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국내에선 처음으로 삼성서울병원에서 발견된 'Cis-AB형 혈액형'이다. 혈액형과 관련된 딸의 유전자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AB형이 된 것이다. 이 사례는 일반인들에게는 고정관념을 깨는 일이지만, 의사들에겐 충격적인 일은 아니다. 사람의 피는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사실이 끊임없이 밝혀지고 있는 신비한 물질이기 때문이다.
흔히 알고 있는 ABO식 혈액형이나 Rh형 혈액형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우리는 보통 A, B, AB, O형과, 각각 이 혈액형들의 Rh-형 등 8가지 혈액형만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확인된 혈액형만 300가지가 넘는다. ABO식과 Rh식 혈액형 분류법 이외에도 30가지가 넘는 혈액형 분류법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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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액형은 절대적인 기준도 아니다. 심지어 바뀌는 경우도 있다. 백혈병이나 재생불량성 빈혈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피를 만들어내는 조직인 골수를 이식 받아야 한다. 골수 이식은 혈액형이 달라도 할 수 있다. 만약 B형인 사람의 골수를 O형에게 이식하면, 환자의 혈액형은 서서히 B형으로 변하기 시작해 완전한 B형이 된다. 피를 만들어내는 몸속의 공장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피는 현재 자신의 몸에 대한 모든 정보를 담고 있는 인체의 상황판이다. 핏속의 적혈구·백혈구 수치와 형태, 피에 담겨 있는 효소의 농도는 신체 상태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 피는 바이오산업의 미래이기도 하다. 바이오 기업 ‘테라노스’ 창업자로 올해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큰 화제를 모은 엘리자베스 홈즈(31)는 ‘피의 여왕’이다. 그는 “피 한 방울이면 240가지를 분석하고, 암을 비롯한 30가지의 질환을 진단해 내는 기술을 개발했다”며 수십억달러의 투자를 받았다. 최근 기술력이 과대 포장됐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고 있지만, 이론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한 기술이다. '피 한 방울로 모든 질병을 알아내는 시대'가 열릴 날이 머지않았다. /이영완 과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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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액형은 A,B,AB,O형뿐? 무려 300가지
'피'라는 말에는 많은 느낌이 담겨 있다. 뭔가 섬뜩하고 무섭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알고 보면 피는 광대한 우주 공간의 지구라는 별 위에서 우리가 따뜻한 체온을 가지고 생명체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존재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핏속에는 우리 몸을 지키고 자라게 하는 ‘생명체들’이 혈관을 따라 순환하고 있다.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혈장 등이 그 생명체들이다. 우리 몸에 있는 수많은 세포는 피를 통해 영양분과 산소를 공급받고, 침입자를 막으며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에너지 수송과 침입자 방어 전담
피는 골수에서 태어난 적혈구, 백혈구, 혈소판 등의 혈액세포와, 생명 활동을 위해 필요한 수많은 물질을 함유하고 있는 액체인 혈장으로 구성된다. 적혈구는 에너지대사에 필수적인 산소를 세포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혈액세포 중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다. 피 한 방울엔 적혈구가 약 3억개 들어 있고, 적혈구 안에는 산소와 결합하는 헤모글로빈이 약 200만개 들어있다. 헤모글로빈은 철분을 가진 헴이라는 색소 성분과 글로빈 단백질로 이뤄져 있다. 산소와 결합하는 헴이 빨간색을 내므로 적혈구가 빨갛고 피 색깔도 빨갛다.
백혈구는 박테리아, 바이러스 등 병원체로부터 우리 몸을 지키는 일을 한다. 외부 침입자의 종류와 특성에 맞게 대응하기 위해 많은 종류의 백혈구가 있다. 그중 과립구(호중구, 호산구, 호염구)들은 침입자들을 잡아먹거나, 과립 속의 무기를 배출해 염증반응을 일으켜서 적을 무찌른다. 또 단구세포나 대식세포는 침입자를 잡아먹고 림프구들에게 그 정보를 제공한다. 덕분에 이후에 같은 침입자가 오면 즉각 대응할 수 있다. 바로 면역 시스템이 가동되는 것이다. B 림프구는 항체를 만들어 침입자를 공격한다. 세포로 침투한 침입자들은 T 림프구와 자연살해(NK)세포들이 제거한다.
혈소판은 혈관 손상으로 출혈이 생겼을 때 피를 멎게 해준다. 이들은 혈관이 손상된 부위에 재빨리 달라붙어 서로 엉긴다. 그러고는 혈장 속에 있는 혈액 응고 인자들을 끌어모아 피를 떡지게 해 지혈시킨다. 손상된 혈관을 보수하여 원래 모습으로 회복시키는 일도 한다. 혈장에 있는 단백질 중에서 가장 많은 것은 알부민이고, 그 다음이 면역글로불린(항체), 혈액 응고 인자들이다.
◇300개가 넘는 혈액형
혈관을 따라 흐르는 피는 지금 이 순간의 모든 생명 정보를 담고 있다. 병원의 진단검사의학과는 혈액검사를 통해 혈액세포들과 수많은 혈장 물질을 측정하고 분석해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에 도움이 되는 정보를 모은다.
최근에는 각종 첨단기술을 이용해 측정 대상 물질을 분자 수준으로 넓혔다. 앞으로는 암 유전자 등 질병 관련 유전자도 피를 통해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한 벤처기업은 피 한 방울로 240가지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고 주장해 기업 가치가 엄청나게 치솟았다. 최근 그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되면서 논란이 되고 있다. 하지만 실험실에서 하던 많은 분석과정이 손에 들어오는 작은 플라스틱 칩과 극미량의 피로 대체되는 것은 사실이다. 바로 칩 안에 들어온 실험실 격인 ‘랩 온 어 칩(lab on a chip)’이다.
일반인들은 ‘피’ 하면 당장 혈액형을 떠올린다. 혈액형은 남녀가 상대의 성격을 알아보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19세기까지도피를 많이 흘리면 살아날 방법이 없지만 혈액형을 알게 되면서 다른 사람의 피로 보충할 수 있게 됐다. 누구나 잘 아는 ABO 혈액형은 1900년 칼 란트슈타이너가 발견했다. 이후 Rh 혈액형 등 30개의 혈액형군에서 300개가 넘는 혈액형이 발견됐다. 왜 이렇게 많은 것일까. 적혈구의 표면에는 저마다 기능을 가지고 있는 수많은 구조물이 있다. 단백질도 있고 사슬처럼 연결된 당분들도 있다. 바로 이들이 혈액형을 좌우한다.부르는 항원이 될 수 있다. A형 피는 A항원과 B항체를 갖고 있다. B형 피는 B항원과 A항체가 있다. A형 사람에게 B형 피를 수혈하면 A항원에 A항체가, B항원에 B항체가 각각 결합해 공격한다. 혈액형 중에 ABO와 Rh 혈액형만 유명하게 된 이유는 이 방법으로 구분한 혈액의 항원이 항체 형성을 유발하는 능력이 세기 때문이다. O형은 A든 B든 항원이 아예 없어 누구에게 수혈해도 면역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 대신 항체는 A와 B형을 둘 다 갖고 있어 다른 혈액형의 피를 수혈받지 못한다.
Rh 혈액형군(群)에는 D, C, c, E, e 등을 포함하여 50가지나 되는 혈액형이 존재한다. 우리가 보통 Rh형이라고 하는 것은 이 중에서 D 혈액형을 지칭한다. Rh 양성은 D 항원을 가지고 있는 경우이고 Rh 음성은 D 항원을 가지지 않는 경우이다. Rh 음성은
항체는 외부 침입자를 포착해 공격하는 면역물질이다. 항체마다 공격 대상이 정해져 있다. 공격 대상이 항원이다. 적혈구 표면의 수많은 구조물은 저마다 다른 항체를 유럽과 미국에서는 15~20% 정도로 흔한 데 비해 우리나라에서는 0.1~0.3% 정도로 아주 드물다. /권석운 서울아산병원 진단검사의학과 교수
철학강사가 만든 '혈액형별 성격'… 韓·日만 100년간 휘둘리고 있다
처음 만난 사람과 어색함을 깨느라 흔히 던지는 질문 중에 ‘혈액형’은 빠지지 않는 소재다. 많은 사람이 혈액형을 알면 상대방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고 믿는다. 정말 사람 혈액형은 성격을 결정짓는 요소일까. ‘혈액형별 성격’의 역사는 100년 전 독일에서 시작됐다. 당시 독일에서는 독일인이 태생적으로 다른 민족보다 우수하다는 근거를 찾는 우생학(優生學)이라는 학문이 유행했다.
1919년 독일 학자 루트비히 힐슈펠트는 ‘인종별 혈액 차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 연구에서 영국인, 프랑스인, 독일인은 A형이 B형의 두 배가 넘었다. 반면 흑인, 베트남인, 인도인 등은 B형이 더 많았다. 힐슈펠트는 이를 근거로, 진화한 민족일수록 A형이 B형보다 많다고 주장했다.
당시 독일에 있던 일본 철학 강사 후루카와 다케지는 힐슈펠트의 연구 결과를 본 뒤 주변 사람 319명을 조사해 '혈액에 따른 기질 연구'라는 글을 썼다. 다케지는 "혈액형이 다르면 성격도 다르다"고 주장했다.
1970년대 초 일본 작가 노미 마사히코가 다케지의 글을 기초로 '혈액형 인간학'이라는 책을 펴냈다. 혈액형에 따라 몸의 구성 물질이 다르고, 이것이 체질과 성격을 결정한다는 비(非)과학적 내용이었지만 일본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혈액형에 맞는 음식, 옷, 교육법까지 유행했다. 이 유행이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현재의 혈액형별 성격에 대한 믿음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100년 전의 비전문가가 불과 300여 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가 지금까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혈액형에 열광하는 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이다. 이는 두 나라 혈액형이 전 세계적으로도 독특한 ABO식이기 때문이다. 2010년 기준으로 한국인은 A형이 34%, O형이 28%, B형이 27%를 차지한다. 일본은 A형 37%, O형 31%, B형 22% 정도다. 확률적으로 태어날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AB형을 제외하면 혈액형이 고르게 분포돼 있다.
반면 프랑스는 A형이 44%, O형이 42%이고 미국은 A형이 40%, O형이 45%이다. 프랑스나 미국에서는 사람이 대부분 A형과 O형인 만큼 혈액형으로 사람 성격을 구분할 여지가 많지 않다. A형이 실제로 소심하다면, 프랑스와 미국에는 한국보다 소심한 사람이 많아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혈액형별 성격은 왜 꾸준한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일까. 심리학자들은 이를 ‘바넘 효과’ 때문으로 분석한다. 바넘 효과는 일반적 성격이나 심리적 특징을 자신만의 특성으로 여기는 경향이다. 예를 들어 “좋아하는 일은 적극적으로 하고, 싫어하는 일은 회피하려고 하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그렇다”고 답한다. 당연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교수는 “혈액형이 성격에 영향을 미친다면 유전적으로 성격을 규정하는 유전자와 혈액형을 결정하는 유전자가 연관이 있어야 하지만, 두 유전자는 전혀 관계가 없다”면서 “혈액형과 성격에 대한 과학적 연구 결과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도, 연구할 가치가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박건형 기자