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하지 않은 ‘부전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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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한 대학교 기숙사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스무 살 새내기들의 추억일기가 한 권의 소설로 공개됐다. 때묻지 않은 스무 살의 기록장은 더없이 유쾌하고  술술 읽히기까지 해 책장 넘어가는 속도가 절로 빨라진다. 김갑수는 아들의 책을 두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밤을 새우고 다음 날을 또 새워버렸다”며 사심 가득 칭찬한다.

-책이 나온 배경이 궁금한데요.

김갑수 사실 아들이 소설 쓴다 그러니까 내가 좀 우습게 알았어요. 글 쓰는 쪽 애가 아니었거든요. 대학 전공도 사회과학 분야인 데다, 초등학교 때 글 좀 잘 썼다는 얘기 듣는 건 그냥 어릴 때 얘기잖아요. 그러다 지난해 추석 때 가족끼리 홋카이도로 여행을 갔거든. 첫날 좀 보라고 해서 봤는데, 내가 굉장히 감탄을 했어요.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할까 하다가 아예 그냥 책으로 내버리자고 제안했죠. 그래서 출판사에 원고를 보냈는데 너무 뜻밖의 일이 벌어진 거야. 한 1주일쯤 지나서 거기 부사장과 편집부 직원 4명이 계약하자고 득달같이 와버렸어요.

-출판사에서는 김갑수 아들이라는 점을 노출하고 싶어 했을 것 같은데요. (책 앞날개에는 문화평론가 김갑수의 아들이라는 정보가 기재되어 있지 않다.)

김율 출판사 편집부 직원분들과 여러 번 미팅을 했는데, 마침 20대를 겨냥한 책을 기획하고 계셨대요. 그러던 차에 제 책을 보셨고 그게 기획 의도와 잘 맞았나 봐요. 그런데 '김갑수 아들'로 세상에 나오고 싶진 않아서 제가 극구 반대를 했어요.

김갑수 나는 아주 긍정적으로 봤던 게, 출판사에서는 일단 작품이 좋았던 거예요. 대개 출판사들이 판단을 신중히 하는 이유가, 책 한 권 내려면 기본적으로 비용이 꽤 들잖아요. 그래서 무명한테 쉽게 계약하자고 안 하거든요. (근데도 계약하자고 달려왔으니) 어쨌든 초기 단계에 순항을 했죠.

-이 소설을 언제 처음 쓰기 시작했죠?
김율 2014년 여름방학에 시작해서 다 쓰기까지 한 6개월 걸렸어요. 여행 가서 아빠에게 보여드린 건 절반 정도 썼을 때고요. 사실 소설을 쓰고 싶은 마음은 늘 있었어요. 굉장히 막연했는데 장난 삼아 써볼 계기가 생겼죠. 대학 신입생이던 스무 살 1년을 기숙사(연세대학교 송도캠퍼스)에서 보냈는데, 그때의 추억이 너무 즐거워서 그 시절을 친구들과 (책으로) 돌려보려고 재미로 쓰기 시작했어요. 근데 연결짓다 보니까 서사 구조가 만들어질 것 같더라고요. 그럼 아예 소설화해보자, 해서 픽션(허구의 소설)으로 만들어보게 됐어요.

-기숙사에서 보낸 1년이 굉장히 의미 있는 시간이었나 보네요. 어디까지가 허구고 어디까지가 실제 있었던 일인가요?

김율 배경과 인물은 그곳(기숙사)이에요. 사건은 제가 만들어낸 게 많고요. 예를 들어 책 초반에 등장하는 '빨간 아이'도 그중 하나예요. SNS를 통한 감시를 빗댄 거거든요. 저희의 이야기를 토대로 제가 요새 느끼는 것들을 넣었어요.

-아빠에게 처음 소설을 보여줬을 때 반응이 어땠나요?

김율 처음으로 아빠가 '놀라워'하셨어요. 그전까지는 아빠가 놀라신 적이 없어요. 저는 그냥 평탄한 길을 걸어온 학생이었거든요. 근데 그때는 '뭐지?' 하고 좀 놀라시는 게 보였어요.

-이 부분은 이런 방향으로 수정하는 게 좋겠다, 식의 조언도 많이 해주시던가요?
김율 네, 조언을 많이 해주셨죠. 특히 문장적인 걸 많이 배웠어요. 아빠가 시인이긴 하지만 시보다는 칼럼을 많이 쓰시잖아요. 그래서 문장의 기본을 많이 배웠어요. 아빠의 조언과 제 의견에 마찰이 일기도 했지만요.

-어떤 마찰이요?
김율 아빠는 기본적으로 시인이에요. 시에서 시작했고 이상주의자적인 면모가 있어요. 근데 저는 아빠랑 굉장히 달라요. 산문적인 사람이고 엄청 현실적이에요. 한번은 제 글을 읽고 첨삭하시다가 소설에 대한 토론까지 간 적이 있어요. 아빠는 제 소설에 좀 더 시적인, 언어적으로 아름다운 문장들이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입장이고, 저는 그런 걸 좀 배제하고 싶다는 주의예요. "언어적으로 너무 예쁜 데에 치중하기보다 나는 서사가 중요하다"라고요. 

-처음 아들 소설을 읽었을 때 기분이 어땠어요? 평론가 입장에서든 아빠 입장에서든 감회가 새로웠을 것 같은데요.

김갑수 여행지에 가면 피곤하니까 호텔방에 들어가자마자 금방 잠들거든요. 그래서 얘 글을 앞에만 좀 보려고 했는데 그날 꼴딱 새워서 끝까지 보고 다음 날 또 봤어요. 일단 이야기가 재밌었고, 기본적으로 '말'이 됐던 거예요. 누구나 젊은 날의 충동으로 집적집적해본다는 것 중 하나가 글 쓰는 거거든요. 과거에 남의 글을 심사해보면, 대부분의 심사위원이 그렇지만 앞에 2~3쪽 읽으면 되겠다, 안 되겠다 판단이 끝나요. 근데 얘 글은 얘기가 돼서 끝까지 읽게 됐단 말이죠. 글쟁이나 작가로서의 아들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기대도 안 했어요. 애 엄마한테 방에 틀어박혀 소설만 쓴다는 얘기를 들었을 땐 '그냥 충동 때문에 폼으로 쓰는가 보다' 했다가 (글을 읽고 나서) 그걸 넘어서 있다는 걸 깨닫게 됐죠. 

-그래서 출판을 권하게 된 건가요?

김갑수 대작가가 되는 많은 사람이 10대 후반이나 스물 한둘일 때 글을 막 써내요. 그것도 아주 지난한 퇴고 과정을 거친 게 아니라 후닥닥 써버린 걸로 바로 출발이 되거든요. 그런 가능성이 있나 하고 출판을 권유했죠.

-아버지가 문화평론가이자 시인이라는 점이 본인이 글을 쓰는 데 도움으로 작용할 수도, 부담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김율 장단점이 있는데 일단 계속 물어볼 수 있는 게 장점이에요. 외부 평론가분들에게 사정사정해서 한 번 봐달라고 할 수도 있는데 한 다리 건너면 부담스럽잖아요. 그분들에게도 일이고요. 근데 저는 아빠한테 거의 챕터 단위로 좀 봐줘, 봐줘 하면서 귀찮게 할 수 있으니까요.
단점은 제가 늘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기도 한데, 아빠는 제 글에 대해 결코 객관적일 수가 없어요. 자식의 글이기 때문에 좋게 평가할 수밖에 없죠. 아빠가 잘 평가해주는 건 사심이 많이 들어갔겠구나, 라고 애초부터 생각하고 있어요.

-아빠가 평소 쓴소리하는 스타일은 아닌가 봐요.

김율 쓴소리 많이 하시죠. 대외적인 김갑수의 이미지와 아빠로서의 김갑수의 이미지는 굉장히 달라요.

-본인이 생각하는 아빠의 대외적 이미지는 어떤 거고, 실제 이미지는 어떤데요?

김율 대외적인 이미지는 우리 사회의 자유로운 영혼이잖아요? 근데 실제로는 전형적인 학부모세요.(웃음)

-제가 지난해 인터뷰한바 김갑수 씨는 자녀 교육에 거의 관여하지 않는 그런 아버지였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김율 사사로운 터치는 안 하시는데 자식한테 투영하는 기대치나 바람은 일반적인 학부모죠. 세속적 성공을 바라는.(웃음) 제가 아빠 지인들과 한 번 술을 마신 적이 있는데 다들 배신자라고 그러더라고요. 자유주의자처럼 행동해놓고 자기 아들한텐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요.

-예를 들면 어떻게요?
김율 대외적인 아빠의 이미지는 입시에 초연할 것 같은 사람이잖아요. 내면을 가꾸고 이상을 좇고 이런.(웃음) 근데 실제로는 입시로 같이 지지고 볶았죠. 어느 대학은 커트라인이 어떻더라, 내신이 이 정도면 이 학교는 가능성이 있다 등 아빠 입에서 나오지 않을 것 같은 소리가 많이 나왔어요.

-아들 얘기에 공감하세요?
김갑수 내가 저 정도로 입시에 열광한 아버지…였나 보다.(웃음)

-겉으로는 그렇게 '자유영혼'이시면서!
김갑수 자유영혼…, 뭐가 자유인지 모르겠어요. 얘한테 공부 좀 하라고 푸시를 한 것도 자유의 획득 과정이거든요. 자유로워지려면 한국 현실에서 불가항력적으로 해야 하는 것에 대한 강조였죠.

김율 근데 제가 이 말에 동의해서, 아빠의 기대와 간섭에 저항한 적은 없어요.

김갑수 '간섭'은 안 했다. '기대'는 했지만.

김율 저도 자유로워지려면 뭔가를 갖춰야 된다고 생각해요. 현실적인 관점에서 보면요. 중고등학교 때도 공부를 잘하면 터치를 안 하니까 자유로웠어요. 그런 식으로 뭔가 이룰 때 얻는 자유가 있잖아요. 아빠가 그런 것들을 강조하시면 저도 가끔은 듣기 싫을 때가 있었지만 거시적으로는 동의를 했기 때문에 반항하고 반발하고 그런 건 없었어요.

최고 수준의 공연, 전시, 책…
문화 교육에 ‘올인’

사실 TV 속 김갑수는 외관부터 자유분방 그 자체다. 느슨하게 묶었다 올백으로 넘겼다 그야말로 ‘스타일링’이 가능한 긴 머리는 물론 매일같이 바뀌는 뿔테 안경도 그의 이미지를 대변한다. 이런 그가 누구보다 자녀 교육에 열혈인 학부모라니. 새벽 2시에 대치동 학원가에서 집으로 아들을 픽업하는 건 물론, 클래식 공연이며 유수의 전시까지 아들을 위해 투자하지 않은 것이 없다. 아들은 그런 아빠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글 쓰는 재능이 어느 날 갑자기 생겼을 것 같진 않은데, 아무래도 평론가이자 시인인 아버지의 영향이 있었을까요? 

김율 아빠 글은 잘 안 보는데, 책을 읽으라는 압박은 늘 있었어요. 제가 스무 살 때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놀았거든요. 촌음을 아껴서 놀았는데, 아빠가 학점 따라는 얘기는 안 해도 책 보라는 말은 늘 하셨어요. 그래서 조금씩이라도 독서는 계속 했던 것 같아요.

김갑수 책을 뭘 보냐? 사실 (제가 문화평론가이다 보니) 저희 집으로 모든 종류의 책이 날아와요. 가령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같은 좋은 책도 세트로 오고요. 그러니까 다른 가정에 비해서 좋은 책을 읽을 수 있는 여건은 많이 만들어져 있죠. 그거에 비해서는 뭐, 거의 책을 안 보더라고. 왜냐면 나 초중고 시절에는 언제나 책 보는 게 일이었거든요. 옛날 우리 때와 비교하니까 책을 너무 안 본다고 생각했어요. 또 하나는, 기질이라는 게 집안에 있으니까 '얘가 인문적 성향의 사람일까?' 하고 봤더니 아니야. 그 과가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문화 영역에 자리를 잡지는 않을 거라고 봤어요. 그런데 글을 쓴다기에 뜬금없었죠.

-학창시절에 김갑수 씨는 어떤 아버지였나요? 집보다 작업실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데다 어마어마한 LP 수집가에 커피애호가이기까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아빠잖아요.

김율 아빠가 서운하실 수도 있는데, 사실 제 뇌리에 아빠라는 존재가 그렇게 강하게 박혀 있지가 않아요.(웃음) 독특한 아빠인 건 맞는데, 그렇다고 사춘기에 막 싫어하거나 혹은 너무 존경하거나 그런 건 아니었어요.

김갑수 그건 일찍이 알고 있었어. 얘 학창시절에 쓴 일기장이나 기록장을 보면 거기 내 이름이 등장한 적이 거의 전혀 없어요. 엄마 얘기는 틈틈이 나오는데 나는 없는 사람이더라고. (옆에서 아들이 웃는다.) 보통은 아비가 어디서 드러나는 사람이 되면 그게 자기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자랑할 수도 있고. 근데 전혀, 내가 나오는 프로그램은 완벽하게 안 보더라고. 애 엄마도 점점 얠 닮아가서 내가 뭘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더라고요. (좌중 웃음)

-섭섭하진 않으세요?

김갑수 서운해도 어쩔 수가 없죠. 얘는 모르겠지만 나는 기억하는 건 무지하게 많아요. 한번은 중학교 때 얘가 나한테 크게 삐진 적이 있어서 (화를 풀어주려고) 인천에서 배를 한 척 빌려서 별 생 쇼를 다 한 적도 있고요.

김율 전 생각도 안 나요.(웃음)

김갑수 음악을 좋아하라고 내가 얘 이름을 '율'이라고 지었어요. 음대를 갔으면 좋겠다는 꿈이 있었는데, 그때 마침 내가 문화일보 공연 담당 객원기자였어요. 기자 출입증이 있으니까 모든 공연의 제일 좋은 자리를 갈 수 있었고 티켓도 많이 왔어요. (어린 아들을) 무지하게 데리고 다녔거든요. 외국도 필사적으로 데리고 다녔어요. 보면 영향이 있으려니 하고요. 그게 나름대로 고민하고 노력한 것들이거든. 근데 얘는 반응을 안 하더라고. 지금도 대학교 1~2학년이면 외국에 많이 나가고 싶어 할 수 있는데 그런 것에도 관심이 없어.

김율 그래도 그런 문화 교육(의 영향)이 남아있어요. 어릴 땐 클래식 공연 가는 게 정말 싫었거든요. 금요일에 공연을 간다고 하면 목요일부터 짜증이 났어요. 근데 그게 어쨌든 안에 쌓여서 발현이 돼요. 어제도 제 돈으로 티켓을 사서 예술의전당에서 하는 시벨리우스 교향곡 공연을 다녀왔는데, 어쨌든 저는 엄마 아빠가 한 교육 중 남들에게 추천하고 싶거나 미래의 제 자식에게도 하고 싶은 게 문화 교육이에요.   
 
김갑수 미술관도 무척이나 데리고 다녔어요.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모르지만, 학원을 주야장천 다니게 하지 않는 대신 부모가 뭐라도 해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지금 말한 문화적 환경을 만들어주는 거였고 또 하나가 '영어'였어요.

"자유영혼…, 뭐가 자유인지 모르겠어요. 얘한테 공부 좀 하라고 푸시를 한 것도 자유의 획득 과정이거든요. 자유로워지려면 한국 현실에서 불가항력적으로 해야 하는 것에 대한 강조였죠."

-전형적인 ‘대치동 아빠’였네요.

김갑수 캐나다 아줌마가 꽤 오래 (아이 곁에 과외 교사로) 붙어 있었어요. 그리고 어릴 때부터 미국 책도 세트로 사다줬고요. 내 친한 친구들이 여덟 명이거든요? 나까지 두 명 빼면 다 대학 교수들이에요. 마누라도 그래. 근데 자식들이 이상하게 다 좋은 대학을 못 갔어요. 그게 왜 그러냐면, 자기들도 때 되면 공부를 했으니까 자기 아이들도 그럴 줄 알았던 거예요. 근데 그게 아니거든. 우리 때는 아무것도 갖춘 게 없어서 '공부라도 해야지' 하는 절박함이 있었는데, 지금은 방치되면 놀아버려요. 내가 결혼을 늦게 했고 애도 늦게 낳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자각을 한 거야. 다만 적어도 미련하게 공부를 푸시해봐야 효과 없다는 건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지금 말한 문화적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 토론 많이 하는 것, 영어 가르치는 것만은 놓지 않았어요. 그러느라 돈 많이 들었는데 모르더라고. (좌중 웃음)

-학원은 안 보냈나요?
김갑수 민사고(민족사관고등학교) 대비반 때는 다녔죠. 근데 일반적으로 선행학습과 학습지 시키는 건 전혀 안 했어요.

김율 중2, 중3 때는 학원에서 살았어요. 전형적인 '대치동 키드'였죠. 학교 끝나면 바로 학원으로 가서  새벽 2시에 끝날 때까지 있었으니까요.

김갑수 나하고 내 처가 만날 학원 앞에 가서 기다렸어요. 끝나면 데리고 오느라고.

김율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기형적인 한국의 문화인 것 같아요.

김갑수 민사고 보내려고 꽤나 노력을 했어요. 시험이 3단계인데 파이널까지 갔어요. 우리는 된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어요. 그래서 강원도 횡성 가서 2박 3일 동안 (아들이 시험 다 치를 때까지) 대기하면서 기다리는데, (다른 학생들의 경우) 일가족이 다 와 있더라고. 근데 안 됐죠. 노력을 할 만큼 했는데 떨어지니까 '안 되려나 보다' 했죠.

-부모의 기대가 상당했는데 불합격해서 굉장히 낙심했겠어요. 무엇보다 부모의 실망감을 감당하기가 힘들었을 것 같은데.

김율 엄마, 아빠의 실망을 보는 것보다 제가 톱클래스에 들어가지 못할 그릇이라는 데 대한 자괴감이 컸어요. 절치부심했죠. 심적으로 제일 힘든 시기였어요. 그 후로 고등학교는 비교적 편하게 다녔어요. (민사고 준비하면서) 고등학교 3학년까지 해야 될 공부를 다 했었거든요. 지금 그때를 떠올려보면 그건 극기이자 거의 고문 수준이었던 것 같아요.

-이것만은 지키려고 노력했다, 같은 교육철학이 있었을까요?

김갑수 내가 결혼하고 아이가 생겨서 지금까지 오는 동안 필사적으로 한 게 있어요. 얘기를 많이 나누는 외식 자리를 꼭 마련하는 거예요.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이요. 지금은 바뀌었지만 전에는 일요일에 토크쇼 촬영을 했거든요. 끝나면 꼭 회식을 했어요. 근데 난 얘 만나려고 언제나 빠졌어요. 그래봐야 세 식구 아닙니까. 세 식구가 이런저런 얘기 나누는 건데, 그 시간을 가지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어요. 가족의 유대감이 끊어지지 않도록요.

“입대 전 차기작 낼 것” 
욕심도, 의지도, 열정도 충만한 이십대

정확하게 자기 의사를 어필하고, 딱 부러지게 다음 계획을 이야기하지만 카메라 앞에서는 수줍음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 영락없이 이십대다. 아버지와 마주 보며 미소를 연출해달라는 사진기자의 요청에는 끝내 만족스러운 컷이 나오지 않는다. 하긴 그런들 어떠랴. 능란한 포즈와 표정보다 2% 부족한 지금의 어색함이 때 묻지 않은 이십대라 가능한 것일 테니까. 하고 싶은 것도, 잘 해내고 싶은 욕심도 많은 그가 가장 근래의 관심사로 답한 것은 다름 아닌 ‘노래’다.

-다음 소설도 계획 중인가요?

김율

한 권 더 쓰고 군대에 가려고요. 이번 책 등장인물 중 한 명의 과거 얘기예요. 인물은 공유하지만 테마나 분위기는 전혀 다르죠.

-내친김에 한 권 더 쓰는 거네요.

김갑수

젊어 한때 흥에 겨워 한 짓으로 보기에는 가치가 더 높다고 봐. 이왕이면 본인이 원하니까 몇 권 더 써서 자기검증을 하고 유학을 갔으면 좋겠다라고 조언했어요. 그리고 유학을 가면 영원히 돌아오지 말고 영어권에서 영어로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기를 바란다고요.

외국에 나가서 영원히 살라는 말은 한국 사회에 살면서 느낀 답답함을 아들에게는 겪게 하고 싶지 않아서인가요?

김갑수

한국 사회가 장단점이 있어요. 사회적 지성이라 그럴까, 그 수준이 아직 낮기 때문에 조금만 잘해도 잘살아. 가령, 나 정도 되는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을 만나서 밥을 먹느냐고. 그런 게 가능한 게 한국 사회예요. 좁은 사회여서 그래요. 조그만 마을 수준밖에 안 된다고 봐요. 그처럼 한국에서는 조금만 뭘 할 줄 알면 실체보다 크게 부각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하~.(그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한국 사회는 지긋지긋한, 새삼 거론할 필요도 없는 많은 문제가 있죠. 나는 장기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가 거의 남미나 필리핀, 멕시코로 간다고 봐요. 이명박에서 박근혜 정부로 이어지는 사회의 멘탈이 있어요. 그 흐름을 보면, 그게 집권자들의 선택이 아니라 대중의 선택이거든요. 필리핀이 저렇게 엉망인 건 사실 필리핀의 수준이지, 아키노 집안이나 마르코스로 직결시킬 수 없는 문제예요. 우리도 기적적으로 경제 성장을 해서 뭔가 세계 강국이 될 것처럼 잠시 착각을 했지만 결국엔 아주 나빠질 것 같아요. 지사적인 입장에서 ‘조국에 돌아와 조국의 발전에 이바지해라’라고 말하고 싶지만, 길게 보면 국가와 민족이 경계가 없어지는 사회가 돼서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될 것 같거든요. 그래서 그냥 넓은 데 가서 활개 치는 그런 사람 됐으면 좋겠어요.

-부자간의 정치적 신념도 완전히 다르다면서요.


김갑수

나 같은 경우는 가령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숭배, 이런 것들을 보면 왕조의 연장이라고 보거든요. 그건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거나 성장해서 될 일이 아니라 그야말로 극복해야 할 벽 같은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도 민주화 운동기라고 봐요. 그러기 위해서 집단이 필요하고요. 민주화운동이라는 게 개개인의 자각이 아니라 하나의 덩어리, 민중이라는 덩어리가 세상을 뒤바꿔놓는 거니까요. 근데 얘네 또래는 이 세계가 ‘나’로 존재해. 나의 성공, 나의 실패. 그래서 자신과 한국 사회가 접목되어 있지 않고 따로 있더라고. 그러니까 나랑 내 처가 세월호 문제를 바라볼 때, 정권의 문제를 바라볼 때, 선거를 바라볼 때와 너무 다른 거예요. 사회적 성공 이외의 것들, 타자에 대한 관심에 대해서는 ‘내가 왜 타자에 대해 관심을 갖지?’라고 생각해요. 얘네 세대의 공통적인 문제인 것 같아요.

-소설 쓰는 것 외에 요즘 가장 관심 있는,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 건 뭐예요?

김율

살면서 지금까지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게 노래 연습이에요. 글 잘 쓰는 재주는 안 멋있어요. 학교에서 행사를 하면 어떤 친구들은 멋지게 연주를 하거나 득점을 하는데, 글 쓰는 재주는 기껏해야 리포트 작성할 때 빼고는 드러나게 멋지지가 않잖아요. (좌중 웃음) 그래서 노래를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커요.

김갑수

근래에는 기타도 치려고 하기에 내가 한대수 씨한테 부탁했어. 기타도 한대수 씨가 사준 거야.

-아니, 무슨 기타를 한대수 씨에게서까지 받아와요.(웃음) 정말 ‘대치동 아빠’네요.

김율

노래를 잘하려고 일생 노력했는데 아직도 음치예요. 근데 글은 6개월 만에 뚝딱 써지거든요. 자기와 맞는 매체가 따로 있는 것 같아요.

김갑수

아니, 기타를 배운다니까 한대수한테 기타를 받아다 주는 아빠가 세상에 어디 있느냐고. 그런 것도 (내 아들은) 몰라.

[- 더 많은 기사는 여성조선 6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