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갈비는 일제강점기부터 '추석명절이나 정초에 쇠갈비나 혹 물품을 많이 가져오는 자에게는 다소의 소작권을'(1929년 1월 29일자 동아일보) 줄 정도로 귀한 선물이었다. 증보산림경제(1765년)에 실린 '우협증방(牛脇蒸方·갈비찜)' 조리법 이후에도 갈비찜은 조선 후기 조리서에 꾸준히 등장한다. 특히 왕가의 음식발기(음식을 적은 글발, 찬품단자)에 갈비찜은 빠지지 않는 귀한 음식이었다.
1920년대 중반 평양에는 갈비구이 전문점들이 생겨났고 서울 전동식당에서는 '남유달이 갈비찜, 닭찜 같은 것을 하야 여러 손님을 끌고 돈푼도 곧잘 번다는 소문이'(1929년 2월 1일자 별건곤) 날 정도로 외식으로도 인기를 얻게 된다. 해방공간(1945~1950년) 시기에 서울의 고급 고깃집에서는 갈비찜을 스키야키, 불고기와 함께 팔았다.(1948년 10월 22일자 대동신문)
갈비 요리가 제법 대중화되는 1950년대에는 추석 음식으로 갈비찜이 등장한다.(1957년 9월 7일자 동아일보) 1960년 서울에서 열린 한·미고위회담에 갈비찜은 불고기와 더불어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소개된다. 1960년대가 되면 '갈비찜은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어려운 일이라 생각하겠지만 일 년에 한 번쯤 나누어 봄직한'(1962년 9월 12일자 동아일보) 추석 음식으로 소개된다. 60년대 중반이 넘어가면서 추석 무렵이면 갈비찜용 쇠갈비는 2~3일전에 예약을 해야 겨우 살 수 있고(1966년 9월 28일자 매일경제), 설날이면 정육점에서 품귀현상을 빚을 정도로 (1967년 1월 5일자 매일경제) 커다란 인기를 얻게 된다.
1975년 GNP가 531달러를 돌파하면서 육류소비가 급증하자 1976년 9월 외국산 쇠고기가 처음으로 수입됐고, 갈비찜은 본격적으로 대중화된다. 1960년대 말 대구 동인동에서는 고춧가루와 마늘을 넣은 찜갈비가, 경남 함양군 안의면에서는 고추장을 넣은 갈비찜이 생겨난다. 1980~1990년대를 거치며 갈비는 전국적인 외식으로 자리 잡는다. 달달하고 부드러운 갈비찜을 먹으며 사람들은 추석의 풍요를 실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