(33)씨는 "취업난 때문에 선뜻 결정을 못 내리고 있지만 나 때문에 아이 교육에 해가 되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며 "주변에 이직을 고려하는 엄마가 많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